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택수 시인의 지상에 시 한 편

아구

실천문학 2008. 9. 8. 14:26

아구

                 김영석

 

기분 나쁘게 미끈거리는

그 어둡고 답답한 내장 속에

아주 작고 이쁜 입을 가진

통통하게 살오른 참조기 한 마리가

온전히 통째로 들어있지 않은가

큰 입 작은 입 보글보글 함께 끓여서

오랜만에 째지게 맛있는 저녁을

아귀아귀 먹어 치우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문득 저 텅빈 허공의

주린 뱃속을 둘러보면서 더없이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본다

저 광대한 허기 속에서

우리들은 시원하게 숨 쉴 수도 있고

모두가 공평하게 아주 서서히 소화되는 동안

이렇게 맛있는 것들을 즐기면서

아직 살찔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부분 발췌)

 

*

아귀는 탐욕의 대명사다. 오죽했으면 ‘아귀도’라는 지옥도까지 생겨났을까. 괴상망측하게 생긴 지느러미와 몸통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무시무시한 입, 지저분한 살갗이 아무리 예쁘게 봐주려해도 비호감이다.

그런데 시인은 아귀의 탐욕을 엉뚱하게 긍정적으로 그려놓고 있다. 아귀의 뱃속에서 참조기는 소화되고, 나의 뱃속에서는 아귀가 소화된다. 또한 나는 죽으면 저 광대한 허공의 뱃속에서 한 점 먼지가 되어 서서히 소화되어 간다.

한 점 먼지가 된 나는 먼 훗날 바람을 따라 바다로 가서 참조기의 살을 찌우는 플랑크톤 양식이 되지 않을까. 그 참조귀는 다시 아귀를 살찌우고, 아귀는 맛난 찜이 되어 누군가의 허기를 달래줄 것이다.

그러니 누구도 억울할 일이 없다. 만물이 서로를 살찌우는 양식이 되고 있으니 모두가 공평할 뿐이다. 이 모든 일이 저 아귀처럼 커다란 입을 가진 허공의 뱃속에서 이루어진다.

부정적인 탐욕을 행복한 탐욕으로 바꾼 시인의 역설이 일품 아귀찜 요리를 생각나게 한다. 이런 지옥도라면 기꺼이 살아볼 만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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