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묵 정원9 수묵정원9 - 번짐 장석남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 손택수 시인의 지상에 시 한 편 2009.01.14
상처가 숲을 이루다 상처가 숲을 이루다 박성우 매를 맞고 자란 나무가 있다 부지깽이도 파리채도 아닌 떡메로 작신작신 두들겨 맞으며 한 세월 건너온 나무가 있다 뒤통수가 얼얼할 때까지 눈알이 쏙 빠질 때까지 흠씬 두들겨 맞던 시절 건너온 상수리나무가 있다 전주 완산골 처마 낮은 한옥마을, 야트막한 오목대 산기.. 손택수 시인의 지상에 시 한 편 2009.01.13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박라연 동짓달에도 치자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 일기를 쓴다 없는 것이 많아 더욱 따뜻한 아랫목은 평강공주의 꽃밭 색색의 꽃씨를 모으던 흰 봉투 한 무더기 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리지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이제 나는 산동네의 인정에 .. 손택수 시인의 지상에 시 한 편 2009.01.12
가슴에 묻은 김치국물 가슴에 묻은 김칫국물 손택수 점심으로 라면을 먹다 모처럼 만에 입은 흰 와이셔츠 가슴팍에 김칫국물이 묻었다 난처하게 그걸 잠시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평소에 소원하던 사람이 꾸벅, 인사를 하고 간다. 김칫국물을 보느라 숙인 고개를 인사로 알았던 모양 살다 보면 김칫국물이 다 가슴을 들여다.. 손택수 시인의 지상에 시 한 편 2009.01.07
성에꽃 눈부처 성에꽃 눈부처 고형렬 일월 아침 얼음빛 하얀, 성에꽃 흘러내린다 저 슬픈 마음 네 눈동자 속에서 흐른다 낙화를 슬퍼한 옛 시인들아, 나는 오늘 그 성에꽃들이 물이 되는 소리를 듣는가 반짝이는, 말없는, 붙잡을 수 없는 은빛 잎 창밖은 모래알이 떨고 있는 추운 아침 가질 수가 없으므로 살아 있고 .. 손택수 시인의 지상에 시 한 편 2009.01.06
이중섭의 소 이중섭의 소 이대흠 자신의 뿔로 들어가기 위해 소는 뒷다리를 뻗는다 서귀포에서 부산에서 뿔로 들어가 단단한 힘이 되어 세상의 고름을 터뜨리리, 소는 온몸을 뿔 쪽으로 민다 소의 근육을 따라 툭툭 햇살은 튕긴다 앞다리 들어 펄쩍 들어가고 싶다 소가 뛰면 뿔도 뛴다 젠장 명동에서 종로에서 뿔.. 손택수 시인의 지상에 시 한 편 2009.01.06
세모 이야기 세모 이야기 신동엽 싸락눈이 날리다 멎은 일요일, 북한산성길, 돌틈에 피어난 들국화 한송일 구경하고 오다가, 샘터에서 살얼음을 쪼개고 물을 마시는데 눈동자가, 그 깊고 먼 눈동자가, 이 찬 겨울 천지 사이에서 나를 들여다보고 있더라. 또, 어느날이었던가. 광화문 네거리를 거닐다 친구를 만나 .. 손택수 시인의 지상에 시 한 편 2008.12.31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 황지우 긴 외다리로 서 있는 물새가 졸리운 옆눈으로 맹하게 바라보네, 저물면서 더 빛나는 바다를 * 남해 앵강만 벽련마을에서 해 지는 풍경을 바라본다. 서울에서 유배온 별 하나가 일찌감치 노도 하늘 위에 떠오른 무렵, 동백숲과 시누대숲 사이로 난 샛길을 따라 지는 해를 .. 손택수 시인의 지상에 시 한 편 2008.12.30
나무 빨래판 나무 빨래판 유종인 세탁기는 베란다에서 웅웅거리며 돌고 있는데 옷 껍데기들만의 혼음이 물살에 휘둘러지고 있는데 어머니, 돌아가시기 직전의 가슴마냥 욕실 한켠에 누워 있는 갈비뼈 한 짝, 저 가난에 내 속옷을 비벼 빨고 싶은 봄날이 있으니 새벽에 좌변기에 앉아 저 물맛도 오래 못 본 갈비뼈 .. 손택수 시인의 지상에 시 한 편 2008.12.29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정호승 눈은 내리지 않았다 강가에는 또다시 죽은 아이가 버려졌다 차마 떨어지지 못하여 밤하늘에 별들은 떠 있었고 사람들은 아무도 서로의 발을 씻어주지 않았다 육교 위에는 아기에게 젖을 물린 여자가 앉아 있었고 두 손을 내민 소년이 지하도에 여전히 엎드려 있었다 바다.. 손택수 시인의 지상에 시 한 편 2008.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