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2011)
1993년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한 황규관 시인의 네 번째 시집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이 실천문학사에서 출간되었다. 현실과 길항하면서 끊임없이 시적 면모들을 갱신해온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노동’이라는 제한적 영역을 벗어나 ‘몸’과 ‘살’을 오가며 일종의 우주론적 ․ 생태론적 영역으로 발걸음을 넓힌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간 천착해온 ‘소외’와 ‘가난’, ‘연대’ 등의 문제의식을 담지하고 있는데 이는 우주적이고 생태적인 폭넓은 사유들이 지극히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삶과 이항 선택의 문제가 될 수 없다는 시인의 믿음에서 출발한다. 시인 백무산은 황규관의 시적 공간을 두고 “그곳은 새로운 영토라 아니라 ‘오래된 본질의 기억’이 메말라 쩍쩍 갈라진 논바닥이다. 그곳은 죽어서 거래되는 면적이 아니라 회색의 시간을 몰아내고 눈부신 생명을 길러내는 곳이다.”라고 평하며 한층 확장된 황규관 시의 영역을 발견해낸다.
일상성과 초월성의 공간화
황규관의 이번 시집은 ‘몸’의 세계를 생태학적인 요소와 결합시켜 대안적 세계를 가시화하고, ‘언어’를 초월하는 ‘침묵’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인식의 출발점은 생명의 논리에 근거한 문명 비판 의식이다. 특히 이번 시집에서 비판적인 시선은 몇몇 시편들에 집중되기보다는 시집 전편에, 매우 암시적인 방식으로 산포되어 있으며, 그 비판의 언어 또한 당위적이고 추상적인 구호를 전면에 내세우는 여타 생태주의 시편들과 달리 매우 감각적인 방식으로 처리되어 있다. 때문에 이 비판은 부재하는 원인처럼 은폐되어 있으나, 같은 이유로 생경한 관념의 당위적 노출이라는 생태시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다.
시인은 “길을 넓히겠다고, 길가에 말없이/한 이십 년은 서 있었음직한 나무를/포클레인이 찍어내고 있다”(「무너지는 시간」)라는 구절에서 나무의 존재감인 시간(‘이십 년’)을 훼손하는 문명(‘포클레인’)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속도는 탐미주의를 닮았다/속도는 문명의 높이와 정비례한다”(「고속도로」)라는 표현을 통해서 문명의 지닌 속도의 욕망을 우회적인 방식으로 비판한다. 황규관의 시세계에서 문명에 의한 자연의 파괴, 기계에 의한 시간의 파열은 결국 문명과 기계에 의해 만들어진 편리함이 인간의 행복과 무관하다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대지가,/생명이 갇혔다”(「거리에 갇히다」)라는 진술은 문명과 기계의 결과물인 ‘거리’가 생명으로서의 대지를 잠식해버렸음을 고발하고, 나아가 ‘거리’로부터 ‘대지’를 해방시키는 것이 곧 생명의 정도(正道)임을 알리는 대안적 감각을 제시한다.
강물 앞에 서면 물결이 되고
숲에 들면 나무가 되는 순간이 있다
어깨를 들썩이며
모든 시간이 울먹이고 꽃잎이
바람이 되는
어찌할 수 없는 노래가 있다
멍든 가슴이 깨질 때 목마른
짐승이 밖으로 뛰쳐나와 들판을 달릴 때
언어가 조각나는
여리디 여린 몸뚱이가 있다
절정은 사막인데
사막이 피안이 되는 순간이 있다
싸움과 변명과
누적된 신음이 켜질 때
사랑과 믿음과 고독에
모두를 맡길 때
미지의 심연이 반짝이는
찰나가 있다
어두운 물질에
웃음이 번지는 기적이 있다
- 「탄생」 전문
가파른 현실 속에서 발굴한 오래된 본질
황규관의 시는 어떤 경험의 순간에 관한 기록이다. 이 경험은 시인과 대상의 만남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이 ‘순간’적인 사건으로서의 만남은 “강물 앞에 서면 물결이 되고/숲에 들면 나무가 되는”처럼 ‘나’의 정체성이 온전히 사라지는 경험이다. 이것은 ‘나’와 ‘강물’, ‘나’와 ‘숲’이라는 각각의 실체가 마주 대면하는 근대적인 혹은 이성적인 방식의 관계가 아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목적에 맞게 자연을 가공할 수 있거나, 또는 그런 가공이 진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되는 문명의 관계가 아니다. 차라리 이것은 ‘나’라는 근대적인 자아의 형상이, 혹은 언어의 산물로서의 ‘나’라는 주체성이 ‘강물’과 ‘숲’이라는 더 큰 자연의 일부가 되는 융합적인 관계이다. 그래서 이 관계는 “언어가 조각나는/여리디 여린 몸뚱이가 있다”처럼 ‘언어’의 권력이 부정되고 오로지 ‘몸’만 남는 감각적 관계이며, 나아서 이성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살’의 관계이다. 자연 앞에서 경험하는 ‘나’의 해체를 숭고의 체험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근대적인 정체성의 논리에 따른다면 곧 ‘나’의 죽음이다. ‘나’라는 이성과 감각의 선험적인 주체성이 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시인이 이 죽음의 순간에 ‘탄생’이라는 역설적 제목을 붙여놓았다. 이것은 근대적 이성이 자신의 죽음을 목격하는 장소가 바로 비이성적 감각의 관점에서의 탄생 지점이 된다는 논리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기에 “절정은 사막인데/사막이 피안이 되는 순간이 있다”라는 표현이 가능해진다. 어떤 순간, 그러니까 어깨를 들썩이며 모든 시간이 울먹이고, 꽃잎이 바람이 되는, 어찌할 수 없는 노래가 되는 순간, 그리하여 심장에 깃들어 있던 짐승이 밖으로 뛰쳐나와 들판을 내달리고 언어가 산산조각 나는 절정의 순간에서 황규관은 ‘사막’이 상징하는 죽음을 지나 ‘피안’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다. 시인의 눈이란 이러한 것이다.
그의 시에서는 어떤 면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사랑을 말할 때도 그렇고 가족과 노동을 말할 때도 그렇다. “느리게 걸을” 때도 그렇다. 흐르는 강에도 면적은 있는데 그는 한사코 면적을 거부하는 듯하다. 사실, 고도화된 자본의 시대에 모든 지배적 가치는 면적에서 나온다. 면적은 영토이고 부동산이고 권력이며 배제의 힘이다. 비물질적 면적도 작동하는 방식은 같다. 하지만 모든 면적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쉼을 허락하고, 위안을 주고, 생명의 부화를 위한 “눈부신 정적”이 있는 곳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포클레인과 덤프트럭”으로 강을 들어내고 산과 나무를 아무런 죄의식 없이 도륙해 버리는 시대에 자본주의 생산노동 역시 안식을 위한 수단들이 결코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인간적 삶의 가치와 그 뿌리를 뽑아내어 버리는 힘으로 그는 인식한다. 그러기에 머물 곳은 어디에도 없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가 면적을 말할 땐 새로운 영토가 아니라 “오래된 본질의 기억”이 메말라 쩍쩍 갈라진 논바닥이다. 그 논에 물이 들면 “메말랐던 지난 시간들이” 젖고 “다른 설렘”이 채워져 “어제를 품고 어제와 단절한” 다음 오늘에 새로워진다. 그러나 그곳은 죽어서 거래되는 면적이 결코 아니다. 회색의 시간을 몰아내고 눈부신 생명을 길러내는 곳이다. 나는 그가 생명을 길러내는 모습을 조금 더 보았으면 싶었지만 아직은 타협할 수 없는 곳에 그가 있다. 그만큼 그는 우리 시대의 가파른 현실을 누구보다도 철저히 체화한 시인이다.
-백무산 (시인)
전주에서 났다. 전태일문학상을 받았으며 시집으로 『철산동 우체국』, 『물은 제 길을 간다』, 『패배는 나의 힘』이 있다.
제1부 꽃과 꽃 사이의 날갯짓
경계
탄생
낙화
어떻게든
밥
눈 온 아침에
붉은 꽃
아침이 되는 길
무논
겨울 강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냇물이 흐르는 쪽
제2부 방향 없는 바람
길
풀
아름다운 꽃밭
강가에서
바닥에 대하여
인간의 길
희뿌연 벌레
고속도로
거리에 갇히다
강
무너지는 시간
8월
제3부 공장 밖이 위험하다
만국의 노동자여, 분열하자
공장 밖이 위험하다
우리는 이렇게 왔다
잃어버린 다이너마이트
마지막 남겨진 말
2008년 6월에 쓴 시
싸움의 끝
죽음에게는 먼저
심장의 빛깔
제4부 신음 같은 사랑
우리의 희망
전라도
더러운 시
집구석
악몽
육 년 동안
새해 아침에
죽음들
묘비명
노래에 대하여
제5부 아프지도 않고
꽃
詩
냇물
무화과나무로부터
소음의 정체
먼지
자화상
입동
더부살이하는 책
오어사
아프지도 않고
살을 앓다
잠들지 않는 생활
벽
해설 고봉준
시인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