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의 문학/시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1998)
실천문학
2013. 8. 11. 22:56
벼락맞을 상상이지만 나는 앳되고 풋내나는 단발머리 그녀를 앞에 놓고, 세상의 모든 남정네들에게 버림받고, 그렇게
버림받아 자유로운 몸이 되어, 드디어 세상의 모든 남정네들을 제 살붙이로 여기는 진주 남강이나 혹은 낙동강 하류의 어느 가난한 선술집 주모를
떠올렸다.
허수경 시가 갖는 괴물 같은 힘은 어디에서 솟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 사랑에서, 그렇게 크고 넉넉한 사랑을 얻기 위한
고통과 몸부림에서 연유한 것이리라. 또한 그만큼 크고 깊은 은총이 없으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허수경은 저주와 은총을 함께 받은
시인이다.__송기원(소설가)
지리산 감나무 맨 윗가지
무신 날이 저리 붉은가
얼어붙은 하늘에 꽉 백혀 진저리치고
있는가
된똥 누다 누다
눈꼬리에 마른 눈물 달은 자식들처럼
감씨 퉤퉤 뱉다 기러기떼
선연한 노을 끝으로 숨어버린
남정들처럼
잘못도 용서도 구할 수 없는
한반도 근대사 속을
사람 지나간 자취마다 하얗게 쏟아지는
감꽃
폭풍
__「지리산 감나무」(부분)
허수경
1964년 경주 출생. 경상대 국문과 졸업.
1987년 『실천문학』에 「땡볕」 등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 『혼자 가는 먼 집』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