'도시빈민의 시'라고 부를 만한 하나의 시양식을 가장 앞선 자리에서 이룩한 김신용 시인의 세번째 시집. 어린 나이에 가출하여 제대로 된 학력도 없이 부랑생활, 감옥살이, 지게꾼, 잡부, 막노동꾼 등의 최하층 밑바닥 생활을 해오다가 1988년, 그의 나이 마흔넷이 되던 해 『현대시사상』을 통하여 시인으로 등단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밑바닥의 소외받는 사람들을 관심권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에서는 지난 시대의 민중시와 유사성이 있다 해도, 민중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는 전혀 다르다. 자기 자신을 포함한 밑바닥의 소외계층을 형상화하면서 솔직한 고백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밑바닥 체험과 그런 체험을 하는 동안 자신의 몸과 마음속에 깃들었던 생각과 느낌들을 고백하듯 드러내며, 자칫 자기 연민과 합리화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을 넘어 우리에게 생의 진실을 만난 듯한 깨달음의 순간을 경험케 한다.
그 겨울의 공원에서, 한쪽 팔은 비틀리고 한쪽 다리는 구부러져 절룩이는 불구의 소녀를 만났다. 걸을 때마다 등넝쿨처럼 뒤틀리는 그 몸을, 밥 한 그릇, 하룻밤 싸구려 여인숙의 방세를 만들기 위한 삶의 도구로 사용하며 소녀는 새움 하나 틔우지 못한 채 시들어가고 있었다. 노인은 돈이 없었다. 소녀를 만날 때마다 그냥 미소만 보내주었다. 그 미소를 만들기 위해 물기 하나 없이 메말라버린 생의 척추에서 마지막 에너지를 다 짜내야 했다. 볼품은 없었지만 그 미소를, 소녀는 머리에 꽃처럼 꽂고 다가오곤 했다. 그때마다 노인의 관절은 기쁨으로 삐걱거렸고, 그 미소의 꽃만 피울 수 있다면 남은 생애의 골수를 다 짜내도 좋다고 생각했다. __「봄비」 부분
김신용
1945년 부산 출생으로, 1988년 시 전문 무크지 『현대시사상』 1집에 「양동시편-뼉다귀집」 외 여섯 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했다. 시집으로 『버려진 사람들』, 『개같은 날들의 기록』, 장편소설 『고백』, 『기계 앵무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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