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꽃을 삼킨 아이 (2010)
실천문학에서 펴내는 청소년을 위한 문학선 ‘담쟁이 문고’의 여섯 번째 작품 『얼음꽃을 삼킨 아이』는 1970년대에 십 대를 보낸 한 소녀의 아픈 성장담이다. 1994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한 소설가 박향의 첫 장편소설로, 시련을 이겨내고 통과의례로서의 터널을 무사히 건너와 비로소 ‘성장’에 이르는 계몽성 강한 일반 청소년소설에서 한 발짝 비켜서 있다. 오히려 1970~1980년대 문학작품 속, 억압적인 정치사회 현실 속에서 성장을 유보하거나 거부하는 인물들의 반(反)성장 정서에 더 가깝다. 유신과 개발독재의 시대였던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이 작품의 비극적이고 충격적인 결말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을 듯하다.
“폭력의 땅” 위에 버려진 소년소녀(들)을 위한 “성장소설”
『얼음꽃을 삼킨 아이』는 가족사와 시대사라는 양 축을 배경 삼아 ‘학교’와 ‘가정’이 어떻게 무너져 내리는지 직시한다. 학교와 가정 역시 국가의 하부조직으로 폭력과 억압의 정서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평범한 가정에 차례로 들이닥치는 참혹한 주검들은 살아남은 가족마저 죽음과 다를 바 없는 지경으로 내몬다. 특히 아버지-아들로 이어지는 죽음은 의미심장하다. 양쪽 모두 직간접적으로 ‘국가(학교)기구’의 폭력에 의한 죽음이며, 평범한 가정의 (정신적) 기둥(아버지-딸, 어머니-아들)이었다는 점에서 파국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끝끝내 살아 있음으로 세계의 폭력과 타락에 맞서는 자들이 어머니와 딸(들)이라는 점은 마지막까지 생의 긍정을 놓지 않으려는 작가의 모성적 시선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독재정권의 희생양이 된 아들의 죽음 앞에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어머니, 학교와 가정이 휘두른 폭력으로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큰언니, 어쩌면 가장 큰 희생자일는지도 모를 주인공 수희, 이 세 여자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밥을 먹는 결말부는 가슴 뻐근한 고통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이 고통은 타락한 세계가 휘두르는 억압과 폭력에 맞선 개인의 참혹한 삶의 진정성에서 오는 감동의 다른 이름이다.
“방법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이건 나쁜 놈을 혼내는 일이다.”
한 소녀의 생을 건 완전범죄
학생과 선생의 연애, 배반과 복수, 몰락하는 가족사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중심에 사춘기 소녀 수희가 있다. 수희는 어른들에게는 심부름 잘하는 착한 아이, 친구들에게는 똑 부러지는 모범생이라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한 번도 드러낸 적 없는 마음 속 깊은 곳엔 가족의 행복을 강탈해간 자를 향한 독기를 품고 있다. 거짓된 세상과 싸우는 수희의 성장담은 시대적 배경과 맞물려 그 의미가 확장된다. 1970년대는 바로 영웅과 그 영웅이 약속한 이상국가라는 또 하나의 거대한 로망이 지배했던 사회였기 때문이다. 가난에 허우적거리는 민생을 구해내고 조국근대화를 약속하는 대통령 그리고 광주에서 주검으로 변한 오빠, 어느 날 문득 학교에서 사라진 사회 선생 등의 에피소드는 단순한 시대 묘사를 넘어선다. 국민을 기만하는 ‘부자 나라’의 꿈은 독재자가 만들어낸 낭만적 거짓에 다름 아니었음을 암시한다. 육영수와 박정희의 죽음, 5ㆍ18로 이어지면서 펼쳐지는 개발독재 시대의 풍경은 조숙해 보이지만 사랑이라는 해독되지 않는 암호를 앞에 둔 채 고뇌하는 어린 소녀의 이야기를 통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비겁하고 잔인한, ……이것이 사랑?”
십 대 소녀에게 사랑은, 첫사랑이라는 한 단어로 함축되는 풋풋하고 가슴 설레는 경험일까 아니면 육체의 성숙에 자연스레 뒤따르는 모호한 열망일까? 소녀들의 성과 사랑을 소재로 한 대개의 이야기들은 그러한 가정을 뛰어넘지 않는다. 그러나 『얼음꽃을 삼킨 아이』의 주인공 수희는 ‘사랑’을 깨우쳐주어야 할 어리석은 감정으로 통칭한다. 남학생들의 저질스런 놀이에 의해 ‘나쁜 짓’으로 규정되어버린 성에 대한 원체험과 언니의 연애편지로 간접체험한 사랑. 그로써 수희가 품게 된 것은 남성적 질서에 대한 분노와 혐오다. 수희는 사랑한다는 말은, 곧 폭행하여 깔아뭉개겠다는 말이라고 해석하며 남자친구 현성의 고백도 그를 향한 자신의 감정도 외면해버린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수희는 언니의 옛 연인 배도연 선생과 맞닥뜨리고, 치밀한 복수를 계획한다. 그러나 수희의 복수가 완료되었을 때 이전까지 명료했던 선과 악, 그리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는 불분명해지고 폐허만이 남는다.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 찬 세계, 폐허가 되어버린 땅 위에서 우리에게 ‘성장’의 참의미를 되묻는 이 작품은 발랄한 정서와 따뜻한 문체로 포장된 성장소설의 전형성에서 탈피, 21세기식 ‘폭력의 땅’, 위태로운 삶의 전장에 내몰린 이 땅의 소년소녀들을 위한 진정한 ‘성장소설’로 기록될 것이다.
추천사
성실한 아버지와 야무진 어머니, 착한 장녀와 듬직한 장남 그리고 당돌한 막내딸. 가히 대한민국의 모범이라 할 만한 가족이다. 하지만 그들의 작은 집 아래에는 박정희 개발 독재 시대가 잉태한 다양한 얼굴의 폭력이 진앙으로 도사리고 있다. 마침내, 사소한 사건 하나로 균열이 시작된 그들의 작은 집은 잇따른 주검과 함께 돌 더미로 무너져 내린다. 육영수의 죽음에서부터 5ㆍ18항쟁의 참혹한 대단원까지, 1970년대를 삼차원으로 복원해낸 시대적 배경 속에서 ‘얼음꽃을 삼킨 아이’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겪어낸 시간들은 한 소녀의 아픈 성장담이자 폭력의 땅 위에 세워진 우리 현실에 대한 르포이다._이현(동화작가·소설가)
박향_ 1963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났다. 1994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1999년 제3회 부산소설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으로 『영화 세 편을 보다』가 있다. 현재 부산에서 초등학교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사람이 사는 세상 이야기를 앞으로도 계속 소설 속에 담아내고 싶다. 요즈음은 특별히 청소년들의 마음속을 기웃거리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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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적 가족사와 '70년대 슬픈 풍경' ―― 김건수 기자, 부산일보(2010. 7. 3.)
‘폭력의 땅’에 대한 얼얼한 고발 ―― 이완 기자, 한겨레 신문(2010. 7. 2.)
70년대의 아픈 성장담 ―― , 연합뉴스(2010. 6.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