솜씨마을 솜씨기행 (2004)
지난 시절, 서구 추종의 근대화가 졸속으로 추진되면서 우리의 땅과 환경은 너무나 빠르게 그러나 획일적인 모습으로 변모했고, 그 과정 속에서 우리의 아름다운 원형들은 무가치하게 상실되어왔다. 시인이자 여행가인 이용한 씨와 실천문학사는 『사라져가는 토종문화를 찾아서―꾼』, 『사라져가는 토종문화를 찾아서―장이』, 『사라져가는 오지마을을 찾아서』, 『이색마을 이색기행』과 같은 여행서 시리즈를 통해 우리 땅 곳곳에 산재한 아름다움을 소개해왔고, 이 책 『솜씨마을 솜씨기행』 역시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기획된 책이다.
'이 땅에 깃든 내림문화 지킴문화를 찾아서'라는 부제가 보여주듯, 이 책은 여느 여행서에서나 볼 수 있는 명승지나 관광지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넓고도 웅숭깊은 우리 땅 구석구석에 깃든 다양하고 뿌리깊은 솜씨마을을 다루고 있다.
이 땅 면면히 깃들여온 내림문화와 지킴문화를 찾아 떠나는 여행
종종 우리는 마음의 '쉼'을 얻기 위해 여행을 떠나지만 고생만 하다 돌아오기 일쑤다. 놀러가서 먹고 마시고 망가지는 형태의 쾌락적인 '여행'은 삶의 새로운 충전이 되기는커녕 되레 몸의 피곤만 불러오기 때문이다. 여행은 삶을 복되게 한다.
그러나 여행과 관광은 엄밀히 말해 다르다. 여행이 풍경과 풍물, 역사와 문화, 사람과 마을의 속내를 들여다보고 가슴으로 그것을 음미하고 담아오는 것이라면, 관광은 그것의 겉치레를 구경하며 즐기는 것이다. 여행이 정신적인 충전을 위한 것이라면, 관광은 감각적인 충전을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땅 작은 마을들 곳곳에 비밀스럽게 살아 숨쉬는 내림문화를 제대로 읽어내는 여행은 어떨까. 수천 년 동안 사람과 사람의 손으로 삶으로 이어져온 솜씨마을을 찾아 떠나보자.
'솜씨'의 사전적 의미는 '손으로 무엇을 만드는 재주' 또는 '어떤 일을 해내는 수단'을 뜻한다. 단지 도구와 음식을 만들어내는 재주만이 솜씨가 아니라 어떤 일을 해내고 오랫동안 그 일에 종사해온 것 또한 솜씨인 것이다. 그러므로 솜씨는 우리네 전통 생활문화에 그 맥이 닿아 있고, 우리 것으로 대표되는 토종문화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책에는 손 솜씨를 부려 전통물품을 만들어내는 마을도 있고, 맛내림으로 내려온 옛 먹을거리를 만들어내는 마을도 있으며, 옛날 방식으로 옷을 짓거나 옷감을 짜는 마을을 비롯해 산이나 바다 등에서 무언가를 채취하는 마을도 있다. 이들 마을은 공통적으로 우리네 전통적인 의식주와 관련된 생활문화가 낳은 마을들이다.
우리네 전통 생활문화와 토종문화 체험의 길잡이
이 책은 바로 그런 풍경과 문화, 전통과 풍물을 간직한 36개 마을을 22개 테마로 엮어 계절에 따라 4부로 나누어 실었다. 고창 바지락마을, 산동 산수유마을, 지리산 고로쇠마을, 섬진강 재첩마을, 안동포마을, 제주 갈옷마을, 담양 죽물마을, 경주 비단마을, 한산 모시마을, 태안 해옥마을, 비금도 천일염마을, 양양 민속 떡마을, 봉화 한과마을, 영동 손곶감마을, 괴산 전통 한지마을, 양양 송이마을, 광천 토굴 새우젓마을, 산청 복조리마을, 무주 인동초 바구니마을, 하동 짚신마을, 횡성 참숯마을, 진부령 황태마을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생활방식이 달라지면서, 이들 마을의 내림문화, 지킴문화는 점차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는 곳이 상당수에 이르렀다. 사실 유명한 역사유적이나 문화유산에는 친절한 안내문도 많고, 책도 많고, 그것을 찾아가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무형의 이 생활풍속은 지금 만나지 않으면 영영 만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저자가 오랜 세월 발품을 팔아 기록한 이 책이, 그것들을 지켜내고, 지켜가는 데 약간의 보탬이라도 될 수 있기를, 아울러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 깃든 솜씨문화와 생활문화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는 데 작은 길잡이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글 이용한
시인. 1995년 실천문학신인상 수상. 현재 프리랜서로 우리나라 각 지역의 풍물과 민속, 토종문화와 지역문화의 흔적들을 더듬어 기고해오고 있다. 시집 『정신은 아프다』(실천문학사, 1996), 문화기행서 『사라져가는 오지마을을 찾아서』(실천문학사, 1998), 『사라져가는 토종문화를 찾아서―꾼』(실천문학사, 2001), 『사라져가는 토종문화를 찾아서―장이』(실천문학사, 2001), 『사라져가는 이 땅의 서정과 풍경』(웅진닷컴, 2002), 『이색마을 이색기행』(실천문학사, 2002) 등을 펴냈다.
사진 안홍범
사진가. 『샘이깊은물』 사진부장을 지냈으며, 현재 프리랜서 사진가로 우리나라 전통문화와 지역문화, 건축, 풍물과 민속 등을 사진으로 담아내는 작업을 꾸준히 해오고 있으며, 더불어 해외 여러 나라의 도시와 풍물, 문화 관련 사진작업도 하고 있다. 『사라져가는 이 땅의 서정과 풍경』(웅진닷컴, 2002), 『이색마을 이색기행』(실천문학사, 2002) 등을 펴냈다.
고창 바지락마을: 전북 고창군 심원면 하전리/산동 산수유마을: 전남 구례군 산동면 위안리
지리산 고로쇠마을 경남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목통마을, 전남 구례군 토지면 문수리
섬진강 재첩마을: 경남 하동군 하동읍 목도리 하저구/안동포마을: 경북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
제주 갈옷마을: 제주도 남제주군 표선면 성읍리/담양 죽물마을: 전남 담양군 담양읍 향교리, 객사리
경주 비단마을: 경북 경주시 양북면 두산리/한산 모시마을: 충남 서천군 한산면 동산리
태안 해옥마을: 충남 태안군 소원면 파도리/비금도 천일염마을: 전남 신안군 비금면 구림리, 덕산리
양양 민속 떡마을: 강원 양양군 서면 송천리/봉화 한과마을: 경북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
영동 손곶감마을: 충북 영동군 상촌면 물한리/괴산 전통 한지마을: 충북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신풍마을
양양 송이마을: 강원 양양군 현북면 명지리/광천 토굴 새우젓마을: 충남 홍성군 광천읍 옹암리 독배마을
산청 복조리마을: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신촌, 덕치마을/무주 인동초 바구니마을: 전북 무주군 설천면 심곡리 배방마을
하동 짚신마을: 경남 하동군 적량면 고절리, 하동읍 신기리/횡성 참숯마을: 강원 횡성군 갑천면 포동리 고래골
진부령 황태마을: 강원 인제군 북면 용대리
향긋한 토속 문화현장을 찾아서 ―― 박영석 기자, 조선일보(2004. 04. 24.)
향긋한 토속 문화 현장을 찾아서
솜씨마을 솜씨기행
이용한 글·안홍범 사진/ 실천문학사/ 303쪽/ 1만5000원
손재주로 빚은 토산품·진미(珍味)·의복, 산하에서 얻은 천연 채취물은 지방 문화로 꽃피어 옥토를 옹골차게 다져왔다. 저자(프리랜서 토속 문화 기고가)는 “가슴으로 음미하며 담아오는 ‘여행’이 정신적 충전이라면, 쾌락을 위한 겉치레 ‘관광’은 감각적 충전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가 우리 땅 ‘여행’을 통해 22개 테마와 사계(四季)로 나눠 소개하는 36개 마을은 내림(전승)과 지킴(토속) 문화의 정수다. 명승지·관광지에 대한 단순 안내가 아니라, 풍경·문화·전통·풍물이 수놓아진 마을 속 기행이다.
잡지 사진부장을 지낸 프리랜서 사진작가의 사진을 더해 생생한 정한(情恨)을 전한다. 봄엔 노란 꽃, 가을엔 붉은 열매를 선보이는 산동 산수유 마을(전남 구례군). 고풍스러운 돌담과 돌서낭당, 논·밭 가는 소와 농부, 5일장이 어우러진 운치는 각지의 화가·사진가를 불러 모으는 탐스러운 그 자체 완성작이다.
섬진강 재첩 마을(경남 하동군) 풍광은 새벽 골목길을 울리는 “재칫국 사이소” 하는 행상의 살가운 외침이며 시원·깔끔·담백한 국물 향을 떠올리게 한다. ‘하늘이 내린 약수’를 간직한 지리산 고로쇠 마을(경남 하동군)을 다루는 글엔 탐욕 탓에 고사(枯死)하는 나무에 대한 연민이 담겨 있다.
갈옷 마을(제주 남제주군)은 색조를 뽐낸다. 흙·억새 같은 ‘자연의 빛’을 옮겨 놓은 갈옷(풋감을 으깨 염색해 만든 제주 특유의 노동복)과, 파란 하늘·돌하르방·방사탑·띠집(바람 피해로부터 보호하려 집줄을 그물처럼 맨 지붕 집) 등 주변이 어울려 만든 소박한 조화미다.
죽물 마을(전남 담양군)에서 그림·명암·농담(濃淡)까지 집어 넣은 세밀한 죽공예 작품을 만드는 장인(匠人), 비단 마을(경북 경주시)에서 누에고치로 실을 뽑아 내리고 날고 매고 짜서 손비단을 만드는 고부(姑婦)를 만나며 그들의 땀을 전한다. 저자가 발품을 팔아 조명한 곳은 푸근한 안식을 선사함과 동시에 ‘잊혀져가는 것들’에 대한 향수와 애착을 자극한다.
급변하는 세상 속에 숨어 ‘당장 안 보면 영영 못 볼 것 같은’ 고장에 쉬 다가가도록 돕는 여행 수첩과 다른 마을·구경거리를 실어 여행 안내서 역할을 한다.
--조선일보, 박영석기자 yspark@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