귓속에서 운다 (2011)
첫 시집 『물오리사냥』을 상자한 이후 활발한 시작활동을 펼쳐온 이창수 시인이 6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을 펴냈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유년시절과 중년, 자연과 도시, 관념세계와 현실세계의 경계에서 노숙(露宿)한다. 어느 곳으로도 온전하게 편입될 수 없는 이 소외의 공간에서 시인은 고통 받고 아파하면서도 성급한 화해나 타협을 꾀하지 않는다. 대신 시인은 스스로 자신마저 소외시키는 작업에 골몰한다. 우리가 잊어가거나 잃어가는 것들과 연대해 같은 운명을 살아나가려는 시인의 의지가 이 한 권의 시집에 오롯이 담아져 있다.
저문 후에 우리가 만나는 것들
이기는 것들은 생명 약동한다. 뻗고 솟고 번지고 무성하고 창대하다. 반면에 지는 것들은 꺾이고 줄고 가라앉고 무너지고 작아지고 사라진다. 이창수의 시는 끝없는 패배와 좌절로 인해 보잘것없어지는 이 삶의 보잘것없음에 대한 탐구다. 그는 욕망과 현실에 대한 사실적 관찰로 토대를 쌓고 그 위에서 “왜 삶은 이토록 보잘것없는가” 하고 묻는다. 이러한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물음들의 연쇄는 시인 자의식의 껍질을 뚫고 나온다. 그리고 이 물음들은 곧 겹겹으로 이루어진 구체적 생활의 실상을 꿰뚫는다.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장석주는 “어떤 도덕이나 이념의 주장보다는 사실의 관찰이 돋보이는 현실주의의 세계에 속한다. 그의 시들은 물물들의 현존을 쓰다듬는다”고 지적하며 이창수 시의 힘은 화석화된 도덕의 거친 주장이 아니라 사실들의 세계를 조목조목 관조하는 데서 나오는 것임을 환기시킨다. 이창수의 시는 범박한 사실주의적 관찰에서 시작하지만 어느새 홀연한 망아(忘我)의 세계로 넘어간다. 그 세계는 현실의 고단함이나 비루함을 넘어서는 꿈의 영역이자 초연함으로 그윽해지는 세계다. 시인의 화법에 따르자면, “흙탕물에 비치는 하늘”이고, “깊고 고요”한 심연이다(「웅덩이」). “흙탕물”이 실상(實相)이라면 “하늘”은 환(幻)이고 초월의 이미지다. 이때 웅덩이에 고여 있던 “흙탕물”은 돌연 환과 망아의 세계를 비추는 성찰의 거울로 바뀐다. 삶은 아무리 범박해도 그 안을 들여다보면 여러 곡절과 사연이 있고, 그것들은 저마다 균열과 아픔을 품고 있는 것이다. 삶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살아 있는 것이기에 멈춤이 아니라 격류다. 그 삶이 시인과 우리의 뒤를 “눈에 핏발이 서도록”(「나비」) 따라다닌다.
추천의 글
지리멸렬한 정치 사회적 현실의 모순도 그의 손을 거치면 해프닝이 되고 만다. 삶의 비극성을 따지고 국가와 사회에 대해 정체성을 물으면서도 그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그것을 현재화(顯在化)한다. 현실세계의 모순을 정면에서 비판하게 되면 자칫 긴장감을 잃고 따분해지기 쉬운데 특히 그는 풍자와 함께 은유와 상징을 통해 심미적 표현가치와 인식의 깊이를 추구여 시의 완성도를 성취한다. 이런 그만의 독특한 언어형식과 표현방법 때문에 나는 그의 시를 읽는 내내 즐겁고 아프고 ‘재미’있었다.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는 환상, 소통이 안 되는 가당찮은 편집증에 사로잡힌 일부 젊은 시인들의 시 사이에서 칠흑의 뱃길을 비추고 있는 등대를 만난 느낌이다.
감태준(시인)
이창수의 시는 선연하다. 요즘 한국시에 흔히 보이는 장황함이나 지리멸렬이 없다. 그의 시의 언어는 잘 정돈되어 있으며, 간명한 구조 속에서 적절하게 함축되어 있다. 이창수의 시가 보여주는 시적 긴장이 이 땅에서 발표되는 많은 시편들 속에서 그의 시편들을 돋보이게 한다. 그의 시가 보여주는 이런 언어의 정제미는 이 시인의 시가 성실한 내공에 의해 뒷받침되어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고, 사물이나 현실을 읽어내는 치열한 투시력의 결과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창수의 시편들이 견인해 보여주는 이런 저력들이야말로 요즘 한국시가 회복해야 할 지향점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건청(시인)
1970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났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0년 『시안』으로 등단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물오리사냥』이 있다.
<제1부>기연(奇緣)/열쇠 꾸러미/요산요수(樂山樂水) /목련은 무엇으로 지나 /세상에서 가장 긴 혀 /수양버들 /화성으로 온 여자 /불구경 /신발 /처서(處暑)/새 /웅덩이 /압록에서/화석/별을 세다가/입동(立冬)<제2부>봄밤/큰 새 두 마리와 큰 뱀과 나/동막동/고모/곡(哭)/고사/할머니의 세 가지 소원/홍어 /일심(一心) /세상에 이런 일이!/여섯시 오분 전/호박죽/가로등/대흥사/일월사 미륵불/운주사 와불 <제3부>에덴의 저쪽 /남산 위의 저 소나무<제4부>나비/추강에 낚시 드리우니/봄비/사루비아/맹꽁이/하수구에 빠진 날/공산명월(空山明月)/수확/공터/해남행 완행버스/고집/이월/남해 금산/비가/흑석동/삼월에 내리는 눈/긴 부리를 가진 짐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