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택수 시인의 지상에 시 한 편

상처가 숲을 이루다

실천문학 2009. 1. 13. 14:12

상처가 숲을 이루다

                              박성우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매를 맞고 자란 나무가 있다
부지깽이도 파리채도 아닌 떡메로
작신작신 두들겨 맞으며
한 세월 건너온 나무가 있다
뒤통수가 얼얼할 때까지
눈알이 쏙 빠질 때까지
흠씬 두들겨 맞던 시절 건너온

상수리나무가 있다
전주 완산골 처마 낮은 한옥마을,
야트막한 오목대 산기슭에 오르면 밑동에
떡메 자국 선명한 상수리나무를 만날 수 있다

고픈 배 움켜쥐고 건너온 가까운 옛날,
떡메에 떨어진 상수리나무로 묵을 쑤어
거른 끼니를 겨우겨우 넘길 수 있었다 한다
몸에 덕지덕지 들어앉은 딱지가 여태 붙어 있는

 

밑동 굵은 상수리나무가 울울창창한 그곳은

나라를 절뚝이게 하려고 왜놈들이
치명자산의 혈을 철길로 끊어놓은 시린 산자락이기도 하다

 

*

마을 가까운 나무들은 대개 상처가 많다. 높고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서 숨어살면 사람들 손을 타는 성가신 일들이야 쉬 면할 수 있으련만 굳이 야트막한 산기슭에 내려와 이웃해서 살다보니 몸 성한 데가 없는 것이다. 시 속의 상수리나무도 가난한 마을 사람들에게 시달리다 보니 온몸이 상처투성이다. 이 상처를 통해 사람들은 주린 배를 달랠 수 있었다. 그래서 메는 메로되 찰진 '떡메'다. 지금도 몸에 들러붙은 딱지가 그대로 남아 있는 상수리나무는 이 땅의 어두운 역사까지 쓰다듬고 달래는 숲이 되었다. 나도 한 여자를 잊지 못하고 나무 수피에 그녀의 이름을 파 넣으며 아픔을 견딘 적이 있거니와, 모든 사랑은 이렇게 제 안을 파고든 상처를 품고 푸르다. 그러니 내게 날아오는 메를 어떻게 '떡메'로 만들 것인가. '창상(創傷)'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 상처와 창조는 본디 한 뿌리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