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의 적들 (2004)
최근 뜨거운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국가보안법을 정면으로 다루는 소설. 작가 이인휘는 ‘국가보안법’이라는 올무에 걸려 한 청년의 삶이 찢겨지고 뒤틀려지는 과정과, 그가 자신의 삶을 일그러뜨린 ‘적’의 실체를 더듬어가면서 자신을 되찾아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냄으로써 우리를 저 위대한 연대의 투쟁과 사랑 속으로 깊숙이 끌어들인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선정 우수문학도서
“나약하고 불안한 내 안의 적들과 내가 상관없는 것들이라고 외면했던 내 밖의 적들이 가한 모순들을 헤치며 여기까지 빛을 찾아온 게 틀림없습니다.
내가 스스로 내 빛을 차단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내 삶을 꺾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어떤 힘도 생명을 찾아나가는 존재의 빛을 꺾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최근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국가보안법은 독재정권 유지의 도구로서 악용되어온 대표적인 반인권 악법이므로 남북관계 및 시대환경의 변화에 맞추어 폐지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국가보안법은 국가체제 수호의 마지막 보루이므로 일부 개정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존속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한치의 양보도 없이 맞서고 있는 것이다.
『활화산』의 작가 이인휘가 8년 만에 펴낸 장편소설 『내 생의 적들』은 바로 이 국가보안법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그는 이 작품에서 ‘국가보안법’이라는 올무에 걸려 한 청년의 삶이 찢겨지고 뒤틀려지는 과정과, 그가 자신의 삶을 일그러뜨린 ‘적’의 실체를 더듬어가면서 강고한 국가폭력에 굴복하는 대신 그에 당당히 맞섬으로써 자신을 되찾아가는 모습을 통해 우리를 저 위대한 연대의 투쟁과 사랑 속으로 깊숙이 끌어들인다.
수많은 사람들이 삶과 야합해서는, 자신의 가슴에 남겨진 식어버린 화인(火印)을 내보이며 오래전 자신이 품었던 불의 찬란함에 대해 떠들어대는 동안, 그들이 꺼뜨리고 가버린 불꽃마저 가슴에 안고 한결같이 시대의 질곡과 싸워온 작가의 진정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 작품은, 시대의 난제를 문학의 혁명성으로 돌파하고자 하는 작가정신이 일구어낸 소중한 결실이다.
작가는 우리 시대의 역사적 전환기였던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5월 17일부터 현재까지, 한 사내가 살아온 24년의 이야기를 역동적으로 엮어 그 시절을 겪어온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들의 24년은 어떤 세월이었냐고 묻고 있다. 우리 시대를 진지하게 이해하려는 독자라면 결코 이 소설을 무시하거나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어두운 과거로부터 뚜벅뚜벅 걸어나온 우리 시대의 초상
이 소설은 사십대 중반의 김광훈이 한밤중에 가리봉파출소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집을 나서는 것으로 시작된다. 파출소에 도착하니 나경중이라는 사내가 가리봉 오거리에 세워진 이정표를 부수려다 잡혀와 있다. 나경중은 아내의 친구 남편으로서 학생운동을 하다가 노동운동으로 뛰어든 사내다. 오래 전 아내를 통해 알게 된 이 사내는 자폐아를 낳고, 뒤이어 쌍둥이를 갖게 되면서 생활고에 허덕이다, 결국은 한 조직을 이끌던 리더의 자리를 내놓고 모든 운동가들과의 교류를 끊고 살아간다.
파출소에서 나온 두 사람은 인적이 끊긴 밤거리를 걷는다. 가리봉 오거리는 화려한 고층건물들이 들어차 있다. 오래전 일공단, 이공단, 삼공단으로 불렸던 거리가 어느 날 슬며시 디지털 일번지, 이번지, 삼번지로 바뀌어 이정표에 박혀 있다. 나경중은 사거리에 서서 독백처럼 말한다. “모든 게 혼란스럽고, 나라는 존재가 있기나 한가 싶습니다. 여기서 한 블록만 넘어가면 내가 살고 있는 집이고, 그 허름한 집과 내 사는 모습은 변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저 거리는 디지털 거리로 첨단 산업단지로 변해가고 있는 겁니다. 세상을 바꿔내야 한다며 내가 이곳에 삶의 터전을 잡은 지 이십사 년. 그 이십사 년의 세월을 두고 저 거리와 내가 살고 있는 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혼란스럽더군요. 도대체 이십사 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나경중은 쓸쓸한 웃음을 남기며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김광훈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절망에 젖어 사라져가는 나경중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1980년 5월에 만났던 한 여자를 떠올리며 과거 속으로 빠져든다.
김광훈은 산동네 꼭대기 집에 살던 가난한 도시빈민의 자식이다. 공장을 다니며 야학에서 공부하여 대학까지 갔지만, 생활이 궁핍해 학교 서클룸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지내고 있다. 시인의 꿈을 키우며 문학서클에 몸담고 있던 김광훈은, 초현실주의와 낭만주의적 실존주의에 경도되어 역사라는 것도 늘 반복될 뿐이어서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의미가 없다고 단정하며, 세상과 철저하게 거리를 둔다. 그런 그가 1980년 5월 17일 밤에 같은 서클 친구이자 총학생회 간부였던 이상현과 함께 있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사내들에게 폭력을 당하고 끌려간 후, 자신과 관계없다고 믿었던 현실에 의해 짓밟히기 시작한다. 이상현의 의문의 죽음에 연루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고, 불순분자로 몰려 강제징집을 당했는가 하면, 국가보안법 7조 고무찬양죄를 뒤집어쓰고 남한산성까지 끌려가게 된다.
모든 형기를 끝마치고 세상 속으로 나오지만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가 자신을 만나기 위해 가슴앓이를 하다가 비참하게 죽은 것을 확인한다. 절망과 비애에 싸인 그는 자포자기 상태로 자신을 방치하고, 안기부에서는 여전히 그를 관찰 대상으로 삼아 협박하며 사람들과 단절시키고자 한다. 그는 안기부의 감시를 피해 구로공단을 떠돈다. 피폐한 삶 속에서 병을 얻고 절망하던 김광훈은, 1980년 잠시 들렀던 적이 있던 친구의 집으로 내려가 농사일을 거들며 지낸다. 다시 살아갈 희망을 붙들려고 애쓰던 무렵, 한 여자가 김광훈을 찾아온다. 그는 그녀를 통해 8년 동안 자신이 알 수 없었던 진실에 접근하게 되고, 그 진실의 실체를 파헤쳐가면서 결국 사회와 무관한 존재는 없으며, 사회의 불행이 곧 개인의 고통과도 닿아 있음을 깨닫고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와 자신의 관계를 들여다보게 된다.
시대의 질곡을 헤치고, 영혼의 빛을 찾아서
이 소설은 프롤로그, 1부 그 여자, 2부 노루의 춤, 3부 끝나지 않은 노래,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다. 프롤로그에서 ‘24년 동안 이 거리와 저 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라는 화두를 나경중으로부터 받아쥔 김광훈이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고, 다시 에필로그로 나와 현재의 삶 속에서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더 나아가서는 현재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살아온 세월은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가’를 되묻고 있는 소설이다.
이 소설에는 두 명의 여주인공이 나온다. 순결과 사랑으로 상징되는 오연희, 그녀는 왼쪽 발을 절고 왼쪽 손과 손가락이 짧은 불구의 몸을 가진 여자이다. 이 여자가 가진 불구의 몸은, 광주항쟁이 아직도 미완성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 한 사람 이정혜, 그는 오빠의 죽음(의문사)으로 인해 세상의 모순을 깨닫고, 더 나은 세상이 오기를 소망하며 전력을 다해 세상과 맞서 싸우며 살고 있는 전교조 선생이다. 김광훈은 결국 순결과 사랑으로 상징되는 오연희에 의해 구원받는 게 아니라 세상과 맞서서 싸우고 있던 이정혜에 의해 구원되는 모습으로 그려지면서 작가의 정신이 현실문제를 직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더불어 살아야 아름다울 수 있는 우리의 삶은 그 어떤 개인이나 집단 또는 국가의 힘의 논리에 의해 지배당할 수 없는 것이며, 지금 우리의 모습이 실망스럽다면 그건 우리가 아직 그 정도의 빛밖에 보지 못하고 찾지 못했다는 반증으로, 새롭게 그 빛을 찾아가야 한다는 작가의 믿음을 드러내 보여주는 대목이다.
“어두운 시대를 겪어온 많은 사람들의 삶과, 보이지 않게 도움을 준 여러 친구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 소설이, 부디 누군가에게 작은 힘이라도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는 작가의 말에서 이 작품을 세상에 내놓은 작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인휘
1958년 서울 출생. 야학에서 공부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명지대 무역학과에 입학했다. 3학년까지 다녔지만 광주민중항쟁을 겪으며 대학을 자퇴하고 군대로 피신한다. 제대 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농촌을 떠돌며 농사를 짓다가 서울로 돌아와 공장에 들어간다.그곳에서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 노동운동의 길로 들어섰고, 운동 과정에서 함께 활동했던 박영진이 파업 도중에 분신하자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추모사업회를 만든다. 이후 구로 독산 지역에서 추모사업회를 통해 노동운동을 하면서 소설을 썼다.
광산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을 그린 『활화산』, 수배당한 노동운동가의 삶의 질곡을 그린 『문 밖의 사람들』, 남성 페미니즘 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연 『그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 등을 발표했다.
진보생활 문예지 『삶이 보이는 창』을 만들어 6년 동안 이끌어오다가 [사단법인 디지털 노동문화 복지센터]로 발전시킨 뒤 후배들에게 넘겨주고, 8년 만에 새로운 소설 『내 생의 적들』을 썼다. 현재 민족문학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프롤로그 - 먼 기억 속으로
1부 그 여자
2부 춤추는 노루
3부 끝나지 않은 노래
에필로그 - 빛을 찾아서
작가후기
소설가 이인휘 씨, 국회의원 전원에게 신작소설 전달 ―― 조호진 기자, 오마이뉴스(2004. 10. 17.)
내 생의 적들,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건재하다 ―― 이동권 기자, 민중의소리(2006. 07. 27.)
[문학이 머문 풍경]현기영 ‘지상에 숟가락 하나’ ―― 김영주 기자, 서울신문(2004. 11. 18.)
‘괴물’ 보안법을 소설 법정에 세우다
이인휘씨 새 장편 '내 생의 적들'
노동운동 출신 작가 이인휘(46)씨가 국가보안법과 의문사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장편소설 〈내 생의 적들〉(실천문학사)을 내놓았다.
순수파 몽상가 대학생에 씌어진
고문 강제징집 의문사 '올가미'
소설식 '양심선언' 국회 전달 계획
국가보안법이라는 괴물을 소설의 마당이자 법정으로 불러내기 위해 작가는 전형적이면서도 이상적인 인물을 동원한다. 국가보안법이니 민주주의니 하는 문제들이 자신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믿는 ‘순수파’ 대학생 김광훈이 그런 인물이다.
1980년 광주학살 무렵 대학에 다니던 그는 전공인 무역학보다는 니체와 초현실주의 시들에 빠져 사는 ‘몽상가’였다. 그러나 저 5·18의 전야에 우연히 학생운동가였던 친구 이상현과 함께 있다가 안기부원들에게 연행되면서 그의 믿음과 현실의 삶은 어긋나기 시작한다. 초현실주의 시들 따위로는 흉내조차 내지 못할 고문실의 끔찍한 고통을 거쳐 그는 군에 강제징집된 데 이어 국가보안법 제7조 고무찬양죄를 뒤집어쓰고 ‘남한산성’ 군 교도소로 보내진다. 그사이 사랑하던 여자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를 면회하러 왔다가 트럭에 치여 죽는다.
고문실에 끌려간 그가 몽둥이찜질과 물고문으로 생사를 넘나든 끝에 “완전히 짐승 같은 인간으로 변”(90쪽)하는 과정은, 다른 기록과 문헌들에서 익히 보아 온 모습임에도, 읽기에 고통스럽다. 그리고 그 고통은 안기부 고문실에서 끝나는 것도 아니어서, 강제로 끌려간 군 내무반에서 상관에게 얻어맞던 그는 “마치 고문이라도 당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112쪽)진다. 다시 그리고 이 피고문자는 인내심이 한계에 이르러 자신을 고문했던 상사에게 소총을 겨누고 개머리판으로 그를 가격하면서 “내 몸 안에 고문자들이 들어와 날뛰”(142쪽)는 것을 느낀다.
“왜 내가 국가보안법 위반을 했으며, 왜 내가 이렇게 쫓겨다녀야 하는지 나 스스로도 알 수 없”(209쪽)다는 게 억울함을 수반한 그의 문제의식이다. 광주학살이니 6·10 항쟁이니 하는 사회적 사건들에는 일절 관심을 쏟지 않았던 그가 아닌가 말이다. 그런 그의 맹목을 틔워 준 것은 상현의 여동생 정혜다. 저 악몽과도 같았던 고문실의 경험이 있은 지 8년 뒤 그를 찾아온 정혜는 “세상에 관계없는 얘긴 없”(243쪽)다면서 광훈을 광장으로 끌어내려 한다. 그가 겪어야 했던 그 숱한 고초와 시련이 상현의 고문사를 은폐하려는 저들의 음모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광훈은 고민 끝에 양심선언에 나선다.
그러고 보면 이례적이게도 경어체로 일관하고 있는 이 소설은 그 자체가 광훈의 ‘양심선언’이라 할 만하다. 사회와 무관한 철두철미한 개인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그가 사태가 그렇지 않음을 확인하게 되는 과정을 진술하는 소설 형태의 양심선언 말이다. 그리고 소설 형식의 이 양심선언문은 오는 15일로 예정된 출판기념회에서 국회의원 291명을 ‘대표’한 현애자 민주노동당 의원에게 전달될 참이다.
이에 앞서 민족문학작가회의(이사장 염무웅)는 9일 저녁 6시30분~9시30분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전국 작가대회’를 마련해 국가보안법 폐지를 향한 작가들의 의지를 널리 알린다는 계획이다.
--한겨레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이인휘 장편소설|실천문학사|312쪽|9000원
어떻게 아픔 없이 그 시절을 회고할 수 있을까? 구로공단에서 노동운동가로 활동했던 이인휘는 8년 만의 신작인 이 소설에서 1980년대에서 현재까지 한 사내의 24년의 이야기를 역동적으로 엮어냈다.
소설의 프롤로그는 가리봉 오거리에 세워진 이정표를 부수려다 파출소에 잡혀온 한 남자의 넋두리로 시작한다. 아내의 친구 남편으로 학생운동을 하다 노동운동에 뛰어든 그 사내는 한때 이끌었던 한 조직의 리더 자리를 내놓고 세상살이에 지쳐버린 중년으로 변해버렸다. 예전에는 일공단, 이공단, 삼공단으로 불렸던 그 거리는 어느 날 슬며시 디지털 일번지, 이번지, 삼번지로 바뀌어 이정표에 박혀 있다.
“모든 게 혼란스럽고, 나라는 존재가 있기나 한가 싶습니다. …세상을 바꿔야 한다면 내가 이곳에 삶의 터전을 잡은 지 이십사 년. 그 이십사 년의 세월을 두고 저 거리와 내가 살고 있는 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혼란스럽더군요. 도대체 이십사 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18~19쪽)
이 소설의 화두다. 쓸쓸한 웃음을 남기고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그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주인공 김광훈도 상처투성이의 기억 속으로 빠져든다. 시인을 꿈꾸는 대학생 김광훈은 초현실주의와 낭만주의에 경도되어 강퍅한 사회현실을 애써 외면했다. 그러나 1980년 5월 17일 밤 총학생회 간부였던 친구 이상현과 함께 느닷없이 들이닥친 사내들에게 폭행을 당한 이후 자신과 관계없다고 믿었던 현실에 의해 철저히 짓밟히기 시작한다.
이상현의 의문의 죽음에 연루되어 고문을 당하고, 불순분자로 몰려 강제징집을 당하는가 하면, 국가보안법 고무찬양죄를 뒤집어쓰고 남한산성까지 끌려간다.
형기를 마치고 세상 속으로 나온 김광훈은 사랑했던 여인이 자신을 만나기 위해 가슴앓이를 하다가 비참하게 죽은 것을 확인한다. 절망과 비탄 속에 자신을 방치하던 주인공은 오빠(이상현)의 의문사를 규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이정혜를 만나 새로운 진실을 발견하게 된다. 전교조 교사로 더 나은 세상이 오기를 소망하는 이정혜는 어두운 가리봉 오거리를 비추는 ‘빛’이 된다.
‘멀리서 보면, 혹은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보면 나와 전혀 상관없을 것만 같은 것들이 사실은 나와 이렇게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어, 어떤 일이 일어나면 그것들과 나는 부딪힐 수밖에 없구나’(267쪽) 라는 깨달음에 이른다.
주인공은 에필로그에서 ‘내 딸아이가 내 나이가 되었을 무렵에는 나처럼 이렇게 쓸쓸한 기억을 갖지 말고, 사람들끼리 서로를 사랑하며 아름다움이 넘쳐나는 추억만 간직할 수 있기를 바란다(308쪽)’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작가는 “김광훈은 내가 겪었던 삶과 내가 살면서 만나온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만들어낸 인물”이라며, “한 시대가 만들어낸 인물이며, 여전히 우리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진행형 인물이기도 하다”라고 했다.
이 소설에는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으며 대학을 자퇴하고 노동운동에 투신했던 작가의 경험이 곳곳에 녹아 있다. 지난 84년 구로공단에 자리를 잡은 작가는 진보생활 문예지 ‘삶이 보이는 창’을 만들어 6년 동안 이끌어왔다. 광산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을 그린 ‘활화산’, 수배당한 노동운동가의 삶의 질곡을 그린 ‘문 밖의 사람들’, 남성 페미니즘 소설 ‘그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 등을 발표했다.
작가는 “어두운 시대를 겪어온 많은 사람들의 삶과, 보이지 않게 도움을 준 여러 친구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 소설이 부디 누군가에게 작은 힘이라도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최홍렬기자 (블로그)hrchoi.chosun.com
아무도 꺾을 수 없는 생명을 향한 존재의 빛
[문학]장편소설 '내 생의 적들' 펴낸 이인휘씨
이인휘(46) 장편소설 ‘내 생의 적들’(실천문학)은 지나온 어두운 시대를 밝히는 작품이다. 낭만적인 몽상가에 지나지 않았던 한 청년이 시대의 폭압에 휘둘려 사랑도 희망도 상실한 뒤 어떻게 생의 빛을 찾아 지금 이곳의 세월까지 흘러 왔는지 아프게 뒤돌아본다.
화자인 ‘나’ 김광훈은 찢어지게 가난한 도시 빈민의 아들이다. 끔찍한 가족사의 상처까지 지니고 있었던 나는 어렵사리 대학에 입학해, 머물 곳이 없어 서클룸에서 잠을 자며 학창생활을 시작한다. 나는 운동가나 투사가 될 수도 없었고, 그저 하루하루를 무사히 버티어 대학을 졸업한 뒤 이 사회의 중산층에 편입되기를 희망했다. 김광훈이 대학에 입학한 시점은 1980년. 광주항쟁과 휴교령으로 이어지는 극단적인 폭압의 시작점이었다. 나는 우연히 학생회관에서 친구와 함께 있다가 학내에 마구잡이로 진주한 경찰에게 붙잡혀 갔지만 탈출한다. 이후 비록 다리를 저는 장애의 몸이지만 ‘천사’에 가까운 연희라는 여자를 만나 꿈결처럼 짧지만 강렬한 연애도 시작한다.
그러나 생애 처음으로 맛보는 따뜻함과 감동은 다시 경찰에 잡혀 물고문과 각목구타를 비롯한 모진 고초를 겪은 뒤 강제징집되면서 막을 내린다. 나의 ‘연희’는 군에 가 있는 동안 나를 그리다 비참하게 죽었다. 불명예 제대 후 나는 공장에 들어가 일을 하기도 하고 일용직 잡부로 떠돌기도 하면서 생계 해결을 위한 노동에 복무한다. 그러나 결국 악화된 건강으로 인해 시골로 내려가 농사일을 도와가며 조금씩 기력을 회복해나간다. 이때 찾아든 새로운 여인이 친구의 여동생 정혜였다. 함께 학생회관에 있었던 친구는 1980년 의문사 시체로 발견됐는데, 정혜는 오빠의 억울한 죽음을 규명하기 위해 증인을 찾아 내려온 것이다. 정혜는 한사코 세상 바깥으로 나서기를 거부하는 나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바야흐로 ‘나’는 오랜 방황과 침묵의 시간에서 벗어나 삶의 새로운 투지를 불태우는 쪽으로 빛을 향해 걸어나온다. 나는 소설 속에서 이렇게 되뇐다. “스스로 빛을 차단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내 삶을 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 어떤 힘도 생명을 찾아나가는 존재의 빛을 꺾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스토리만 요약해버리면 또다시 진부하게 옛날 그 시절 그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 아닌지 처음부터 외면할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인휘는 독자들에게 진솔하게 다가서고 싶어서 어둡고 아픈 이야기들을 시종 경어체를 써가며 나직하고 애틋하게 끌고 나간다. 그리하여 그 시절을 지나온 많은 이들로 하여금 책을 잡으면 끝까지 단숨에 읽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이미 90년대에 이런 이야기를 소설로 풀어놓으면 ‘후일담 소설’로 분류해 다분히 시대에 뒤떨어진 작품으로 폄하하는 경향이 문단을 장악했다. 하물며 지금에 와서 80년대 이야기를 하는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이인휘는 “독자들의 취향과 상관없이 그 시절 그 이야기들은 내가 해야 할 몫”이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그는 “한 번은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라며 “차라리 그때 다른 일을 했으면 어땠을까 하면서 후회하는 이들도 있는데, 부끄러워 할 것도 없을뿐더러 아이들에게 그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소설 속에서 나는 어이없게도 군에서 비무장지대의 평화로운 자연경관을 시로 썼다가 국가보안법 찬양고무죄로 고초를 겪는다. 그러나 이인휘는 요즘 정치판의 민감한 사안이기도 한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에 대해 굳이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는다.
다만 이데올로기와 무관하게 그 법으로 인해 한 인간이 어떻게 망가져가는지 진솔하게 보여줌으로써 독자에게 판단을 구할 따름이다. 그는 후기에서 “이 소설에 나오는 김광훈이라는 인물은 결코 가상의 인물이 아닌 한 시대가 만들어낸 인물이며, 여전히 우리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진행형의 인물”이라고 밝혀놓았다.
글 조용호, 사진 김창규 기자
/jhoy@segye.com
2004.10.08 (금)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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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23 오후 5:46: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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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휘의 "내 생의 적들"을 읽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