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의 문학/시

선명한 유령 (2006)

실천문학 2013. 8. 12. 00:01

 

 

 

 

 

 

 

 

 

                

 

 

 

 

 

 

 

 

 

 

 

조영석이 인화해낸 사진 한쪽에는 희미하게 지워지다 만 유령들이 보인다. 그의 암실에서 태어난 이 기묘한 유령들은 삶의 중심부로부터 추방당한 풍경들과 늘 함께 한다. 종이를 먹고 사는 초식동물에서부터 아스팔트 위로 올라온 인어에 이르기까지 알레고리화된 그의 여러 시편들은 현실과 환상 사이에 겹쳐져 있을 때가 많다. 일그러진 현실을 낯선 각도에서 비추는 이 배율 높은 렌즈는 시가 소외의 기록임을 똑똑히 보여준다. "허깨비처럼 살지 않기 위해/허깨비처럼 살아야"만 하는 이 "출구 없는 땅" 위의 노래에 가만히 귀 기울여 보라. 동시대의 유행하는 문법에서 벗어나서 삶의 중심부로 귀환하는 희귀한 예를 우리는 다시 갖게 되었다.
_손택수(시인)




이상한 정글, 그리고 초식(草食)의 꿈

무엇보다 먼저 시인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우리네 삶의 현장은 냉혹한 약육강식의 법칙이 통용되는 정글이라는 점이다. “순식간에 쭉 뻗은 팔과 다리가 서로 교차하고/땀이 섞인 피가” 튀고 “복부에 무릎이 박히고 눈두덩에 발자국이 찍”(「이 시대의 싸움」)히는 살벌한 격투기장이 시인이 간파해낸 ‘지금 여기’의 현실인 것이다. 남을 밀쳐내야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비정한 사각의 링, 이른바 ‘발꿈치 사회’에서 인간은 더는 만물의 영장이 아니다. 그저 ‘형이상학적 야수’에 불과하다.

그의 근육들은 발기하는 성기처럼 급격히 굵어졌다./송곳니만 남고 모든 이빨들이 뽑혀나갔다./배꼽에서부터 솟아난 바늘 같은 털들이 온몸을 덮었다./등뼈가 휘어 땅바닥에 손바닥 자국을 남기며 걸었다.
(「어느 육식주의자의 죽음」 부분)

실한 먹이를 지척에 두고도 사냥을 단념한다./늑대는 출구가 없는 땅을 타박거리며 걷는다/가끔 다리를 들고 오줌을 눈다./뒷발질로 오줌이 묻는 흙을 퍼뜨리는 늑대,/나는 동네에서 같은 놈을 여러 번 본 적이 있다.
(「늑대」 부분)

인간다워야 할 사람은 야수로 진화해가고 맹수다워야 할 동물은 (인간의 폭력에 의해) 점점 야성을 잃어가는 세상, 즉 사람과 동물 사이에 뭔가 잘못된 유전변이와 환경변이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인식 하에 시인은 급기야 인간의 영악한 욕망과 문명의 차가운 생리에 의해 거세된 건강한 야성의 부활과 원시적인 생명력의 회복을 촉구한다. 예컨대, 어부의 그물에 잡힌 대왕문어를 호되게 꾸짖는 장면을 그려낸 「대왕문어」와 같은 시가 그렇다. 물론 화자의 불똥과도 같은 호령 뒤엔 자연과 상생하지 못하는 광포한 문명사회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 다소곳이 숨어 있다. 그렇다면 육식성 사회에서 인간답게 살기 위해 시인이 모색하는 대안적 삶의 형태는 무엇일까?
‘초식’이다. 건강을 위해 선택한 차선으로서의 ‘초식’이 아니라, 갈수록 야수화되는 사회에서 최소한의 양심과 윤리를 지키며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최선책으로서의 ‘초식’이다. 조영석에게 초식은 뭇 생명에 대한 존중과 타자에 대한 연민, 한 마디로 인간다운 삶의 모델을 상징한다. 이러한 초식의 상징성이 가장 적실하게 입체화된 시가 등단작이기도 한 「초식」이다.

바람이 불고 부스럭거리며 책장이 넘어간다./몇 시간째 같은 페이지만을 노려보던 눈동자가/터진다. 검은 눈물이 속눈썹을 적신다./그는 빠르게 진행되는 바람의 독서를 막는다./손가락 끝으로 겨우 책장 하나는 잡아 누르며/보이지 않는 종이의 피부를 더듬는다./그곳은 활자들의 숲, 썩은 나무의 뼈가 만져진다./짐승들의 배설물이 냄새를 피워 올린다./책장을 찢어 그는 입 안에 구겨넣고 종이의 맛을 본다./송곳니에 찍힌 씨앗들이 툭툭 터져나간다./흐물흐물한 종이를 목젖 너머로 남기고 나서/그는 이빨 틈 속에 갇힌 활자들의 가시를 솎아낸다./검은 눈물이 입가로 흘러든다. 재빨리/그는 다음 페이지를 찢어 눈물을 빨아들인 다음/다시 입 속에 넣고 느릿느릿 씹는다./입술을 오므려 송곳니를 뱉어낸다./그의 이빨은 초식동물처럼 평평해진다./다음 페이지를 찢어 사내는 송곳니를 싸서 먹는다./검은 눈물이 조금씩 마르기 시작한다./텅 빈 눈동자 속에 활자들이 조금씩 채워진다.
(「초식」 전문)




명료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한 알레고리적 응용의 세계

조영석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속적 현실과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는 일상잡사의 이면에 감춰진 전혀 평범하지 않은 비밀을 포착하는 날카로운 형안의 소유자이다. 그는 우리 삶의 주변에 놓여 있는 지극히 평범한 대상을 끈질기게 관찰한 후, 그 사물이 갖는 속성을 때론 압지처럼 모조리 빨아들이고, 때론 족집게로 그것의 핵자(核子)만을 정확하게 집어내서 이를 통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우의적으로 표현한다. 사물의 속성을 온전히 이해하고 모방하고 재현한 뒤, 그것을 창조적으로 재활용해 자신이 품고 있던 문제의식과 착상을 언어로 형상화하는 것이다.

그가 움직이면 그 칸은 그의 전용 객차가 되었다./그의 냄새 앞에서 사람들을 권리를 주장하지 못했다./(중략)/그가 걷는 길이 곧 그의 길이며, 그가 먹는 것은 모두 음식이다./일단 그가 되고 나면, 그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그는 냄새로만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선명한 유령」 부분)

조영석의 시 가운데 완성도가 높은 시는 대개 ‘범속한 트임’을 성공적으로 보여줄 때 빚어진다. 표제작이기도 한 「선명한 유령」에서 보여지듯,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남루하고 초라한 삶을 살아가지만 오히려 사람들은 그의 거침없는 행보와 그의 몸이 내뿜는 ‘냄새의 포자’ 앞에서 자신의 권리조차 제대로 주장하지 못할 만큼 위축되고 만다.

조영석 시인은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해 오늘도 도시와 사람들과 사물과 동물들을 뚫어지게 관찰한다. 그는 보면서 시 쓰는 법을 익히고 시를 쓰면서 보는 법을 배워왔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결실로 첫 시집 『선명한 유령』을 상재해냈다. 이제 우리는 이 젊은 시인이 앞으로 보여줄 이상한 정글 속, 명료하고도 명징한 현실의 시 세계를 주목하고 있기만 하면 된다.

조영석 시인은 197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연세대 국문과와 서울예대 문창과를 졸업하였고 2004년 「초식」 외 6편의 시로 『문학동네』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알레고리로 빚어낸 추악한 생의 진실 ―― 최재봉 기자, 한겨레(2006. 12.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