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 공원이 어둠을 껴입으면 (2011)
2007년 『시평』으로 등단한 임윤 시인이 『레닌 공원이 어둠을 껴입으면』이라는 첫 시집을 출간했다. 그는 십여 년 동안 연어사업으로 사할린과 쿠릴열도, 중국 등지를 주유한 독특한 이력을 가진 시인이다. 그가 타국에서 이방인의 감수성으로 피워 올린 한민족 공동체의식은 그의 시 세계를 형성하는 근간이 되고 있으며, 이념과 영토를 넘어서서 인간에 대한 연민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존재의 시원에 역사의식과 인간에 대한 연민의식은 임윤 시인이 자신의 시 세계를 구축하는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소환되지 못한 존재들의 풍경
존재를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존재가 위치했던 과거 시공간의 지평에 위치해 있을 때 최적의 요건이 된다. 다시 말해 존재를 탐구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역사적 시공간으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이를 통해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역사라는 것이 결국 무수히 많은 시공간의 좌표 위에 점철된 존재들의 사건과 그 궤적을 더듬어 나가는 일이며, 이를 해석하는 개별 존재들의 역사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황량한 시베리아 벌판에서 임윤 시인이 더듬어 간 현존재의 자취와 회귀하고자 하는 지점들은 무엇이었으며, 역사 속에서 소환되지 못한 존재들의 풍경은 어떤 것이었을까. 또 그 풍경 속에 숨어 있는 미지수를 통해 임윤 시인이 풀어내는 시적 방정식은 어떤 것일까.
시인은 화물선에 '통조림용 빈 깡통 싣고' 오호츠크 해를 떠돌거나 '자작나무 즐비한 아무르 강 건너'(「항로」)에서 헤매는 이방인이다. 그가 대면한 것은 '날카로운 시선 내리꽂는 쿠릴 햇살'과 '툰드라의 바람에 자작나무 비벼대는 소리'(「난바다에 출렁이는 눈동자」)를 들어야 하는 척박한 자연환경이다. 그러나 정작 시인이 목도하는 풍경은 '사할린 남쪽 KAL 007기가 사라진 곳'(「사할린에는 연어가 산다」)이며, '탈출을 시도하는 시베리아 벌목'(「우리들의 대화법」) 현장과 '어둠이 문자를 삼킨 성벽에서 제국의 연대기'(「흔적 1」) 를 발견하는 일이다. 이곳들은 모두 한민족의 비극적 역사 현장이며, 뼈아픈 시간의 퇴적층이다.
시인이 이렇게 화석화된 역사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까닭은 자신 또한 이방인으로, 노동자로 북방을 떠도는 존재이며, 언제나 고향으로 회귀를 꿈꾸기 때문이다. '샛강 거스르는 연어처럼 차디찬 자작나무 숲 헤매고 있는 이'들은 바로 '카레이스키 연어들'로 상징되는 사할린 동포와 조선족, 고려인 들이다. 그들은 정치적 외세 속에서 타인들이 강요한 삶의 방식 속에 함몰되거나 자신의 고유한 자아와 가능성이 억압되고 유린된 채 사할린, 시베리아, 만주, 중앙아시아를 떠도는 낯선 이방인으로 살아왔다. 그들은 '젖먹이 때 만주로 이주해온 뒤'(「이도백하에 내리는 눈」)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제는 모진 풍파를 겪으며 '젓갈 냄새만은 기억하는 노파'(「멸치 젓갈」)로 남았다.
시인의 눈에는 그들이 '샛강의 냄새 잊지 않으려 지느러밀 가다듬었을 연어들'(「난바다에 출렁이는 눈동자」)처럼 혹은 '성근 지느러미 힘차게 돋아나면 카레이스키 항로를 더듬어'(「김 씨가 함흥으로 돌아가던 날」) 회귀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시인과 동포들은 모두가 '강을 떠났다 강으로 돌아오고 바다에서 왔다가 바다로 돌아갈 연어들'(「항로」)로 존재한다. 어쩌면 세상 풍파 속에서 이들이 본래성의 회복을 위한 방법으로 회귀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갈 곳을 잃어버리고 끊임없이 회귀를 꿈꾸는 존재들로 남았다.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시간에 풍화되어 낯선 풍경으로 동화되는 것이다.
시인이 그려낸 풍경은 이국적인 낭만성이 아니라 카레이스키라고 불리는 재소 고려인들의 고달픈 삶이 녹아 있고, 조선족과 탈북 이주민, 이산가족의 애환으로 채색된 소환되지 못한 존재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이처럼 임윤 시인은 역사라는 시간 속에서 개인의 삶의 양태가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며, 존재적 본래성을 상실하지 않고 어떻게 회귀 본능을 작동하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역사라는 풍화작용으로 인해 개별적 존재들이 어떻게 풍경으로 스며드는가를 담담하게 응시하고 있는 그의 첫 시집은 이런 맥락에서 커다란 의미를 획득한다.
통조림용 빈 깡통 싣고 동해를 헤엄쳐/달포 만에 코르사코프 항에 닿은 화물선/낯설지 않은 파도의 손짓/굴곡진 파랑의 연대기도 기억 할/항로의 힘줄 단단히 움켜잡는다/귀신고래 울음이 가늘게 들려오는 바다/밤의 채도에 차곡차곡 눌려 깊이를 줄여본다/비닐 랩으로 친친 감긴 빈 깡통들/겉면에 그려진 연어들이 불빛에 파닥인다/자작나무 즐비한 아무르 강 건너/모스크바로 이어질 시베리아 횡단철도/또다시 낯선 길 떠나야 할 연어들/파렛트 이고 진 트레일러가/행렬 이루어 사할린스크로 떠난 뒤/텅 빈 갑판 위에 갈매기 울음이 쌓인다/망향의 언덕에 세워진 위령탑/접었던 지느러미 펼쳐 출항 준비 마치고/징용 세대 노인들은 영구 귀국을 서두른다/강을 떠났다 강으로 돌아오고/바다에서 왔다가 바다로 돌아갈 연어들/수평선 너머 가쁜 숨들이 꿈틀거린다
―「항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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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윤 시인의 발길과 시선은 남북으로 고착된 지형을 훌쩍 뛰어넘어 저 광활한 북쪽으로 향한다. 10여 년 동안 한반도 북쪽 낯선 이국땅에서 몸소 절절히 체험했던 재소 고려인과 재중 동포 그리고 탈북 이주민의 삶의 실상이 먹먹하고 긴박하다.
그의 시정신은 일제 강점기 국내 유랑민과 국외 유이민의 비극적 삶의 실상을 ‘북쪽, 북방, 북간도, 만주’ 등의 공간을 통해 표출함으로써 당대 부조리한 사회현실을 극복하고자 했던 북방 시편과 전통을 같이한다. 겨울 하바롭스크 아무르 강가를 지나 “유랑의 피가 흐르는 도시에서”, “바다에서 왔다가 바다로 돌아갈”, “카레이스키 연어들”을 기다리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저 오랜 역사를 이루었던 시원의 “반구대 암각화에 주파수를 맞”추기 위해 북방의 강인한 정서로 거침없이 시의 난바다를 항해하는 것이다.
― 양문규(시인)
임윤
1960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고, 울산에서 성장했다. 울산대학교를 졸업하였고, 1990년대 연어사업으로 러시아 사할린과 쿠릴열도, 중국 등지를 10여 년간 주유하였다. 2007년 『시평』으로 등단했다.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문예진흥기금을 받았다.
1부_여름은 가늘다/항로/자작나무 빗자루/검은 눈동자/겨울 하바롭스크/난바다에 출렁이는 눈동자/사할린에는 연어가 산다/풀밭을 기는 킹크라비/오호츠크 귀신고래/마트료시카 속엔 누군가 있다/우리들의 대화법/샤슬릭에 대한 기억/김 씨가 함흥으로 돌아가던 날/바다 해빙/멸치 젓갈/연어들의 시위
2부_일보과(一步跨)에서 쓰는 편지/한울타리/흔적/이도백하에 내리는 눈/두만강 푸른 침묵에/북진의 불빛/낙타는 말이 없다/비명/구름의 등고선/사라진 그림자/황사/오랑캐꽃/피어나다/하얼빈 통신/허공에 지은 집/적막
3부_의자/흔적 2/공존/샤우트 창법/피리 속으로 사라지다/꺽지/쏙, 빠지다/증발한 빛/타임머신/팝업북/입 속에 사는 고래/흔적 3/산벚나무 텃밭/그들만의 리그/기울어지다/사랑니를 뽑고 싶다
4부_탈옥/날개 돋친 시간/가을 실직/바퀴의 길/오드-아이에 비친 저녁/처용무/파랑 전복/빈집/카오스/트라이앵글/흔적 4/호박 넝쿨/두릅 눈/사진 속을 걸어가다/패랭이꽃
해설․시인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