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구
김영석
기분 나쁘게 미끈거리는
그 어둡고 답답한 내장 속에
아주 작고 이쁜 입을 가진
통통하게 살오른 참조기 한 마리가
온전히 통째로 들어있지 않은가
큰 입 작은 입 보글보글 함께 끓여서
오랜만에 째지게 맛있는 저녁을
아귀아귀 먹어 치우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문득 저 텅빈 허공의
주린 뱃속을 둘러보면서 더없이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본다
저 광대한 허기 속에서
우리들은 시원하게 숨 쉴 수도 있고
모두가 공평하게 아주 서서히 소화되는 동안
이렇게 맛있는 것들을 즐기면서
아직 살찔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부분 발췌)
*
그런데 시인은 아귀의 탐욕을 엉뚱하게 긍정적으로 그려놓고 있다. 아귀의 뱃속에서 참조기는 소화되고, 나의 뱃속에서는 아귀가 소화된다. 또한 나는 죽으면 저 광대한 허공의 뱃속에서 한 점 먼지가 되어 서서히 소화되어 간다.
한 점 먼지가 된 나는 먼 훗날 바람을 따라 바다로 가서 참조기의 살을 찌우는 플랑크톤 양식이 되지 않을까. 그 참조귀는 다시 아귀를 살찌우고, 아귀는 맛난 찜이 되어 누군가의 허기를 달래줄 것이다.
그러니 누구도 억울할 일이 없다. 만물이 서로를 살찌우는 양식이 되고 있으니 모두가 공평할 뿐이다. 이 모든 일이 저 아귀처럼 커다란 입을 가진 허공의 뱃속에서 이루어진다.
부정적인 탐욕을 행복한 탐욕으로 바꾼 시인의 역설이 일품 아귀찜 요리를 생각나게 한다. 이런 지옥도라면 기꺼이 살아볼 만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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