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의 문학/시

겨울 가야산 (2006)

실천문학 2013. 8. 12. 00:00

 

 

 

 

 

 

 

                

 

 

 

 

 

 

 

 

 

“평생 막걸리를 좋아했고/촌놈을 자랑으로 살아온 사람,/아이들을 스승처럼 섬겼으며/흙을 시의 벗으로 삼았네.” 이것은 이 시집에 실린 시의 한 구절일뿐더러 배창환 시인 자신의 인간적ㆍ문학적 본질을 스스로 꿰뚫은 표현이기도 하다. 그의 삶과 그의 시선은 고향 땅 가야산 기슭의 원초적 자연에 뿌리깊이 연결되어 있고, 그의 상상력은 허물어져가는 농촌공동체와 거기서 자라는 어린이의 생명에 굳건하게 근거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의 시적 언어는 외관상 소박하고 평면적으로 보이지만,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도리어 그의 시가 지닌 자기성찰적 내면성과 통렬한 현실 비판은 드물게 진정한 깊이에 도달한다. 단언하거니와 시집 『겨울 가야산』은 이 시대에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가장 순결한 영혼의 가장 진실한 목소리이다. _염무웅(문학평론가)



따스하고 환한 생의 무늬

이번 시집의 경개(景槪)를 그려보자면 제1부는 ‘가야산’으로 상징되는 삶의 정신적 태도에 대해 노래한 시편들로 채워져 있다. 제2부는 이른바 사회적 상상력에 바탕을 둔 시편들이 배열되어 있고, 제3부에는 흙과 고향 그리고 사람들의 따듯한 체온이 밴 이야기들이 담겨 있으며, 마지막 제4부에는 시간과 풍경이 그윽하게 가라앉은 시편들이 배치되어 있다.
이번 시집에 구현된 그의 시적 지향은 삶의 구체성과 공동체적 경험을 결합시키는 서정시 본연의 작법에 의해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태도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 「얼굴」이다.

아래채 고쳐 지으려고 흙집 헐어내니/천장 흙벽에 숨어 얼굴 한번 안 보여주던/기둥이며 대들보 서까래 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그 옛날 심산(深山) 식구들과 고즈넉이 살다 대목의 눈에 들어/이리로 시집왔을 적송 등걸들이/인근 구릉이나 논밭에서 져 날랐을 황토와 볏짚에 엉긴 채/무거운 짐 내려놓은 듯 너무 편안히 누워 있다/이 거무레한 몸으로 엄동설한 다 받아내어/이 집 식솔들 한세상 견뎌 살게 한 것인가//그 얼굴이 보고 싶어 그라인더를 댄다/지그시 힘을 줄 때마다 깎여나가는 시간 너머로/한때 푸른 대지와 심호흡 주고받았을 작은 옹이들이/별꽃처럼 파르르 돋아오고/햇살과 그늘 놀다 간 자리, 둥근 나이테로 살아오는데/나무의 얼굴에 가만히 내 얼굴을 댄다 오늘 나는/어떤 무늬로 살았을까, 먼 후일 나는 누구에게/어떤 무늬로 발견될까, 생각하면서/그 얼굴에 내 얼굴 갖다 대면/내 생의 무늬도 한결 따스하고 환해질 것 같아서 (「얼굴」 전문)

배창환의 시편들은 이처럼 따스하고 환한 생의 무늬 속에서 발원하고 있는 세계이다. 이러한 따스하고 환한 생의 무늬는 그의 시편 곳곳에서 장엄하고 강렬한 역동성으로 이어지고 있기도 하다.




빛과 그늘, 무한히 깊다

우리 시는 위엄과 자존을 회복하고 사회적 폭력성에 대항하면서 시적 진정성의 함의를 꾸준히 넓혀왔다. 특히 서정적 주체의 경험적 집중을 통해 시인들은 시 한 편 한 편에 현실과 주체의 상호 작용 및 거기서 빚어지는 비극적 세계인식을 담아왔다. 그러면서도 포기될 수 없는 긍정적 인간 이해의 가능성을 시적 형상으로 구체화해온 것이다. 배창환 시학의 기저에는 이 같은 시적 명제가 튼튼하게 깔려 있다. 말하자면 사회적 규정성을 체현하면서 동시에 건강하고도 따듯한 꿈에서 발원하는 시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가을 깊은 산골 마을에 드니/마을 중심에 2백 년은 실히 묵은 은행나무가/온 마을에 노오란 빛 흩뿌리며 곧추서 있다/그 아래 여대기로 아이를 업은 젊은 아낙이/쌕쌕 자는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다//바람이 지나다 심술을 부려 등 뒤로 은행잎을 수북수북 뿌려대는데/선 고운 어깨에도 머리 위에도 흐르르 쌓인다/나무도 아낙도 아무 걱정이 없는 듯/제각각 제 일만 보고 섰는데//…(중략)…//아이는 꿈속에서 엄마가 읽어준 이야기 듣고/한잠을 더 자고 일어나 뛰놀다가/10년, 20년 지난 어느 날, 문득/세상 어딘가에서 엄마의 음성 듣고 벌떡 일어나/벼락같이 이 나무 아래로 달려오리라/노오란 은행잎, 아프도록 실컷 맞아보려고 (「산골 은행나무」 부분)

이 아름다운 시편은, 시인이 상상한 시간의 깊이와 생의 진정성의 편폭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비록 “슬픔 많은 이 땅의 시인”(「나무 아래 와서」)이지만, “흔들리면서/흔들리지 않고/어둠 속에서도 그 빛 잃지 않는/잠깐이면서 끝없이 목숨 이어갈”(「꽃」) 자신의 생애를 굳게 믿고 있는 시인이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빛과 그늘”(「빛과 그늘」)의 무한한 깊이를 지속적으로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시집은 이러한 배창환 시학의 모습, 곧 따스하고 정결한 삶에 대한 기억을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제 우리가 그 세계에 동참할 차례이다.

배창환 시인은 1955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났다. 경북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였고, 1981년 『세계의 문학』에 「1980년 어느 날」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분단시대」 동인으로 활동했다. 시집으로 『잠든 그대』, 『다시 사랑하는 제자에게』, 『백두산 놀러 가자』, 『흔들림에 대한 작은 생각』 등이 있고, 『국어시간에 시 읽기』를 펴냈으며, 시 교육의 방법과 실천 사례를 담은 『이 좋은 시 공부』를 썼다. 현재 경북 김천여고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삶의 밑그림에 채색하렵니다" ―― 조두진 기자, 매일신문(2008. 3.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