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불가해성에 맞서는 서사의 길
1994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홍양순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이 실천문학사에서 출간되었다. 현대 사회에서 날로 황폐해져가는 가족의 운명을 그린 첫 소설집 『자두』에서 작가가 보여주었던 진실성 짙은 묘사는 이번 소설집에 들어와 더욱 핍진해졌고, 문장과 플롯은 한층 간결하고 탄탄해졌다. 『나비, 살랑거리다』에서 홍양순 작가는 삶의 상처와 마주하는 것이 소설의 운명이라 여긴다. 그리고 곧 삶의 상처 끝으로 내몰린 사람들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소설가 오정희는 “홍양순 소설에는 겨우겨우 숨쉬는 존재들에 대한 깊은 연민이 가득하다. 단순히 소외된 자, 깊이 상처받은 자, 사회적 부적응자라고 명명하는 것이 폭력적으로 느껴질 만큼 가녀린 인물들은 어느 먼 별에서부터 이 세상에 불시착한 사람들처럼 낯설고 불안하고 위태롭다.”라고 평하며 홍양순 작가가 불러내는 인간군상들의 면면을 환기시킨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개가 염소를 낭떠러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염소는 여자가 숨을 멈춘 사이 절벽의 가장자리에서 절묘하고 아슬아슬하게 방향을 틀었다. 검둥개가 언제 그랬냐는 듯 유유히 걸어서 여자에게로 돌아왔다. 잠시 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여자는 이번엔 많이 놀라지 않았다. 유심히 보니 염소는 개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개에게 접근해 뒷발로 툭툭 장난을 걸기도 했다. 개에게도 적의라고 할 것은 손톱 끝만큼도 없어 보였다. 염소가 다가오면 주위를 겅중겅중 뛰며 도리어 상대를 즐기는 것 같았다. 삶이라는 것이 어쩌면 저렇듯 벼랑 끝에서 벌이는 곡예와 같은 놀음은 아닐까. 여자는 검둥개와 염소의 무심한 장난을 보며 왠지 그럴 거라 믿고 싶어졌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멀리서 여행객들의 떠도는 소리와 함께 경운기 소리가 털털털 들려왔다. 섬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그의 말대로 아무 짓도 저지를 수 없는 섬이었다. (-「마라도」 中)
다채로운 여덟 편의 이야기들 속에서 주요하게 반복되는 모티프는 바로 ‘상실’이다. ‘가족’과 ‘노동’의 주체되기를 상실한 소설 속 인물들은 매번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는 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교편생활 사직과 전자제품 대리점 사업에 실패한 후 낯선 공단 내 학교의 영어 주임을 맡은 남편, 그마저도 공장 노동자들의 활동을 도와 사측과 갈등을 빚는 남편 곁에서 현실에 대한 무기력감으로 자신을 “황량한 사막”과 동일시하며 “서서히 소멸되고 있”는 아내의 삶은 바로 ‘벼랑 끝 곡예’와 다를 바 없다(「미망迷妄의 집」). 그런가 하면, 백화점 관리부서에서 일하다가 정리해고된 여자도 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죽음으로 인해 급격히 가세가 기울어져 그녀는 서둘러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지만, 밀린 방값 때문에 주인과 주변 사람들에게 눈총을 받는다(「미스터리 시간」). 이밖에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손녀를 키우기 위해 무가지 신문을 주워다 팔며 생계를 이어가는 그네 씨(「필녀必女」)와 구조조정을 앞둔 심리적 부담을 아로마테라피 향기로 다스리는 남자(「포푸리를 만드는 남자」) 등. 이렇듯 『나비, 살랑거리다』에 등장하는 작중인물들은 구체적 양상이 다를 뿐 삶의 빈곤과 무기력, 그리고 허무의 모습들을 공통적으로 보이고 있다.
그들은 삶의 난경(難境)을 벗어나기 위해 죽을힘을 다 쏟지만, 현실을 벗어나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다. 벼랑 끝으로 내몰린 자들은 차라리 삶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에 젖어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이 삶을 포기하는 것도 결코 녹록지 않다. 온전히 살지도, 온전히 죽지도 못하는 소설 속 인물들은 고통스럽고 비루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억척스레 이것들을 살아내는 ‘곡예’를 보여준다. 작가는 삶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존재들이 갖는 ‘생명력’에 주목한다. 작품 속에서 ‘생명력’은 때로 삶의 비루함에 굴복하지 않는 초월적 의지로 그려지기도 하고, 혹은 현실에 대한 아집과 만용으로 똘똘 뭉친 무모함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결국 작가는 깊게 패인 상흔과 연루된 작은 것들의 ‘사이’로 우리를 초대한다. 우리는 그곳에서 삶의 상처와 마주하고 아파한다. 알 수 없는 통점들이 곳곳에서 아우성을 쳐온다. 하지만 결국 고통들의 존재들이 서로 유대하고 관계를 맺어가면서 우리 삶의 어느 순간은 상흔들을 훌쩍 뛰어넘기도 한다. 작가가 우리에게 그 많은 인물군상을 소개시켜 준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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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양순의 소설들을 읽다보면 온몸으로 운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울음과 슬픔이 목까지 차올라 금시라도 쏟아져내릴 듯 출렁이는데도 불구하고 늘 갈증에 허덕이는 작품 속 인물들의 안타까움이 마치 나의 그것인 양 생생하게 닿아와 덩달아 허덕이기도 한다.
이 소설집에는 자신의 표면적과 입지를 한껏 좁혀가며 낮게낮게 살아가는 사람들, 겨우겨우 숨쉬는 존재들에 대한 깊은 연민이 가득하다. 단순히 소외된 자, 깊이 상처받은 자, 사회적 부적응자라고 명명하는 것이 폭력적으로 느껴질 만큼 가녀린 인물들은 어느 먼 별에서부터 이 세상에 불시착한 사람들처럼 낯설고 불안하고 위태롭다. 이들을 ‘지금, 이곳으로’ 끌어내는 작가의 시선은 지독히 사실적이며 맵고 집요하다. 지하셋방에서, 혼잡한 지하철에서, 최남단의 섬에서, 재개발지구에서, 인적 끊긴 한밤의 도로에서, 정글과도 같은 조직사회 안에서 삶의 현장성을 획득하면서 그 연원과 근원을 짚어가는 눈길과 사유는 사변에 머무르지 않고 살아간다는 일이 과연 무엇이며 어떠한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가 가진, 사람살이의 숙명적인 고독과 슬픔을 감지하는 힘은 우리로 하여금 작품속 인물들과 상황이 드러내보이는 어떤 남루함도 비루함도 함부로 비웃거도 타매할 수 없이 만든다. 문학에 있어서조차 오로지 가볍고 경쾌하고 산뜻함만을 요구하고 소비하는 이 세태에 이 작가의 진지하고 성실한 시선과 노력은 한층 값지다. 읽고나면 행간마다 먹물처럼 고여 있는 깊은 어둠이 실은 이 작가가 사람들에 대해, 생에 대해 갖고 있는 뜨거운 사랑이고 연민이고 슬픔이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1958년 물빛 곱고 바람 향기로운 제주섬에서 태어났다. 1994년 『문화일보』에 중편소설「떠도는 혼」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동국대 문예대학원을 졸업했고 2004년에 김유정소설문학상을 수상했다. 2005년과 2010년에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문학창작기금을 받았으며 소설집으로 『자두』가 있다.
미스터리 시간 / 밤을 달리는 자전거 / 미망(迷妄)의 집 / 마라도 / 막다른집 / 포푸리를 만드는 남자 /나비, 살랑거리다 / 필녀(必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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