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택수 시인의 지상에 시 한 편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실천문학 2008. 12. 3. 09:25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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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세상에 패배한 뒤 스스로 유배를 떠나고자 하는 자의 비애가 한 폭의 설경을 이루었다. 평생을 유랑하며 산 시인에게 남은 것은 가난과 혼자 마시는 소주뿐이다. 변방의 출출이(뱁새) 우는 마가리(오두막)에 가서 살고 싶지만 그에게는 타고 갈 당나귀도, 함께 떠날 나타샤도 없다.

아무도 찾지 않는 이 절대고독 위로 눈이 내린다. '푹푹' 무게감 있게 내리는 흰 눈은 '응앙응앙' 정겹게 우는 흰 당나귀를, 백야를 연상시키는 북국의 나타샤를 '고조곤히'(고요히) 환기시킨다. 시인의 이름까지 백석이고 보니 눈과 나타샤와 흰 당나귀와 더불어 모두가 새하얗다.

아무리 어려운 시대를 살더라도 정갈한 정신을 잃지 않고자 세상으로부터 길을 끊는 이 새하얀 빛은 외롭고, 높고, 쓸쓸하다. 눈이 내린다, 발이 푹푹 빠질 만큼. 출출이와 마가리, 잃어버린 북방의 말과 풍경을 고스란히 들려주는 한 가난한 영혼을 사랑해서 오늘 밤은 나타샤도 흰 당나귀도 다 내 안에 들어와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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