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 가족이 함께 읽는 이순원 신작 가족ㆍ성장소설 『워낭』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등, 국내 내로라하는 문학상을 수상하며 다양한 연령층의 독자로부터 깊고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이순원의 신작 장편소설이 출간되었다. 담백한 문장으로 빚어내는 이순원 특유의 서정성이 더 은근하고도 묵직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워낭』은 석기시대 이후, 우리 민족과 더불어 생업을 함께하며 살아온 ‘소’의 내력을 통해 인간세계를 반추해보는 이야기이다. 읽다 보면 소의 이야기인지, 인간의 이야기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소와 사람과 그들이 함께 일군 대지와 쟁기의 삶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뿔은 가도 워낭은 남아 우리의 이야기를 전한다” ‘소’와 함께한 우리 민족 백 년史, 갑신정변에서 광화문 촛불까지…
이순원의 작품을 통해 우리가 만나게 되는 감성은 다분히 아날로그적이다. 그리고 그의 아날로그적 감성이 빚어낸 작품들은 그 배경이 서울이건, 강원도건 디지털 시대를 사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되돌아보게 해온 수작들이었다. 무엇보다 주목되어야 하는 것은 일관되게 그가 견지해온 ‘성장’이라는 키워드에 있다. 화자가 아이이건, 어른이건 작가는 느릿느릿 대관령 고개를 넘는 노새처럼 아련하고 슬픈 눈빛과 손짓으로 여타의 ‘성장소설’과는 사뭇 다른 ‘통과의례’의 과정을 그려왔다.
신작 장편소설 『워낭』 역시, 성장소설이다.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아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권할 수 있는 가족 성장 소설이다. 1884년 갑신정변에서 2008년 광화문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의 현장까지 120년 한국근현대사를 주변 배경으로 삼아 소의 눈으로 그려낸 이 작품은 “생업의 우정”으로 동맹해온 인간과 소의 유대를 통해 인간세계를 돌아본다. 12대에 걸친 우추리 차무집 외양간의 소의 내력은 차무집 4대의 내력과 함께 어우러져 깊은 감동을 준다.
강원도 깊은 시골, 노비제도가 폐지되든 말든 바깥세상과는 무관하게 흘러가는 곳인 우추리 차무집 외양간에 어느 날, 어미와 생이별한 그릿소가 들어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릿소는 차무집 외양간의 큰할머니가 될 흰별소를 남기고 떠나니, 그릿소-흰별소-미륵소-버들소-화둥불소-흥걸소-외뿔소-콩죽소-무명소-검은눈소-우라리소-반제기소로 이어지는 차무집 외양간 12대의 내력이 잘랑잘랑 맑은 소리를 내며 바람을 흔드는 워낭처럼 펼쳐진다. 여기에 소를 내 어미처럼, 내 자식처럼 아끼며 살아가는 차무집의 4대에 걸친 내력 또한 아름답게 그려지는데 특히 차무집 어른이 “아주 힘들고 귀하게 낳은 자식”이라 말하는 가슴으로 낳은 자식 ‘세일’의 이야기는 작가의 말을 통해 밝히고 있듯, 십여 년 전에 발표했던 작품 「그가 걸음을 멈추었을 때」의 한 부분을 변형한 것으로 인간세계의 편견과 불통의 장벽으로 상처받은 순수한 영혼이 소와의 교감을 통해 그 상처를 치유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세일’뿐만 아니라 때로 인간보다 더 인간을 속 깊이 이해하는 소들로 인해 차무집 가족들은 크고 작은 상처들을 이겨낸다.
우리 민족의 대소사에 큰 몫을 담당해왔으나 농경사회의 쇠퇴와 더불어 더 이상 “생업의 우정”으로 맺어진 동맹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채 사라져가는 ‘소’와 인간의 백 년사를 그려낸 『워낭』은 단순히 농경사회로의 회귀나 ‘일하는 소’의 부활 같은 전근대를 꿈꾸는 작품이 아니다. 야만과 탐욕으로 얼룩져 상실된 현대 인간성의 회복과 디지털 시대의 각박하고 냉혹한 인간관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문제작으로 봐야 할 것이다.
본문에서
마당에 선 채로 세수시키듯 얼굴을 말끔히 닦아주고 나서 새댁은 송아지를 외양간과 붙은 부엌으로 데리고 갔다. 따뜻한 아궁이 앞에서 미리 물에 불려두었다가 맷돌에 막 갈아 만든 콩즙을 입에 떠 넣어줄 때 송아지는 자기도 모르게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_‘노름에 팔려온 송아지’ 중에서
어쨌거나 흰별이 이마에 별을 이고 온 그해 가을, 송아지의 눈에 세상의 빛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흰별은 자기 몸을 안아 받은 차무집 주인과 처음 눈을 맞추었고, 앞으로 오래 함께할 친구와 같은 그 집 아들과 똑같은 날 서로 다른 삼신의 안내로 같은 집에 왔다._‘흰별소가 오던 날’ 중에서
“잘 보게. 함께 땅을 경작해 알곡을 차지한 사람들은 늘 식량이 빠듯해 먹을 것을 걱정하며 살지. 흉년엔 봄을 나는 일이 쉽지 않아 풀뿌리를 캐 먹기까지 하지. 그렇지만 짚과 건초를 차지한 자네들은 어느 해 겨울에도 먹이가 떨어진 적이 없었지. 아니, 사람들이 자기들은 굶어도 자네들까지 굶게 한 적은 없었지. 오랜 세월 개와 사람이 나누어온 정보다 더 깊은 생업의 우정이 자네 조상과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네.”_‘먼 동굴에서 온 손님’ 중에서
“생구야. 잘 봐둬라. 여기다. 여기에 네 새끼를 묻었다. 이제 이것도 네가 지키고, 앞으로 낳을 것들도 다시 잃지 말고 네가 네 마음으로 지켜라.”_‘가슴에 묻은 첫 새끼’ 중에서
아마 새댁이 부엌에서 일을 하고 송아지가 외양간에서 이쪽을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소의 영혼이 새댁에게 건너오듯 눈을 맞췄던 것인지 몰랐다. 어미가 부르면 안 가도 젊은 안주인이 오라면 저만치 섰다가도 고개를 주억이며 겁 없이 다가왔다. 젊은 안주인이 우물에 나가 물을 길어오면 뒤를 졸졸 따라오다가 어느새 옆에 와서 자기를 봐달라고 머리로 새댁 엉덩이를 툭툭 치기도 했다._‘워낭을 찾아 돌아온 소’ 중에서
“소야. 나는 사람보다 소가 더 좋다. 니는 대답을 하지 않아도 나는 이렇게 걸으며 니들과 얘기하는 게 더 좋다. …… 소야. 니는 나하고 이렇게 걸어 니가 어디로 가는지 아나? 나도 이렇게 걸어 내가 어디로 가는지 잘 모른다. …… 언젠가 힘이 빠지면 그때는 내가 선 자리에 느들하고 같이 걸음을 멈추면 되는 거지. 소야…….” ‘사람보다 소와 더 많이 걸은 사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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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1985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소」가 당선되었다. 1996년 「수색, 어머니 가슴 속으로 흐르는 무늬」로 제27회 동인문학상, 1997년 「은비령」으로 제42회 현대문학상, 2000년 「아비의 잠」으로 제1회 이효석문학상, 「그대 정동진에 가면」으로 제7회 한무숙문학상, 2006년 제1회 허균문학작가상, 제2회 남촌문학상을 수상했다. 창작집으로 『그 여름의 꽃게』, 『얼굴』, 『말을 찾아서』, 『그가 걸음을 멈추었을 때』, 『첫눈』 등이 있고, 장편소설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 『수색, 그 물빛무늬』, 『아들과 함께 걷는 길』, 『19세』, 『나무』 등이 있다. |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ㆍ노름빚에 팔려온 송아지ㆍ흰별소가 오던 날ㆍ나 태어난 이 강산에ㆍ먼 동굴에서 온 손님ㆍ가슴에 묻은 첫 새끼ㆍ금우궁으로 가던 날ㆍ버드나무의 힘ㆍ워낭을 찾아 돌아온 소 ㆍ독립군 화둥불소ㆍ소 등을 타고 넘어가는 시간들ㆍ고양이논 마을에서 온 며느리ㆍ소여물에 밥을 덜어주는 농부ㆍ난리 중에 끌려간 외뿔소ㆍ떠난 소가 지키는 외양간ㆍ보내미날에 태어난 아이ㆍ가 집의 해파리 아들 ㆍ사람보다 소와 더 많이 걸은 사람ㆍ검은눈소와 우리 ㆍ그 아이들과 나ㆍ작가의 말_우리가 소처럼 걷는다는 것은……

소와 사람이 나란히 걸어온 120년 ―― , 연합뉴스(2010.1.25) 소가 본 ‘한국 근현대사 120년’ ―― 이영경, 경향신문(2010.1.25) 120년 혈통 간직한 외양간의 워낭소리 ―― 이고운, 한국경제(2010.1.25) [이사람] 함께 밭갈던 소, 이젠 식탁위 고기로만… ―― 허미경, 한겨례(2010.1.25) 12대에 걸쳐 한 집 외양간 지킨 소 이야기 ‘워낭’ 소설가 이순원 ―― 라동철, 국민일보(2010.1.25) 소설가 이순원 "영화 워낭소리 보다 검은눈소 추억 떠올라" ―― 이훈성, 한국일보(2010.1.25) 신작 『워낭』 펴낸 소설가 이순원 ―― 신준봉, 중앙일보(2010.1.26) “소와 나눴던 우리네 유대감… 친구 사이의 우정처럼 애틋” ―― 박선희, 동아일보(201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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