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택수 시인의 지상에 시 한 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실천문학 2008. 8. 26. 09:39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김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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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을 끄자

풀벌레 소리

어둠과 함께 방 안 가득 들어온다

어둠 속에 들으니 벌레 소리들 환하다

별빛이 묻어 더 낭랑하다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한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그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들을 생각한다

발뒤꿈치처럼 두꺼운 내 귀에 부딪쳤다가

되돌아간 소리들을 생각한다

브라운관이 뿜어 낸 현란한 빛이

내 눈과 귀를 두껍게 채우는 동안

그 울음소리들은 수없이 나에게 왔다가

너무 단단한 벽에 놀라 되돌아갔을 것이다

하루살이들처럼 전등에 부딪쳤다가

바닥에 새카맣게 떨어졌을 것이다

(일부 발췌)

*

도시에서 어둠은 천연기념물이다. 이 어둠 속엔 귀뚜라미나 여치 뿐만 아니라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미세한 통로가 있다.

국가도 지정못하는 천연기념물을 위해 언어의 그린벨트를 치고, 효력없는 시나마 반포해서 입법과 사법에 맞서는 것은 시인의 일이다. 시의 법은 발뒤꿈치처럼 두껍게 낀 마음의 각질을 벗겨내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데도 한사코 도로변 소음과 단단한 아파트 벽을 뚫고 회귀하는 울음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는 일로부터 시작한다.

‘텔레비전’ 같은 문명의 빛이 잠시 물러난 자리에서 말랑말랑한 자연음악이 새살처럼 돋아나고 있다. 풀벌레 악단의 연주. 이 연주를 듣기 위해 우리는 서식지를 잃고 추방당한 어둠을 다시 모셔올 수는 없을까. 풀벌레들의 연주가 더 멀리 번져갈 수 있도록 마음에 잠시 정전을 시킬 수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