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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두커니 (2009)

실천문학 2013. 8. 12. 10:32

 

 

 

 

 

 

 

 

 

 

                 

 

 

 

 

 

 

 

 

민중서정시의 부활

박형권의 시는 1990년대 이후의 시들로부터 삼사십 년은 역류해 올라간 듯, 범민중적 감성에 접근해 있다. 그렇기에 세련된 미학적 갱신을 지상과제로 삼아온 주류 시단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 시집은 낯선 언어의 집일 수밖에 없다. 시집의 해설을 쓴 고봉준 문학평론가는 이에 대해 “웰 메이드(well-made)한 언어들이 넘쳐나고, 전위적인 실험들이 난무하는 이 종언의 영토 위에서 …… 확실히, 그의 시는 비시대적이다 …… 그가 시대적인 감성의 구조와 유행에 아랑곳하지 않고 시를 써왔음은 분명해 보인다”고 확신한다.

주목할 것은 그가 구시대의 시를 복원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민중서정시’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변화하는 시대와 함께 민중의 삶을 생명력으로 삼아야 할 시가 관념적인 이념의 언어에 머물러 쇠락해갔던 역사를 반추해볼 때, 박형권의 시는 더욱 빛을 발한다. 그의 쉽고 맑은 일상의 언어로 쓴 시들은 머리가 아닌 가슴을 파고든다. “주식 자랑 새 차 자랑”하는 친구들 앞에 “보면 일도 하기 싫은 고구마꽃”(「고구마꽃」) 자랑을 꺼내놓다 되삼키는 농부와, “한 생애를 밀어 넣은 어업을 싣고 어찔어찔”(「땅멀미」) 땅멀미를 앓는 어부와, “내 한술 적게 뜨면/입 하나를 더 먹일 수 있는/작은 경제학으로도 겨울이 비껴”(「이렇게 눈이 내리면」)간다고 말하는 도시빈민과, “일 없는 남편을 가진 일하는 여자들이 모두 나의 아내로 보이는”(「등줄쥐」) 가장의 모습은 시인의 고백이기도 하면서 우리 시대의 벽화로 다가온다. 이들 시편에는 자신의 삶에서 길어 올린 시만이 가질 수 있는 생명력과 진정성이 핍진하게 묻어나고 있다.

시인의 삶의 행적과 자연스럽게 맞물리는 이 시집의 공간들은 크게 농촌, 어촌, 도시 변두리로 나뉜다. 각각의 공간은 또렷한 경계를 이루지만 이 시들을 한데로 모으는 것은 바로 주변으로 밀려나 있는 듯 보이나 건강한, 민초들의 삶에 대한 옹호이다. 그와 더불어 “불변의 상수(常數)처럼 그의 시를 감싸고 있는 에로틱한 이미지”(해설, 고봉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활달한 성적 상상력 속에 활기를 얻는 이 시편들 속에서 우리는 제 욕망의 주인이 될 수 없는 자본주의 시대의 욕망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건강한 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시의 각별함은 구체적 생활현장을 내용으로 하면서 이야기시의 형식을 통해 전개되고 있는 점을 통해서도 거듭 확인된다. 그는 근래에 보기 드문 남성적 화법으로 어떤 때는 능청스럽게, 또 어떤 때는 구수한 입담으로 민초들의 삶을 들려준다. 마치 그 옛날 ‘이야기 가인(story-singer)’이 부활한 것만 같은 충일감 속에서 우리는 민중시의 새로운 비전을 엿보게 된다.


맑은 독으로 빚는 시정신

뱀 한 마리가 먹지 않기 위하여/자기 입을 흙으로 봉합하고/속을 비울 때/흙에 고이는 독은 이슬만큼 맑으리/사람도 누군가를 위하여/겨울잠을 잔다면/잠결에 적어둔 편지가 꽃 좋은 사월에는/화사한 고백이 되리/저 야트막한 언덕에/댑싸리 꽃대궁이로 엮은 집에서/내 다리가 어디에 있는지 내 팔이 어디에 있는지 나의/처마 끝은 어디에 있는지/모를 정도로/식구들의 냄새와 얼크러져/마을의 체온과도 얼크러져,/청마루에서 내다보이는 복숭아나무에서 꽃잎이 나부낄 때/나는 흙을 문 살모사처럼 묵언으로 독을 골라/치사량 높은/시 한 줄 받아내리 _「사함석」 전문

시 쓰는 행위에 대한 성찰들로 이루어진 시편들을 한데 모은 3부의 마지막 시, 「사함석」에서 우리는 박형권 시인이 추구하는 시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사함석’이란 뱀이 겨울잠을 자기 전에 머금었다가 봄에 뱉는 흙덩이를 뜻한다. 시인은 “먹지 않기 위하여/자기 입을 흙으로 봉합하고/속을 비우는” 뱀의 생태를 들어 시대에 대한 직설적인 비판을 대신한다. 이 시대를 통과하는 방법으로 뱀은 “묵언으로 독을” 고르는 겨울잠에 빠져든다. 대지의 한 귀퉁이에 몸을 묻은 채 “식구들의 냄새와 얼크러져/마을의 체온과도 얼크러져” 빠져든다. 잠에 ‘빠져드는’ 것은 하강하는 자의 몸짓이며 그곳에서 뱀이 얼크러지는 세계는 식구나, 마을과 같은 동시대의 가장 생생한 현실이다. “낮은 생태계의 간절함”(「등줄쥐」)을 끌어안는, 동시대의 삶에 대한 강한 애정으로부터 솟아난 독은 이슬만큼 맑지만, 치명적이기에 강한 역설로 다가온다. 이 치명적인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꿈꾸어야 할 세계가 아닐까.


■추천의 글
박형권의 시는 아직 ‘캐지 않은 조개’다. 그건 그의 시가 어떤 영향에서도 자유롭고 정직하다는 뜻이다. 늦깎이로 시인이 되었지만 그는 이름 그대로 개성적인 ‘진짜 신인’이다. 나는 박형권이 잊지 못하는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던’ 바다를 안다. 매립되어 땅이 되어버린 오늘의 바다도 안다. 그래서 그 바다에 묻힌 ‘싱싱한 종패’가 그의 삶이고 역사이기에 그의 시는 독특하다. 오늘 캐낸 조개밭을 시작으로 박형권의 조개농사가 해마다 속이 꽉꽉 차는 풍년이기를! -정일근(시인)

 

196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경남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2006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제1부 흙의 이민/우리 동네 집들/우두커니/우수(雨水)/산복숭아/향기/물꼬를 트는 사월/무논에 찍힌 발자국/고구마꽃/처녑/우물/계산/저녁/꼬리뼈/편지 제2부 배에서 점심을 먹었다/포구(浦口)/명태 서리/행진/봄 도다리/숙희가 립스틱을 짙게 바르면 풍어(豊漁)가 온다/전복 맛은 변하지 않는다/예인선/지문/허리 눈금/조개 캐러 가는 배/일몰여관(日沒旅館)/관계/칠게의 구멍/수중릉(水中陵)/털 난 꼬막/땅멀미 제3부 물푸레나무/도원(桃園)/봄밤/굿나잇 횟집/퇴기(退妓) 옥화를 만났다/해변 테니스장/상행선 철쭉/얼골/새들이 나를 나무로 볼 때/사함석(蛇含石) 제4부 이렇게 눈이 내리면/등줄쥐/세종기지/장모님 앞에서 마누라 젖꼭지를 빨았다/너에 대한 시를 쓰고 싶었다/귀소(歸巢)/우동은 식어야 맛있다/브라운관 싱크대/킹왕짱 당구장에서 어물전 가는 길/돼지부속집/고물상이 있는 아침/면목동에서는 우물을 파면 안 된다는데/중랑천에서의 일박/참매미가 노래할 때 해설 고봉준 시인의 말

 

 일상의 언어로 빚어낸 민초들의 삶 ―― 라동철 기자, 국민일보(2009. 10. 16 )
 자연을 읽으면… 그것이 바로 시! ―― 이왕구 기자, 한국일보(2009. 10. 16.)
 걸쭉한 입담으로 풀어쓴 반농반어의 삶 ―― 박록삼 기자, 서울신문(2009. 10 .17.)
 읽다보니 읽는 자세가 '우두커니'가 됐다 ―― 김훤주 기자, 경남도민일보(2009.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