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찾기

스콧 니어링 자서전 (2011)

실천문학 2013. 8. 1. 14:22

 

 

 

 

  

 

 

 


철저한 자립농생활로 자본주의화된 문명에 저항했던 한 근본주의자의 위대한 생애가 담겨 있는 자서전. 스콧 니어링의 청년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그의 뛰어난 재능, 부지런함, 꺾이지 않는 이상, 청렴함, 여유로운 마음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부산시 교육청 청소년 권장도서


삶의 진정성을 찾아가는 용기있는 영혼―스콧 니어링의 생애
스콧 니어링은 1883년 미국 한 탄광도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1983년 생을 마감했다. 1백 세가 되던 1983년, 그는 지상에서 더 이상의 할일은 없다고 판단하고 스스로 곡기를 끊고 지극히 평화로운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격변기와 맞물려 있는 1백 년의 짧지 않은 생애 동안 가장 완전하고 조화로운 삶을 추구했던 그의 삶이 결코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
젊은 시절 그는 열정적인 사회개혁가였고, 자유주의자이자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산주의자였다. 혁명과 전쟁의 시대였던 그 시기는 근본적으로 평화주의자였던 그를 전쟁의 광기에 대한 강한 비판으로 이끌었다. 그 때문에 그는 재판정에 서야 했지만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분명하게 자기 의견을 피력하곤 했다. 1945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을 때 그는 강경한 어투로 대통령 트루만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당신의 정부는 더 이상 나의 정부가 아닙니다."
그는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개인적 자유의 수호자 중 한 사람으로 기억될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로 상징되는 문명 전반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가한 사회철학자이자 자연주의자, 실천적인 생태론자로 손꼽힌다.
이러한 선구자적 생각과 단호한 태도 때문에 그는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대학강단에서 쫓겨나고 차츰 강연 요청도 끊겼으며 신문에 기고하는 글조차 거절당했다. 그러던 중 니어링은 스무 살 연하인 매력적인 여성 헬렌 노드(지금은 헬렌 니어링으로 더 잘 알려진)를 만나 인생을 새롭게 시작한다. 헬렌은 스콧에게 최고의 반려자이자 동지였다.
그들은 함께, 처음에는 버몬트에서 그리고 후에는 메인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적인 생활을 했고 겨울에는 여행을 떠나고 강의를 하고 저술을 하며 지냈다.
1970, 80년대가 되자 그의 이름은 차차 사람들 속에 알려져 수많은 사람들이 호숫가 니어링 부부가 손수 지은 돌집과 그들의 삶을 보러 찾아오곤 했다. 당시 사람들에게 스콧 니어링은 가난하지만 아무것도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명석한 몽상가로, 개인적 희생을 개의치 않고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당시 그를 향한 존경은 젊은 시절의 화려한 활동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스콧과 그의 아내 헬렌의 자연주의적인 삶의 방식 때문이었다. 이들의 삶에 감명을 받은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돌아갔다.
함께 농장을 일구는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많은 젊은이들에게도 유기농장에서 감자밭을 가꾸는 이 주름지고 구부정한, 팔꿈치를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은 괴팍한 노인이 금세기 초 뛰어난 연설과 강연으로 수천 명을 흥분시켰던 명연설가이자 1917년 반전논문 발표로 스파이 법에 기소되어 연방법정에 섰다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저 조그맣고 깐깐한 노인일 뿐이었다.
1983년 8월 24일, 스콧 니어링은 부인 헬렌 니어링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1백 년의 시간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으로 의미있고 충만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의 메시지는 자본주의적 소비문화가 극대화되면 될수록, 우리의 삶이 더욱 바빠지고 황폐해질수록, 더욱 강력하게 되살아날 것이다.

자유를 찾아가는 인간의 몸짓―스콧 니어링의 사상
일찍부터 그가 가진 관심의 영역과 통찰력은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것들이 많다.
아동노동문제에 대해 아무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때에 『아동노동문제의 해결책』을 출간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여성들에게 선거권이 부여되지 않았던 1912년에 『여성과 사회진보』를 출간하여 여성들의 사회참여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힌 바 있다. 또한 흑인을 니그로 등의 경멸적인 호칭으로 부르던 당시에, 미국 내에서 흑인들이 당하는 폭력을 생생히 묘사한 글을 발표하기도 했고, 1933년 저술한 『파시즘』이라는 책에서는 파시즘을 제약없는 자본주의의 한 형태라고 단언했다.
1917년 미국이 1차세계대전에 참전하려 할 때 니어링은 『거대한 광기』라는 제목의 논문을 출간했는데 여기에서 그는 전쟁 기계를 움직이는 역학관계를 상세히 묘사했으며 징집법안을 “비미국적”이며 “헌법정신과 미국의 전통에 명백히 위반되는 법안”이라고 비난했다. 1923년 니어링이 『석유, 전쟁의 씨앗』이라는 논문을 발간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둘 사이의 관계를 인식하지 못했지만 그후 60년 지나 발발한 걸프전은 그의 통찰력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한 권의 ‘성서’처럼 와닿는 위대한 생의 자서전
시골에서의 자립농 생활은 그가 추구해 온 사회주의에 대한 실현으로써 자연주의로 돌아가 인간본연의 모습을 실천적으로 보여준 사상적 삶이라 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가장 기본적으로 우리가 그의 생애를 뒷받침해 주는 사상을 만나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다.
“모든 계급사회의 밑바탕에는 ‘네가 일하고 나는 먹는다’는 원칙이 깔려 있다. 이 원칙은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대신 뿔뿔이 떼어놓는다…….”(본문 중에서)
그는 자본주의의 병폐가 가져다주는 인간파괴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진정한 극복방안을 찾아나선다. 젊은 시기의 사회주의자적인 면모와 노년의 자연주의적인 면모는 모두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자 거부에서 비롯되었으며 체제 안과 밖에서 실천적으로 대응해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그의 행동을 받치고 있던 것은 인간과 인간의 삶에 대한 고민으로 점철된 근본주의 사상이었던 것이다.

지은이 스콧 니어링
1883년 미국 한 탄광도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며 자본의 분배문제를 깊이 연구했는데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앞장서다 해직되었다. 그후 톨레도 대학에서 근무하였으나 전쟁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주장하다 또다시 해직되었다. 1917년 반전 논문을 발표하여 1919년 연방법정에 피고로 섰지만 배심원들의 30시간에 걸친 긴 숙의 끝에 무죄판결이 내려졌다. 그러나 사회로부터 위험분자, 과격분자로 몰려 소외를 당했다. 생의 후반기로 접어든 니어링은 스무 살 연하의 매력적인 여성 헬렌 노드를 만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후, 메인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하였다. 1983년 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옮긴이 김라합
1963년 생. 서강대학교 독어독문학과 졸업.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 역서로는『칼 마르크스 전기』『유물을 통해 본 세계사』『영화로 본 새로운 역사』등.

1. 내게 진실로 소중한 것들
어린 시절 나의 스승들
교사의 길을 선택하다
경제결정론에 대한 투쟁
가르치는 자는 생각을 나누지 않으면 안된다
소수 독재체제와의 접촉 그리고 충돌
마침내 총성이 울리다
'인생역경대학'에 등록을 하며

2. 황혼의 마지막 섬광
전망을 모색하기 위해
커뮤니케이션의 암흑시대
또다시 울리는 총성
서구 문명과 결별하다
뉴잉글랜드의 피난처

3. 새벽 여명
여명을 기다리며
사회주의는 거짓 여명인가
치열한 싸움
내 교육의 마지막 학기

美사회개혁가,자연주의자 스콧 니어링 자서전

“전세계적 규모로 계획된 파괴와 살상이 서구 문명이 인류에게 제공할 수 있는 최상의 서비스라면 서구문명은 조금이라도 빨리 세계 무대에서 퇴장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우리의 시골생활은 이 폭력적인 미친 세상에서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제 정신을 갖고 살 수 있게 해주는 삶의 한 본보기다.”

자본주의로 상징되는 문명 전반에 대해 근본적 비판을 가했던 열정적인 사회 개혁가이자 자연주의자 스콧 니어링(Scott Nearing,1883~1983). 그의 자서전이 실천문학사에서 출간됐다.

니어링은 미국 한 탄광도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100세 되던 해에 지상에서 자신이 할 일을 다 했다며 스스로 곡기를 끊어 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삶의 원칙이 분명한 사람만이 취할 수 있는 그런 최후였다. 그가 살았던 100년은 현대사회의 격변기였고, 그의 일생은 파란만장하면서도 완벽하고 조화롭고 너무도 진지한 삶이었다.

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강연과 저술을 통해 아동노동문제 해결과 여성 참정권 등 당시로서는 매우 앞서가는 주장을 폈다. 재산가의 유산 상속 제의도 거절했다. 두 차례 세계대전에서 죽어간 수백만 명의 민간인과 병사들을 보고 절망을 느껴 전쟁의 광기를 강하게 비판해 법정에까지 섰다. 1차대전 반전운동을 주도한 행적 때문에 스파이 활동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

니어링은 선구자적 생각을 조금도 굽힘없이 설파한 대가로 교수직에서 쫓겨나야 했다. 순회강연 요청도 끊겼다. 중산층의 가정을 추구했던 첫번째 아내도 떠나갔다.

그는 1930년대 미국 우익의 압력 아래서 살아가는 삶의 수단으로 가능한 한 시장과 임금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도록 자급농을 택해 시골마을에서 살았다. 당시 45세의 니어링에게 스무살 연하의 매력적인 여성 헬렌 노드가 동반자가 되었다. 인생을 완전히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이었다. 돈을 벌려고 애쓰지 않았다. 돈을 번다는 것은 한도가 없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1년 동안 생활에 필요한 현금을 벌어들일 만큼만 환금작물을 생산했다.

“생계를 위한 노동 4시간, 지적 활동 4시간, 좋은 사람들과 친교하며 보내는 시간 4시간이면 완벽한 하루가 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자본주의 소비문화가 극대화되면 될 수록, 우리의 삶이 더욱 바빠지고 황폐해질수록, 그의 메시지는 더욱 강하게 되살아날 것이다.
--- 대한매일신문 김주혁 기자 (2000년 5월 23일 화요일)


장 기통,스콧 니어링의 자서전

“파스칼, 내 나이 100세, 이제 더 신중을 기할 여유가 없다”(장 기통)

“삶의 투쟁은 계속된다.우리는 기회의 평등과 경험의 공유가 보장되는 좀더 나은 사회로 인류를 선도하는 것으로써 이 위험천만한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는데 일조할 수 있다”(스콧 니어링)

철학자 장 기통은 97세에 평생동안의 철학적 사색을 대화체 형식으로 풀어냈고, 스콧 니어링은 80세에 사회주의자로, 그리고 근본주의자로 살았던 자신의 삶을 정리했다.묘하게도 두 사람 모두 100세를 살았고, 죽음이 임박해서도 치열한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기통은 ‘나의 철학 유언’(동문선)에서 그의 사상에 영향을 끼쳤던 인물들을 하나둘씩 등장시킨다.악마 루시퍼는 죽음을 눈앞에 둔 기통 앞에 나타나 “진리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이어 파스칼이 등장해 “왜 신을 믿는가”라고 묻고 베르그송과는 그리스도교의 가치를 토론한다.

기통의 ‘사상 자서전’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교황 바오로 6세가 등장해 가톨릭교도가 된 이유를 고백하는가하면 드골, 소크라테스, 단테가 등장하고 드디어 기통 스스로 하늘의 법정에 서기에 이른다.당연히 성 베드로가 재판장이며 성녀 테레사와 미테랑 대통령이 기통을 옹호한다.기통이 서술한 자신의 마지막 심판은 이렇다.“그리스도는 위엄 있는 동작으로 오른손을 들었다…신의 빛이 내 존재를 분해했다.그리스도의 시선이 내 심장을 뚫고 들어왔다.…그리고 그는 입을 열어 심판을 언도하였다”.

1901년에 태어나 1999년까지 20세기를 꽉 채워 산 기통은 현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철학자로 평가받는다.그는 미테랑 대통령의 고문을 지냈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비성직자로 유일하게 참가해 발언한 전력도 있다.베르그송의 정신적 상속자이며 루이 알튀세의 스승이기도 했던 기통은 생전에 100여권의 저작을 남겼다.

기통이 지적 대화와 고금을 넘나드는 철학적 사색을 화려하게 정리했다면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과 자연주의적 삶을 담은 ‘스콧 니어링 자서전’(실천문학사)은 오히려 거칠다.미국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경제학을 가르치던 스콧 니어링은 젊은 시절 열정적인 사회개혁가이자 사회주의자였다.그는 각종 강연과 글쓰기를 통해 미국의 전쟁에 반대했으며 스파이혐의로 법정에 서기도 했다.미국사회는 자본주의의 탐욕과 전쟁의 광기를 비판하는 그를 용납하지 않았고, 스콧 니어링은 결국 미국을 등지기로 결정했다.“내가 서구문명에 작별을 고한 이유는 세계대전에 관한 연구를 통해 문명의 중심지들이 남아도는 잉여금을 파괴자들에게 넘겨주고 있으며 군대의 모험가들이 도박을 하는 사이에 가망 없는 파산상태로 빠져들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신중한 금융업자가 그러하듯 서구문명을 고위험 고객으로 간주하고, 장부에서 지워버렸다”라고 썼다.스콧 니어링은 자서전 전체를 통해 ‘네가 일하고 나는 먹는다’는 원칙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을 가한다.“나는 1883년에 시작한 여정의 마지막 단계에 와 있다.이 여정은 참으로 다사다난했고, 많은 반대와 논쟁과 갈등을 수반했다.내가 걸어온 아주 좁은 길에 탈선과 패배는 있었지만 후퇴는 없었으며 사람들의 반대와 추방에 맞서 나는 혼자서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스콧 니어링과 아내 헬렌의 자연주의적 삶은 1960년대가 넘어가며 테크놀로지 과잉에 지친 수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안겨줬다.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돌아간 것도 이들 부부의 숭고한 삶의 자세 때문이었다.
--- 국민일보 남도영 기자 (2000년 5월 22일 월요일)


반골 한평생... 비울수록 꽉 차는 삶

수년 전 스콧 니어링(Scott Nearing 1883~1983)의 생애를 처음 접하며 ‘낯선 감동’에 빠졌던 기억이 새롭다. 「녹색평론」에 소개된 ‘아흔 살의 관점: 헬렌 니어링과의 대담’이라는 글이었다. 맙소사! 1백살을 맞은 스콧 니어링이 곡기를 끊은 채 자발적 의지에 따라 ‘죽음’의 시간을 선택했던 것이다.

더욱 놀란 이유는 53년 동안 남편과 함께 살았던 아내 헬렌의 반응이었다. 아내 헬렌이 남편의 죽음을 담담히 지켜보았다는 사실이었다. 헬렌은 “당신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했어요”라는 말로 남편과 이별하지 않았던가. 그 대담을 읽으며 대체 스콧 니어링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겨났던 것은 당연했다. 범인의 저급한 호사 취미였는지도 모른다.

최근 출간된 책 「스콧 니어링 자서전」(원제 The Making of a Radical)은 한 인간의 ‘거룩한 생애’를 오롯이 체험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이 책은 언뜻 1854년 출간된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Walden)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서술의 의도와 지향점은 사뭇 다르다. <월든>이 은둔자의 고독과 몽상으로 가득차 있다면, 이 자서전은 확고한 신념과 열정이 물씬 풍겨나는 전인의 기록으로 읽혀진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도저한 반역의 정신으로 삶의 충실성을 지향했던 한 인간의 내면 풍경을 이토록 생생한 실체로서 보여줄 수 있을까? 그랬다. 이 ‘피의 기록’은 자서전 문학의 새로운 전범 의미뿐만 아니라, 존재의 집을 잊고 사는 우리의 각질화된 삶을 저 밑둥에서부터 반성하게 만드는 성경과도 같은 책이다. 이 거룩한 생애를 통해 우리는 진정한 자유의 극점을 엿보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은 모두 3부로 짜여졌다. 책의 절반을 차지하는 제1부와 제2부는 급진주의자 시절의 격정이 행간에서 진하게 묻어난다. 그는 줄기차게 싸웠다. 아동 노동 문제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음모 폭로에 이르기까지 그의 입과 붓은 치열한 ‘전투적 열정’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그런 그가 두 차례나 대학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심지어---무죄 판결을 받았지만---스파이 혐의로 기소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는 철저히 ‘부의 유혹’을 경계했다. 가령, 800달러를 주고 산 독일 공채가 무려 6만달러까지 치솟았지만 난로에 던져버렸다는 일화가 있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이 책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40대 중반에 만난 스무 살 연하 헬렌과의 생활을 기록한 제3부의 기록은 이 책의 압권이다. 죽음의 시간을 맞는 순간까지 ‘생계를 위한 4시간 노동, 지적 활동 4시간, 친교의 시간 4시간이면 완벽한 하루가 된다’는 생활 철학을 견지한 대목에서 우리는 진정한 자유의 정신을 엿보게 된다. 스콧 니어링은 분명 급진주의자였지만 철저한 평화주의자였다. 가령,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 명령을 내린 트루먼에게 보낸 편지 구절은 유명하다. “당신의 정부는 더 이상 나의 정부가 아닙니다.” 그뿐 아니다. 추수 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 같이 온 미국의 축제 기간 중에 자발적 금식을 택했다. 그는 비정한 산업주의 체제와 서양 문화의 야만성을 철저히 거부하고 쉬지 않고 저항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급진주의자보다는 ‘선각자’였다고 볼 수 있으리라.

우리의 경우 감동적인 자서전을 접하기가 쉽지 않다. 이 책은 ‘정치의 계절’에 양산되는 저급한 회고록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다. 물론 철저한 ‘근본주의’에 대해 견해를 달리하는 독자들도 없지는 않을 듯하다. 그러나 이 책이 “진실은 그 자체로서 말한다”라는 확고한 신념의 실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독자는 감히 없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 조선일보 고영직(문학평론가) (2000년 5월 20일 토요일)

사람은 두 가지 부류가 있다

스콧 니어링(1883~1983)은 100살이 되던 해 스스로 곡기를 끊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그것은 은둔과 노동, 절제와 겸손, 그리고 무엇보다 삶의 분명한 원칙을 누린 사람만이 맞을 수 있는 그런 죽음이었다. 그가 80살에 쓴 <스콧 니어링 자서전>은 부인 헬렌 니어링의 자서전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등으로 이미 알려진 스콧의 생애와 사상이 밀도 높게 응축된 책이다.

“기질에 따라 사람을 나눈다면 안락한 삶을 열망하는 사람들과 끊임없는 결단과 투쟁으로 이어지는 힘겨운 삶에서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스콧의 일생은 당연히 두번째 부류에 속한 것이었다. 생의 전반부를 그는 굳세고 소신 강한 사회주의자로 살았다. 그는 일찍이 여성들의 사회참여를 주장했으며 아동노동의 실태를 파헤쳤고 흑인의 비참한 삶을 폭로했다. 무엇보다 그는 자본주의 착취문명과 싸웠다. 생의 후반부에 그는 헬렌과 함께 도시를 떠나 50여 년을 농부로 살았다. 이 책에서 그가 산 아름답고 조화로운 삶을 만날 수 있다.
--- 한겨레신문 고명섭 기자 (2000년 5월 22일 월요일)

순수한 삶이 주는 카타르시스

스콧 니어링을 알게 된 것은 친구인 LG전자 이희국 부사장의 소개 때문이다. 처음엔 나는 스콧이 사회를 떠나 은둔하면서 자급자족 생활을 영위한 미국의‘도인이야기’정도로 감을 잡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책을 읽어갈수록 사회를 등지면서 자신의 원칙을 지키고 진정으로 자유롭고 의미있는 삶을 실천을 통해 보여준 스콧 니어링의 매력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 복잡하고 상호의존적이며 전쟁과 파괴, 모순과 무지, 편견과 분노로 가득한 세상에서 누가 권력과 부의 부스러기를 과감히 거부하고 사회에서 쫓겨나면서까지 자신의 지적 순수성을 지키면서 외톨이가 되어 힘겨운 삶의 희열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니어링의 진면목은 자신의 삶을 단순화하고 원초적이고 우주적인 힘을 느끼면서 자연과 진정한 교류를 강조한데서 더욱 잘 드러난다. 나는 니어링을 통해 오래간만에 인간에 대한 믿음과 감동의 신선한 충격을 느낄 수 있었다.
--- 파이낸셜뉴스 CEO추천 서적 서정선(마크로젠 대표) (2000년 10월 17일 화요일)


여든이 넘은 나이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자신의 역경에 찬 삶과 경건한 철학을 고스란히 담아낸 스콧 니어링의 자서전. 1883년 미국의 한 탄광도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니어링은 100세가 되던 1983년 지상에서 더 이상의 할 일은 없다고 판단하고 스스로 곡기를 끊고 지극히 평화로운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현대사회의 격변기와 맞물려 있는 한 세기에 걸친 그의 삶은 가장 '완전하고 조화로운' 삶을 추구했으나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젊은 시절 열정적인 사회개혁가였던 그는 자본주의로 상징되는 문명전반에 대해 비판을 가한 사회철학자이자 실천적인 자연주의자였다.
--- 세계일보 화제의 책 (2000년 5월 24일 수요일)

미국 좌파지식인의 생애 재조명

은둔하는 삶은 매혹적이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곡진한 사랑과 확신이 없는 은둔은 허상에 불과하다. 45살에 버몬트의 숲으로 은둔, 100살에 곡기를 끊고 죽음을 맞았던 미국의 좌파지식인 스콧 니어링(1883~1983)의 신념은 반전주의와 반자본주의. 원폭을 투하한 미국정부에 “당신의 정부는 더이상 나의 정부가 아닙니다”라는 서한을 보냈고 800달러짜리 공채가 6만달러까지 치솟자 난로에 던져버렸다.

명연설가이자 교수였던 그는 1932년 아내와 숲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돌집을 짓고 하루 4시간의 노동을 통해 자급자족했다. 저속한 자본주의의 사슬인 시장,임금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정신의 표현. 미국의 젊은이들은 그를 따라 농촌으로 향했다. 이 책에서 니어링은 젊은날부터 자연에의 은둔까지 일관된 자신의 믿음을 들려준다. 바로 평화와 생명의 본질을 갈망하는 성인의 목소리다. “우리의 시골생활은 상아탑에 은거하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의 시골생활은 미친 세상에서 제정신을 갖고 사는 삶의 한 예이자 본보기이다”
--- 경향신문 3분 책마당 김광호 기자 (2000년 5월 25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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