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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2010)

실천문학 2013. 8. 12. 10:42

 

 

 

 

 

 

 

 

 

                   

 

 

 

 

 

 

 

 

송기원의 신작 시집이 간행되었다. 1974년 중앙일보(소설)와, 동아일보(시) 신춘문예에 함께 당선되어 화려하게 문단에 나온 이후, 예리한 현실인식과 탐미적 감수성을 보여주는 작품세계를 펼쳐온 송기원은 그간 다수의 소설집과 장편소설 외에 3권의 시집을 상재했다. 구도적 삶에서 우러난 달관의 세계관을 대담한 언어와 서정으로 펼쳐 보였던 전작 『단 한번 보지 못한 내 꽃들』에서 이번 시집은 어느 정도 예고되었던 듯도 하다. 전편에 걸쳐 짙게 드리운 ‘죽음’의 상상력, 그러나 실은 ‘죽음’마저 초월한 상상력을 시인은 “죽음을 힘들어하는 너에게” 헌사하고 있다.


죽음의 상상력으로 숨 쉬는 生

신작 시집 『저녁』은,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 시대의 고통을 아프게 형상화했던 첫 시집 『그대 언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 옥중체험과 함께 시대의 어두운 그늘과 소외된 자들을 담아낸 『마음속 붉은 꽃잎』, 그리고 지난 2006년 16년 만에 펴내 화제가 되었던 세 번째 시집 『단 한번 보지 못한 내 꽃들』을 잇는 네 번째 시집이다.

6부로 나뉘어 실린 65편의 시 중, 제6부에 실린 7편의 시편을 제외한 나머지는 토지문화관에 머물렀던 지난 4월과 5월에 모두 쓰였다. 시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고밖에는 볼 수 없는 경이의 시간을 시인은 “선물”을 받은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시인에게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큰 ‘선물’이 될 이번 시집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의 시집’이다. 「육탈」, 「영정」, 「임종」, 「묘비명」, 「주검」, 「2100년, 호모사피엔스의 유언」, 「사잣밥」, 「자연사」, 「다비」 등, 죽음을 직접적으로 연상시키는 제목뿐만 아니라 “이승/저승”, “살아 있음/죽어 있음”, “마지막”, “시체”, “해골”, “영안실”과 같이 ‘죽음’의 이미지로 이어지는 시어들이 전편에 걸쳐 쓰이고 있다.

그러나 시인이 노래하는 ‘죽음’은 생과 사를 초월한, 그러니까 ‘죽음’마저도 초월한 경지의 그것이다. 삼라만상, 세상의 모든 빛과 그늘에서 기어이 ‘죽음’을 먼저 찾아 눈앞으로 끌어오는 시적 화자에게 생과 사는 어차피 하나(「교감」)이다. 살아 있되, ‘오래전에 이미 살아 있지 않은’ 존재이기도 한 화자는 급기야 (세상이) ‘죽음’(이라 이르는 물리적 현상)을 번거로운 일(「숨」)이라고 말하기에 이른다.

해발 4천 킬로가 넘는 히말라야 산길에서/맨발을 만났다./어림잡아 일흔이 넘는 노구와/또 어림잡아 십 킬로는 넘는 곡식푸대 걸망을/할머니의 맨발이 버팅기면서/경사 가파른 바윗길을 잘도 걷고 있었다./내 운동화가 맨발을 뒤따르는데,/갑자기 맨발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변산반도 곰소 앞바다 숭어 떼가 나타났다./때마침 멸치잡이 배를 뒤따라온 숭어 떼가/철퍼덕, 철퍼덕, 힘차게 꼬리 치는 소리까지 들렸다./맨발은 이미 세상 밖으로 떠나갔으리라./맨발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곰소 앞바다에 가서/숭어 떼에 섞여 힘차게 유영하고 있으리라./어느 순간 나도 세상 밖으로 떠나가고, 맨발과 함께/숭어 떼가 되어 해발 4천 킬로의 바윗길을/철퍼덕, 철퍼덕, 힘차게 꼬리 쳤다. (「맨발」 전문)

그에게 ‘죽음’은 생과 사를 가르는 경계가 아니다. 뒷표지글을 쓴 안상수 선생의 조어(造語) “불구(不拘)한 몸”, 즉 거리낄 것 없는 자유로운 몸의 길이다. “히말라야 산길”과 “변산반도 곰소 앞바다”를 자유로이 오가는 몸,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거칠 것 없는 영혼의 세계로 가는 길의 다른 말이다.
시집을 여는 시인의 첫 글은 “죽음을 힘들어하는 너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라는 다소 감성적인 한 문장이다. 시집 『저녁』의 모티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죽음’의 이미지가 생의 끝, 마지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저 “힘들어하는”은 ‘두려워하는’으로 바꾸어 읽어도 무방할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시인이 ‘죽음’을 마냥 기꺼운 것으로만 보는 건 아니다. 시편들 중 가장 긴 시이자 유일한 산문시이기도 한 「장다리」는 생에 밀착된 ‘죽음’의 애잔함을 지극한 서정성으로 보여주는 절창이다.

이덕규의 『밥그릇 경전』으로 시작된 바뀐 디자인의 실천시선이 『저녁』으로 여섯 권째가 되었다. 시집 표지를 디자인하기에 앞서 디자이너와 시인이 함께 디자인 여행을 하는 일은 매번 시집마다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 이번 송기원 시집의 디자인 여행은 최다 동행, 최장기간에 후일담이 가장 풍성했다는 후문이다.
『저녁』의 표지에는 한때 장돌뱅이 모자로 떠돌이생활을 함께했던 시인이 어머니의 뼛가루를 뿌린 흙이 담겼다. 그 흙은 어머니이자 죽음이며 이번 시집이 마지막 시집이 될 것이라 말한 시인 자신이기도 할 것이다.

 

1947년 전남 보성에서 출생했다. 197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 『그대 언 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 『마음속 붉은 꽃잎』, 『단 한번 보지 못한 내 꽃들』 등 다수의 저서를 펴냈다.

 

제1부 새/유용(有用)/교감(交感)/눈/무게/육탈(肉脫)/영정(影幀)/후광(後光)/임종(臨終)/설탕/이슬/고슴도치/

제2부 묘비명/푸른 불빛/붓/곰팡이/때/땅/구멍/두엄/그 옆에/물방울/저녁/주검/기러기/맨발

제3부 2100년, 호모사피엔스의 유언/병(病)/6월/상처/거울/숨/사잣밥/공간/빈방

제4부 물수제비/징검다리/몸/밥/진화/시심마/자연사(自然死)/휴일/장다리

제5부 굿바이/길 /백팔 배/다비(茶毘)/바람이 나에게 전하는 말/평생/욕창(褥瘡)/애액(愛液)/첫날밤/호사(豪奢)/욕지기/묵언(默言)/개구리/살

제6부 거짓말/무서리/살인빤스/단 하루라도/옛날/파리/밤바람 소리/

발문_ 유용주
시인의 말

 

 소설 쓰려는데 느닷없이 솟구친 죽음의 시 ―― 최재봉 기자, 한겨레(2010. 8. 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