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의 문학/시

악어 (2005)

실천문학 2013. 8. 11. 23:49

 

 

 

 

 

 

 

 

 

                     

 

 

 

 

 

 

 

 

 

 

타자를 끌어안는 풍요로움

고영민 시인은 공동체의 친밀감과 유대의식, 갈등과 불화보다는 화해와 인정으로 어우러진 삶을 지향한다. 이 같은 온건성과 부드러운 시정(詩情)은 고영민 시의 가장 큰 미덕이라 할 수 있다. 삶 속에서 연속되는 팽팽한 갈등과 긴장을 푸근하고 따뜻한 정감으로 감싸안을 때 그의 시정은 더욱 빛을 발한다. ‘나’ 아닌 ‘너’와의 유대감을 형성하고자 하는 의식의 지향을 고영민 시인은 ‘틈’에 대한 사유를 통해 드러낸다.

아래층에서 못을 박는지
건물 전체가 울린다.
그 거대한 건물에 틈 하나를
만들기 위해
건물 모두가 제 자리를 내준다. (「즐거운 소음」 부분)


균열이나 붕괴의 조짐으로 대변되는 ‘틈’을 고영민 시인은 ‘나’와 ‘너’가 뒤섞일 수 있는 여백이며 경계의 공간으로 인식한다. 거대한 건물에 박히는 한 개의 ‘못’을 위해 “건물 모두가 제 자리를 내준다”는 것은 타자를 배척하지 않는 온화함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옆의 책을 조금 빼내/함께 밀어보니/가까스로 들어간다”, “내가 네 안에 반듯이 앉도록/조금만 그렇게 迷宮을 들썩여”(「틈에 관하여」) 달라는 시인의 말에는 배타성을 경계하려는 의식이 오롯이 들어차 있다. “내가 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한 나무가 한 나무에 기대어/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기대어/나 아닌 것을 거쳐/나인 것으로 가는, 이 덜컹거림”(「나에게 기대올 때」)과 같은 구절 또한 동일한 발상이다. ‘나’와 ‘너’의 넘나듦의 세계가 진정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믿는 시인은 “내 가장 따뜻한 곳을/너의 가장 차가운 곳에 댄 채” “생전 모르는 너와/몸이 맞닿”는 순간 “내 몸 나도 모르게/불끈, 뜨거워지는 역과 역 사이/그리고 내 몸 함께 덥혀지는/컴컴한 땅속/나는 너에게 가만히 기댄 채/개찰된 이 하루/또, 환하게 너를 통과한다”(「치한」)고 고백함으로써 상생(相生)의 에너지를 분출한다.

가족, 살아가는 이야기

타자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는 시인의 태도는 가족공동체의 끈끈한 유대의식에서 비롯된다. 즉, 타자인 ‘너’를 대하는 그의 시선은 가족에 대한 인식의 확장이라 할 수 있다.

팔순의 어머니 아버지 두 분만 사시는 고향집에 내려가니 그동안 그럭저럭 나오던 TV가 칙칙거리며 나오지 않는다. 늙은 어머니는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고 늙은 아버지는 대문간을 지키고 젊은 나는 세워놓은 안테나를 동서남북 돌려보다 신통치 않아 아예 통째로 뽑아들고 감나무 옆, 뒤란 시누대밭, 장독대 뒤꼍으로 왔다갔다한다.
내가 대문간의 늙은 아버지한테 잘 나와요? 물으면 늙은 아버지는 대문 앞에 서 있다가 할멈, 잘 나와? 묻고 늙은 어머니가 아까보담 더 안 나와요, 하면 늙은 아버지가 다시 말을 받아 아까보담 더 안 나온다, 하고 젊은 나한테 외친다.
나는 또 자리를 옮겨 잘 나와요? 묻고 늙은 아버지는 늙은 어머니에게 똑같이 재우쳐 묻고 늙은 어머니는 늙은 아버지에게 대답하고 늙은 아버지는 젊은 나에게 대답한다. (「주말연속극」 부분)


팔순의 부모와 젊은 아들이 “연신 묻고 묻고, 대답하고 대답”하는 행위는 해체 위기에 있는 가족 간의 소통회로를 원상 복귀시키는 과정으로 해석된다. 서로의 안테나를 “돌아가지 않게 단단히 비끄러매”는 일은 그런 의미에서 가족적 유대를 확인하고 그 토대를 튼튼히 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소풍 나온 일가족이 물병 하나를 돌려가며 마시는 장면을 그린 「산벚나무」에서 시인은 제 차례가 되자 병 주둥이를 손으로 닦는 딸을 “뭐가 더러워 食口끼리”라고 나무라고, “입 댄 자리에 제 입을 대고 물 마신다 산벚나무의 그늘 밑 긴 물관부, 꽃잎 날린다 나무는 뿌리 속까지 다 시원하다”고 말함으로써 사랑과 정으로 이어진 따뜻한 가족 세계를 보여준다. “그릇이 그릇을 품고 있다/내 안에 있는 당신의 아픔”(「밥그릇」), “기울게 쌓아올린 척추 마디/피사의 사탑을 생각하며/나는 아내의 등을 민다”(「아내의 등」)에서 보이는 부부애 또한 그러하다. 이처럼 가족 혹은 타자와의 유대를 강화하고 이를 지속시키는 힘은 권위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사실을 시인은 가히 절창이라 할 만한 시 「산등성이」를 통해서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드디어 산등성, 고요하게 잠든 숲의 정적과 뒤척이는 새들의 혼곤한 잠속, 순간 아버지가 걷던 걸음을 멈추더니 집 쪽을 향해 소리를 치신다. 에이, 이 못된 할망구야, 서방이 나간다면 잡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이 못된 할망구, 평생을 뜯어먹어도 시원찮을 이 할망구, 뒤돌아 식식거리며 아버지 집으로 천릿길을 내닫는다. 지그시 웃음을 물고 나는 아버지를 몰고 온다. 어머니가 켜놓은 대문 앞 전등불이 환하다. 아버지는 왜, 팔십 평생 저 낮은 산등성이 하나를 채 넘지 못할까. (「산등성이」 부분)

고영민의 시는 따뜻하고 소탈하다. 특히 그의 시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타자와의 끝없는 소통 욕망과 가족적 유대감에 대한 지향은 소통불능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그는 ‘삶은 따뜻한 것’이라고 말한다. 비관보다는 낙관을, 불화보다는 화해를, 부정보다는 긍정이 넘치는 유순함에 그의 시의 매력이 있다.

 

고영민 시인은 1968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였다. 2002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하였으며, 2004년 문예진흥기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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