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택수 시인의 지상에 시 한 편

양말

실천문학 2008. 10. 14. 10:22

양말

                               임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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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놀다 들어오면 아무렇게나
홀랑 까뒤집어서 벗어 던지는
아이들의 양말
걔들 엄마는 호통치기 일쑤이지만
나는 그냥 그 귀여운 발목이라도 보는 듯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아이들의 발은 못 말리는 것!
이 세상을 쿵쿵 뛰기 위해 온 그 녀석들을
누가 무슨 재주로 말린단 말인가
양말을 까뒤집으면서
때묻은 어른들의 꿈을 까뒤집으면서
아이들은 크는 법
양말에 묻혀 온 저 꿈의 얼룩들이
아름다운 무늬가 되어서
우리 집을 채우는 저녁
아내가 돌리는 세탁기 안에서까지
깔깔거리고 쿵쿵대며
술래잡기를 하는 아이들의 발목
세상의 모든 숨은 꿈의 머리카락을 찾아내는
너희들의 양말

                        (후략)

*

대학 같은 데서 시론 강의를 할 일이 있으면 빼먹지 않고 인용하는 글이 있다. 대구 옥포초등학교 2학년 이영완 군이 1995년 6월 21일에 쓴 일기다.

"학교를 갔다 와서 할머니가 보고 싶어서 하우스에 갔다. 그런데 뻐꾸기 소리가 났다. 뻐꾹뻐꾹 하더니 한 번 더 들어보니깐 워꾹워꾹, 또 들어보니깐 보꾹보꾹 해서 나는 뻐꾸기는 소리가 세 개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났다."

놀랍지 않은가?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학교에 갔다 온 소년은 제도교육이 '뻐국뻐꾹' 이라는 언어의 감옥 속에 가둬놓은 뻐꾸기 울음 소리를 단번에 해방시켜놓았다. '때묻은 어른들의 꿈을 까뒤집'듯이.

공인된 상징어가 아무리 사회적 약속이라 하더라도, 꿈 꿀 권리까지 빼앗아 갈 수는 없다. 뻐꾸기도 허구헌 날 같은 식으로만 울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뻐꾸기도 울다 지치면 목이 쉰다. 대단한 발견을 하고 나서, 할머니를 향해 뛰어가는 이영완 군의 '발목'이 보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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