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택수 시인의 지상에 시 한 편

겨울 가지

실천문학 2008. 12. 23. 08:39

겨울 가지

                           장철문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생략이란 저런 것이다

꼭지가 듣도록, 한 생애를
채웠다 비우고
모세혈관처럼
허공을 껴안은 가지들

그 시린 가지 끝의 서릿발
磁場(자장)에
가뿐히 몸을 부린
까치 한마리

저 작은 떨림의
가뿐함

저 매운 가지 끝에서
어느 허공이
다른 허공과 남일 수 있으랴

 

*

군더더기 하나 없다. 생략이란 이런 것이다. 거추장스런 수사를 내다버린 나무의 골격이 사뭇 세한도 풍이다. 바람 부는 '그 시린 가지 끝의 서릿발' 같은 정신이 강한 자력으로 까치를 불러들였다.
'떨림'이란 잎을 다 떨어뜨린 나무와 새가 함께 만드는 파문. 그러고 보니 새도 날기 위해 뼈가 비어 있는 것 아닌가. 번다한 말을 생략하고 자신을 절제함으로써 생겨난 여백에 실핏줄이 돈다. 나뭇가지가 모세혈관처럼 뻗어갔다면 빈 나뭇가지야말로 또 하나의 잎맥이다. 그렇다면 나뭇가지 뻗어가는 저 광대무변한 허공이 또 하나의 이파리라는 말이 아닌가.
잎을 다 떨어뜨린 뒤에야 갖게 된 '하늘 나뭇잎'은 아무도 떨어트릴 수 없는 잎이다. 그러니 허공이 나무를 껴안은 것이 아니라 나무가 허공을 껴안은 것. 춥고 외로운 시절 넘치던 장식을 버린 채 근본으로 돌아간 겨울나무를 생각한다. 한 생애를 채웠다 비운 나뭇가지 끝이 회초리처럼 아프고 맵다

'손택수 시인의 지상에 시 한 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무 빨래판  (0) 2008.12.29
고요한 밤 거룩한 밤  (0) 2008.12.29
물소리를 꿈꾸다  (0) 2008.12.22
거미  (0) 2008.12.22
성에꽃  (0) 2008.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