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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부족의 연대기 (2010)

실천문학 2013. 8. 7. 14:55

 

 

 

 

 

 

     

 

 

 

 

 


터키 근현대문학의 거장, 야샤르 케말의 문제작

아나톨리아 민중의 사랑을 받는 터키 근현대문학의 거장, 야샤르 케말의 장편소설이 출간되었다. 장편소설 『메메드』(主友, 1982), 단편소설선 『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문학과지성사, 2005)에 이어 국내에는 세 번째로 소개되는 그의 작품 『바람부족의 연대기』는 구술적 전통에 기대면서도 근대적 삶의 첨예한 문제들을 돌올하게 형상화하는 야샤르 케말 특유의 작품세계를 가장 밀도 있게 육화한 고전으로 프랑스비평가협회로부터 “위대한 작품”이라 찬사를 받은 바 있다. 인권 작가이자 저항 작가로 알려진 저자가 가담했던 투르크멘 유목민들의 처절한 투쟁은 이 작품 속에서 정착을 거부한 마지막 유목민 카라출루족의 수난기로 농축되어 탈영토·탈국가라는 거대담론을 현대적인 신화로 재현하고 있다.


호라산에서 왔도다. 우리 어깨 위 빛나는 인장들. 늑대 무리처럼 이 세상 서쪽, 동쪽으로 가득 흩어졌도다. 붉은 홍옥 같은 눈동자, 키가 커다란 말을 타고 우리는 신디 강으로, 나일 강으로 달렸도다. 마을을 만들고 성곽을 세우고, 도시를 사고, 나라를 세웠도다. 하란 평원, 메소포타미아 평원, 아라비아 사막, 아나톨리아, 카프카스 산, 넓은 러시아 스텝 지역에 만 아니 십만 개나 되는 검은 텐트를 치고 독수리처럼 내려앉았도다. (……) 수백 년이 지났다. 우리는 조각조각 나뉘었고, 숫자는 줄어들었고, 검은 텐트들은 해졌다. 높은 산, 물, 땅, 평원, 나라 들에 이름을 붙이며, 우리 발자취를 남겼다. 아나톨리아에서는 카이세리 산, 아으르 산, 넴룻 산, 빈보아 산, 질로 산을 보았다. 또 아나톨리아에서 크즐 강, 예실 강, 사카르야, 세이한, 제이한 강을 보았다. 아나톨리아 평원, 소금호수, 붉은 기운이 감도는 노란 포도로 유명한 에게 평원…… 모두 우리가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 많은 강물, 평원, 산들에게. 아나톨리아 모든 곳에 우리 발자취가 남아 있다. 모든 땅에 이름을 찾아주고 우리 부족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잊히지 말라고, 어느 높은 곳인가에서 우리 혈통이 이어지라고…… 우리는 소금기 있는 길을 달렸고, 눈 덮인 산을 넘었다.
_본문에서




천 개의 강과 산을 넘어온 바람의 서사
―노마디즘 사유의 시대, 진정한 노마디즘에 대해 질문하다

야샤르 케말은 국내에서는 1980년대 이후 두 편의 소설과 문예지 특집(『실천문학』 2002년 봄호, 『아시아』 2007년 겨울호) 등을 통해 소개되기도 했지만,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 혹은 그 자신의 명성에 비하면 인지도가 낮다고밖에 할 수 없겠다. 그러나 세계 문학계에서 야샤르 케말은 리얼리즘·판타지·민담을 혼융하여 시학을 창조해내는 전통 서사장르의 계승자로, 새 천년의 호메로스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는 기자의 통찰력과 작가의 창조성을 가진 리얼리즘문학의 최고봉으로, 이미 가장 중요한 우리 시대의 작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이는 다수의 작품이 영화와 연극으로 연출된 사실, 유수의 세계문학상을 수상한 사실에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번에 실천문학사에서 출간한 장편소설 『바람부족의 연대기』(원제는 ‘빈보아 신화’)는 근대와 현대가 교직하는 20세기 터키라는 시공 속에 정착할 수도, 정착하지 않을 수도 없었던 투르크멘 유목민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동서양이 만나는 교차로였으며, 서구화의 급물살 속에 ‘문명화’라는 미명의 전환기를 맞았던 터키라는 상징적·실재적 공간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백전노장 야샤르 케말의 가장 터키적이면서도 가장 세계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유럽의 현대철학이 그려온 ‘유목’의 상상력은 대중문화 속에 달콤하고 자유로운 감성의 한 코드로 포장된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야샤르 케말을 통해 접하게 될 ‘유목’에 관한 이 이야기는 그렇게 분방한 이미지에 그치지 않는다. 이 작품 속에서 ‘유목’ 은 실재했으나 사라져야만 했던 처절한 생존의 한 양태이다. 이 때문에 옮긴이 오은경은 역자의 말에서 “노마디즘 사유의 시대, 진정한 노마디즘”에 대해 사유하게 하는 작품이라 역설하고 있다.

19세기 들어 터키 정부의 근대화 정책으로 유목민들은 정착을 강요당한다. 투르크멘 유목민들은 자신의 역사이자 전통인 동시에 삶의 방식인 ‘유목’을 지키기 위해 제도권력에 투항하고 또 저항한다. 이런 가운데 무력을 동원하는 정부와의 싸움은 갈수록 격화되고 대부분이 정착을 마친 이후에도 최후까지 정착을 거부했던 카라출루족의 유목생활은 1940~1950년대까지 지속된다. 이 소설은 이들 부족의 국가에 대한 갈등이 기둥 줄거리를 이룬다.

오직 겨울을 날 터전을 찾기 위해 추쿠로바 평원을 떠도는 카라출루족에게 이스멧 장군, 헌병대, 얀느즈아아치 파출소 상병들과 지주들은 돈을 요구한다. 치졸한 협박으로 변주되는 그들의 갈취 행태는 권력의 횡포라기보다는 차라리 ‘나와바리’를 주장하는 폭력배의 얼굴을 하고 있다. ‘당신들(카라출루족)을 제외한 모두의 땅’ 추쿠로바에서 카라출루족은 겨울터를 달라고 별들에게 소원을 빌고, 숭고한 장인정신으로 검을 만들어 국가 고위층 인사들에게 바칠 계획을 세우고, 부족 부인들과 소녀들의 금을 모아 땅을 사고자 하지만,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갈 뿐이다. 결국 부족의 미인 제렌을 지주의 아들 옥타이에게 시집보내고 땅을 얻자고 하지만, 부족장 쉴레이만 카흐야는 “함께 죽자, 그러나 우리 자신이 돼서 죽어. 사람처럼 죽어야지. 여자아이를 죽여놓고 그제야 죽거나 하지는 말자”며 만류한다. 정착민과 국가권력의 파시즘적인 폭력 속에, 소유만이 권력이 되는 문명화 세계 속에, 오직 생존만을 원하는 유목민들은 거듭 거부당하고 이용당한다. 땅 한 평은커녕 비석이나 무덤조차 만들지 않는 유목민들의 삶의 방식,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신화 속의 인물들과 교감하는 유목민들의 소통 방식은 새로운 사회 속에서 고유의 가치를 파괴당하고 만다. 저자는 문명화가 그 사회의 고유한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고 암시하는 동시, 탈소유와 순수생성을 삶의 방식으로 지속하고자 하기에 끊임없이 탈주와 탈영토화를 시도하는 유목민들을 저항의 주체로 그린다. 국가의 영토화 작업 속에서 마지막 유목민 부족은 종말을 맞지만 그들의 미래에 대해 작가는 유목적 주체의 재탄생을 예고한다. 저항의 최후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을 통해서는 절대적 탈영토화를, 제도권력에 의해서가 아닌 주체적인 결단에 의해서 부족과 전통을 해체하는 살아남은 자들을 통해서는 탈기관체로서의 생성과 탈주의 삶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29개 에피소드로 이어지는 이 소설은 각 에피소드 첫머리에 통시적인 관점에서 아나톨리아 반도를 묘사해내는 장관을 보여주는데, 이를 통해 그의 서사시적 전통의 필력은 더욱 돋보이게 된다. 자연과 삶을 가능한 한 세세히 기록하고자 한다는 야샤르 케말은 생동감 넘치는 애정 어린 자연 묘사와 전율을 느끼게 하는 다층적 다초점적 인물묘사를 통해 사회고발적 요소를 포함한 드라마를 아름다운 대서사시로 주조해낸다.

“내게 쿠르드족 문제는 기본적 인권의 문제다”라고 말하는 야샤르 케말의 목소리 속에는 이 작품이 전하는 본질적인 메시지가 녹아 있다. 야샤르 케말은 근본적인 변화를 겪는 사회와 제도권력 속에서 고통받는 세계민중이 기필코 만나야 할 “전환기의 작가”인 것이다. 한 소수민족의 종말을 그린 이 소설이 침몰하는 한 세계에 대한 우화로 읽힐 수 있지 않을까.



야샤르 케말_1923년 터키 남부 아다나 시의 작은 마을 헤르미테에서 출생하였다. 본명은 케말 사득 괴의젤리. 어릴 적 아버지가 전 재산을 탕진하면서 공장, 목화농장, 농촌에서 생업으로 전전하며 학업을 병행했다. 1939년 시 「세이한」을 아다나 민속지에 발표하며 등단, 1945년 단편소설 「추잡한 이야기」를 통해 소설가로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공산당을 조직하는 데 가담했다는 혐의로 구속된 후 풀려나 1951년부터 급진적인 성향의 『줌후리예트』에서 기자로 일했다. 이때부터 야샤르 케말이라는 필명을 사용. 아나톨리아 르포르타주를 연재하는 동안 그가 수집한 터키 민속 자료는 사라진 공동체적 시공을 염원하면서도 그 전통적 가치관으로 고통받는 소수민족과 여성의 이야기를 핍진한 리얼리티로 재신화하는 작품세계의 기반이 되었다. 대표작으로 『말라깽이 메메드』Ⅰ·Ⅱ·Ⅲ·Ⅳ, 『땅은 쇠 하늘은 구리』, 『불멸초』, 『아으르 산의 신화』, 『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 『비에 젖은 새』, 『썩은 나무』, 『성문』 등이 있다. 풍요로운 구술적 전통에 기대면서도 근대적 삶의 첨예한 문제들을 돌올하게 형상화한 『바람부족의 연대기』는 그의 작품세계를 가장 밀도 있게 육화한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마다라르 소설상, 오르한 케말 소설상, 독일 도서협회상, 프랑스 비평가협회상, 국제 델 두카 상 등을 수상했다. 아흔이 가까운 나이, 파킨슨병으로 투병 중에 있으면서도 그는 여전히 활발하게 글을 쓰고 있다.

 

(옮긴이)오은경_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고, 터키 정부 장학생으로 초청되어 터키 하제테페 대학교에서 비교문학과 터키문학으로 석·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초빙연구원. 터키 앙카라 한국어문학과 외국인 전임교수, 성균관대와 외국어대 강사를 거쳐 현재 동덕여대 교양교직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베일 속의 이슬람과 여성』, 『터키의 한국전쟁론』(터키어), 『여성주의 비평: 20세기 소설 속에 나타난 한국과 터키 여성』 등이 있고, 공저로 『한국전쟁과 세계문학』, 『성과 사랑의 시대』, 『다락방에서 타자를 만나다』, 『중앙아시아학 입문』, 번역소설로 『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 등이 있다.

 

바람부족의 연대기_7
역자의 말_453
작가 연보_4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