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꽃 그림자 (2010)
시간을 재구성하는 살구나무의 영혼
되돌릴 수 없는 시간, 불가역의 시간 앞에 선 인간의 무력감과 비극성은 시의 오랜 테마일 것이다. 『살구꽃 그림자』를 지배하는 광막한 그리움의 정서는 시간은 정말로 한 방향으로만 흐르고 있는가라는 강한 의구심을 자극한다. 시인은 말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시간과 기억들에 나는 들려 있다. 이를테면 고향집 사랑방 흙벽을 감싸고 있는 그을음. 아롱지는 그리움을 채워가는 거미줄. 지금은 안 계시는 어머니 아버지의 바지런한 움직임들. 실체이면서도 실체가 아닌 것처럼 그늘 속에 스며 있는 것들.”(「시인의 말」)
시인은 그것들을 “역사의 틈새를 메우는 실금들”이라 애틋하게 부르며 순행적 시간 흐름을 흐트러뜨리기에 나선다. “몸은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면서 낡아가고/정신은 뒤로 뒤로 흐르면서 생생해”지는 인간의 역사가 정말 직선적 미래를 지향해야만 하는가? 어떻게 “시간의 주름”(「시간의 주름」) 안에 봉인된 우리의 정신을 풀려나게 할 것인가? 그런 물음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윽고, “시간의 그늘”(「시간의 그늘」)로 “쪼글쪼글했던 미래가 새로운 숨결로 아주 탱탱해”(「퐁당퐁당, 탱탱한 미래」)지도록 가역적 시간의 숨결을 펌프질한다.
그렇기에 때로는 베어진 지 오래인 살구나무가, 때로는 늙은 비둘기가, 때로는 창덕궁이 시인의 페르소나로 등장한다. 죽고, 늙고, 낡은, 즉, “미래에는 오지 않는 미끈한 즐거움”으로 “과거에 붙잡힌”(「창덕궁은 생각한다」) 주체를 내세워, 시인은 “연민은, 거둬라”(「전서구」)고 외친다. 시인은 이들을 시간 앞에 무력한 시간 문명의 증인이 아닌, “시간을 넘어 궁핍을 해체하는 여행자”(「궁핍을 해체하다」)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박수연 문학평론가는 시집 해설에서 “시인의 시선에 포착된 대상들은 시간 속으로 들어가서 시간을 새롭게 하고 새로워진 시간과 함께 재탄생된다”며 “그는 미래를 재구성하기 위해 과거로 돌아간다”고 쓰고 있다.
나는 마흔아홉 해 전 우리 집
우물곁에서 베어진 살구나무이다.
내가 막 세상에 나왔을 때 내 몸에서는
살구향이 짙게 뿜어져 나왔다고 한다.
오랫동안 등허리엔 살구꽃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목울대엔 살구씨가 매달려 있었다.
차츰차츰 살구꽃 그림자는 엷어졌으나
서러운 날 꿈자리에서는 늘 우물곁으로 돌아가
심지 굳은 살구나무로 서 있곤 한다.
그럴 때마다 전설과도 같은 기쁨과 슬픔들이
노란 전구처럼 오글조글 새겨진다.
가끔 눈 밝은 이들이 조용히 다가와 내 어깨에
제 목 언저릴 가만히 얹어놓는다.
그러면 살구나무가 기록한 경전이 내 눈에서
새록새록 돋아나와 새콤하게 퍼지는 우주의 기밀,
슬그머니 펼쳐 보이기도 한다.
언젠가 별 총총한 그믐날 밤 나는,
가만히 눈 기울여 천지를 살피다가
다시 몸 부려 살구나무로 돌아갈 것이다.
나는 태어나기 이전의 역사이다.
-「살구꽃 그림자」 전문
전작 시집에서 ‘생강나무’로 이야기를 시작했던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살구나무’의 목소리로 시집의 문을 연다. 첫 행에서 발화자의 목소리는 49년 전 베어진 살구나무의 목소리가 포개져 낯선 시간대의 울림이 된다. 시인의 출생은 살구나무의 베어짐에서 이어져온 것으로, 이 시에는 삶과 죽음이, 전생과 후생이 꼬리를 문 뱀처럼 둥글게 만나고 있다. 은밀하고 나지막하게 선언되는 결구에서 ‘나’의 ‘역사’는 흔히 강으로 비유되는 역사의 일방향적 흐름을 거스른다. “우주의 기밀”을 간직하고 있는 살구향은 시간에 운명지어지지 않는 “생의 촉”(「산목련」)을, ‘작은 역사’의 생생함을 일으켜 세운다.
이야기가 있는 실천시선 디자인
디자이너 안상수 선생과 시인의 여섯 번째 여행지는 시인의 고향 임실이었다. 수십 년 전에 떠나온 생가에 들어, 디자인을 위한 상상력의 재료들을 채집했다. 무너져가는 흙벽에 묻어 있던 그을음을 수저로 담아내고, 생가 뒤 대숲을 사진에 담았다. 그을음과 대숲은 시집의 면지와 표지 속에 무늬와 빛깔로 수록되었다. “내일을 향해 낡아간다”(「창덕궁은 생각한다」)는 폐허는 그렇게 새 시집 속에 스며들어, 디자인과 시와 시인을 하나의 육체로 이었다.
정우영_1960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났다. 숭실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89년 『민중시』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마른 것들은 제 속으로 젖는다』와 『집이 떠나갔다』가 있으며 시평 에세이 『이 갸륵한 시들의 속삭임』을 펴냈다.
제1부 살구꽃 그림자/늙은 자전거에게 경배를/초경/시간의 주름/어둠이 머무는 의자/전서구(傳書鳩)/달빛칼/황로/상추밭/시간의 그늘/눈눈눈/토끼의 뒷목은 언제나 뻐끈하다/묵상하는 모과/우주로 날아간 절망들은 어떻게 되었을까/노랑부리할미새
제2부 서출지/보은정미소에서 아홉 살을 훔치다/목구멍에 대나무 잘 키우는 법/창덕궁은 생각한다/김개동 씨/구천 밀림/지철화/돌젖/퐁당퐁당, 탱탱한 미래/보드라운 혀 같은/낙산/새끼발가락에 아이가 내려앉다/마른 삭정이가 걸어오는 것처럼/압구정동이라는 사막/새 세상
제3부 나는 누구의 돌멩이에 끼워진 속눈썹이었나/가만히 불러보는/미륵사지/십일월/산목련/혜화동/건듯건듯/그믐/바람의 호출/성묘 가는 길/고향의 그림자/정배분교/설미재/불침/중독 제4부 기우뚱/원서헌에서 신화를 낚다/장마/엄지의 우울/풍란/갈담장/연분/밥집, 담아에서/한 사람 건너/월광을 삼킨 강아지/날아간 나는 켜켜이 쌓인다/아바타를 놓쳐버린 실체 한 마리/설이가 보내준 귤에는/궁핍을 해체하다/하관
해설 박수연
시인의 말
절망적 현실을 견디는 아득한 추억 ―― 이영경 기자, 경향신문(2010. 3. 30.)
마음 순했던 과거로 돌아가 절망적 현실 치유의 길 찾다 ―― 이훈성 기자, 한국일보(2010. 3. 28.)
고향집… 살구나무… 어머니… 아버지… 눈물나게 보고 싶구나 ―― 김수진 기자, 동아일보(2010. 3.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