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랑빌 우화-동물들의 공생활과 사생활 (2010)
풍자와 재미, 상상력을 두루 갖춘 19세기 프랑스의 대표적 우화소설. 이름 없는 곤충들을 내세워 사랑을 이야기하고, 나비와 두꺼비를 통해서 인간의 미추를 생각하며, 누에를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느낀다. 150여 컷에 이르는 감각적이고 예민한 삽화와 함께 펼쳐지는 그랑빌의 끝없는 유머와 상상의 세계에 빠져보자.
동물들의 눈으로 본 재미있는 인간 세상
널리 알려진 이솝으로부터 조지 오웰에 이르기까지 우화소설은 역사가 길다. 동식물을 의인화하여, 이성과 감정을 부여받은 이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인간에게 도덕과 처세의 교훈을 던지는 우화라는 형식은 일단 딱딱하지 않은데다가 상상력을 자극하여 많은 이들을 매혹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자유로운 풍자성이야말로 우화의 강점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인데, 19세기 프랑스의 대표적 우화소설이라 할 『그랑빌 우화』(Public and private life of animals, 동물들의 공생활과 사생활)도 풍자와 재미, 상상력의 고양이라는 우화소설의 미덕을 두루 갖추고 있는 작품이다. 그보다 한 세기 반 전 씌어진 라퐁텐우화의 삽화를 그린 이로 더 잘 알려졌지만, 그랑빌은 이후 에리히 캐스트너나 오웰, 그리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태니얼에게 이르는 우화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중요한 예술가이다.
이 책에서 일단 독자가 경탄하게 되는 것은 150여 컷에 이르는 감각적이고 예민한 삽화이지만, 글 또한 만만치 않다. 작가는 셰익스피어를 떠올리게 하는 유려한 명구들(“행복을 찾으려면 햇빛보다는 구름을 좋아해야 하고 화창한 날씨보다는 비를 좋아해야 할 것 같네. 자넨 아무것도 안 가지고서도 부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해. 이미 저지른 일이나 한번 내뱉은 말은 다 잘한 일이라 생각하고, 아무것도 안 믿으면서도 모든 것을 알아야 하지.”), 버나드 쇼를 연상시키는 재치 있는 풍자(“귀족들은 이 나라의 자랑입니다. 햇살 속을 날아다니며 어떻게 하면 아주 즐겁게 지낼 수 있을까 고민하는 데 여념이 없는, 날개 넷 달린 개미들이죠.”)로 지적 쾌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 이 책이 나오게 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인간에게 온갖 박해와 수모를 받으며 노예 취급을 당하는 전 세계 동물들이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파리의 식물원에서 국제동물회의를 소집한다. 동물들마다 자신들의 특성에 비추어 인간을 성토하고 급기야 전쟁불사마저 외치지만, 전쟁은 자유와 평화를 보장하지는 못하리라는 판단에 이르게 되고, 또 한편으로 동물공화국을 세우자는 이상은 저마다의 이해관계가 충돌하여 성사되지 못한다. 결국 동물들의 삶을 인간의 눈이 아닌 자신들의 체험에 입각해 기록하고 편집하여 책을 내놓자는 결론에 도달한다.
동물들의 체험담은 다채롭고 역동적으로 펼쳐진다. 프랑스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귀족과 평민 사이의 삶을 체험한 산토끼 이야기로부터 개미와 꿀벌과 늑대 사회를 찾아 나선 참새의 여행기, 철학적 명상으로 외롭게 살아가는 펭귄 이야기, 미련둥이 남편을 운명처럼 믿고 살게 된 그레이하운드의 심경 고백에 이르기까지 그랑빌의 유머와 상상의 세계는 끝없이 이어진다.
그렇지만 그랑빌의 상상력은 그가 작품의 소재로 인간에게 익숙한 새나 짐승보다는 곤충이나 파충류를 이용하고 있다는 데서 더욱 돋보인다. 이름 없는 곤충들을 내세워 사랑을 이야기하고 나비와 두꺼비를 통해서 인간의 미추를 생각하게 하며 누에를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겁게 느끼도록 한다. 이렇듯 급진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예술가 그랑빌에게 예술적 창조란 일종의 꿈꾸기였는지 모른다. 그 자신이 직접 쓴 묘비명은 그러한 자신을 적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는 만물에 생명을 주었고, 온갖 정성을 기울여 모든 것을 움직이고 말하게 만들었다.”
또한 그랑빌은 우화가 갖는 전통적인 기능도 도외시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 그는 사회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비판함으로써 공화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과감하게 보여준다. 부인할 수 없는 과학의 발전으로 점점 소외되는 인간성을 고발하며, 더 나아가 세상은 인간 없이도 잘 지낼 수 있게 될 만큼 비인간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시키고자 한다.
그랑빌(J. J. Grandville 본명 : Jean-Ignace-Isidore Grandville)
프랑스의 판화가이며 삽화가인 그랑빌은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이다. 그러나 그는 19세기 상징주의 시인 보들레르나 말라르메가 극찬한 것처럼 당시대에 가장 탁월한 상상력을 발휘한 예술가였으며, 훗날 20세기 초현실주의의 선구자로 격상되기도 했던, 19세기 그래픽아트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랑빌은 작품 속에 사회적·도덕적 논평을 담아 정치현실을 풍자하거나 세태를 묘사하기로 이름났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이름을 빛낸 것은 그의 환상적 예술미학이다. 그는 세심한 관찰력과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독자를 경이롭고 새로운, 그러나 다소 우울한 자연 세계의 발견으로 초대하며, 잠재된 의식의 확대인 꿈의 미학을 삽화로써 처음 선보여 상징주의자들과 초현실주의자들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그랑빌은 1803년 무명 화가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부터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다. 스물한 살에 파리로 건너가 정치 풍자 만화가로 활동했는데, 그때부터 5년 동안 그의 시사만화는 당시 제일 유명한 풍자 언론지였던 『르샤리바리』와 『르카리카튀르』에 실렸다. 그랑빌은 1835년에 자신이 몸담고 있던 언론사가 루이 필립 정부에 의해 폐간되자 다른 생계수단을 찾아 책 삽화가가 되었는데, 이 분야에서 대단한 명성을 얻게 된다.
그랑빌은 라퐁텐과 라브뤼예르 작품의 삽화를 그렸고, 『걸리버 여행기』와 『로빈슨 크루소』의 프랑스판을 도안했다. 경력이 쌓여가면서 그는 특별히 자신의 목적에 맞는 책들의 삽화를 그리게 되었는데, 1842년에 출판한 『그랑빌 우화』에서는 이러한 그의 모든 재능들을 엿볼 수 있다.
보들레르는 그랑빌의 상상력에 찬사를 보내며 그랑빌을 두고 “창조물은 재창조하는 데 일생을 보냈다”고 칭송했고 상징주의의 대표적인 시인이었던 말라르메도 그랑빌을 찬양해마지 않았다.
프롤로그 | 펭귄의 삶과 철학적 견해 | 덫에 걸린 여우 | 산토끼 이야기 | 파리 참새의 여행 | 늙은 두꺼비의 슬픔 | 연극비평가 푸들 | 딱정벌레의 고난 | 명예를 얻고자 하는 동물들의 교과서 | 그레이하운드의 딜레마 | 초상화가 대머리 원숭이 | 아프리카 사자의 파리 여행 | 나비의 모험 | 누에를 위한 추도사 | 독자에게 드리는 글
사건일지 | 흰 지빠귀 이야기 | 두 곤충의 사랑 | 프랑스 고양이의 사랑 모험 | 제7천국 | 의사 동물들 | 기린의 연애편지 | 까마귀의 불평 | 늙은 띠까마귀의 추억 | 마지막 장 | 그랑빌의 작품세계
사람들아, 속 좀 차리고 살아라 ―― 최종규 기자, 오마이뉴스(2005. 04.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