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의 문학/시

슬픔의 뿌리 (2005)

실천문학 2013. 8. 11. 23:51

 

 

 

 

 

 

 

 

 

              

 

 

 

 

 

 

 

 

 

 

도종환 시인이 4년 만에 내놓은 신작 시집. 시집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다채로운 이미지들은 대중적 인지도와 친화력을 높이는 힘이 된다. 대상에 대한 사랑과 연민, 자신의 삶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 그리고 사물에 대한 속깊은 관심과 애정이야말로 도종환 시의 원형질이며, 그래서 공감의 폭이 한층 더 넓고 깊어진다. 그런 점에서 이번 시집은 그간에 보여주었던 시세계를 한층 심화시킨 것으로서 보다 높은 진정성을 획득하고 있다.

“도종환은 간곡하고 지극한 사랑의 시인이다. 그의 사랑은 한 여인을 향하기도 하지만 그의 품은 넓고 깊어서 그의 일터인 학교의 학생이나 고통받는 이웃을 포함하여 세상 사람들을 두루 끌어안는다. 그가 슬퍼하거나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세상 속에서 그의 사랑이 겪는 시련 때문이다. 그의 비유는 사랑을 안고 출렁이고, 그의 노래는 더 깊고 지순한 사랑을 위해 강물처럼 흘러간다.”__최두석(시인)

희망의 바깥은 없다
새로운 것은 언제나 낡은 것들 속에서
싹튼다 얼고 시들어서 흙빛이 된 겨울 이파리
속에서 씀바귀 새 잎은 자란다
희망도 그렇게 쓰디쓴 향으로
제 속에서 자라는 것이다 지금
인간의 얼굴을 한 희망은 온다
가장 많이 고뇌하고 가장 많이 싸운
곪은 상처 그 밑에서 새살이 돋는 것처럼
희망은 스스로 균열하는 절망의
그 안에서 고통스럽게 자라난다
안에서 절망을 끌어안고 뒹굴어라
희망의 바깥은 없다
__「희망의 바깥은 없다」 (전문)

도종환
1954년 청주 출생으로 충북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충남대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교직생활과 시 창작을 병행하던 시인은 1989년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 투옥된 이후 전교조 충북지부장을 맡으며 교육운동에 헌신해 왔다. 1998년 해직 10년 만에 복직하여 덕산중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현재 민족문학작가회의 충북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고두미 마을에서』『접시꽃 당신』『내가 사랑하는 당신은』『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당신은 누구십니까』『지금은 묻어둔 그리움』『그대 가슴에 뜨는 나뭇잎 배』『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등이 있다.

향기 가득한 시인과 시… 문득, 삼림욕 즐긴 느낌

청주 하면 무심천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도종환 시인을 알게 된 이후로는 청주 하면 도종환 시인이 생각납니다. 지명과 인명 사이는 이렇게 자주 겹칩니다. 최근 도종환 시인이 펴낸 시집 『슬픔의 뿌리』(실천문학사)를 읽는 동안, 내내 도종환 시인의 선한 표정이 눈에 선했습니다. 느리고 낮은 시인의 육성까지 들리는 듯했습니다.

한때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가슴에 품었던 꿈의 온도가 많이 내려가 있는 지금, 시인은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유리창에 썼다간 지우’며 쓸쓸해합니다.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패랭이꽃’처럼 고개가 숙여집니다. 짧기만 했던 사랑, 하지만 그 사랑이 남긴 고통은 오래갑니다.

뒤돌아 ‘그대’를 향하던 시인의 발걸음이 이윽고 나무를 향합니다. 나무에 이르러, 시인은 회억(回憶)을 성찰의 차원으로 끌어올립니다. 선물로 받아온 섬백리향을 키우며 시인은 자신의 욕망과 조우합니다. 땅을 가리지 않고 잘 자라며, 향기를 내뿜어 벌레를 막고, 꽃향기가 백리 밖까지 나간다는 섬백리향. 섬에서 나는 꽃향기는 등대이기도 합니다. 풍란 향기가 지독할 때면 흑산도 어부들은 안개가 짙어도 배를 탑니다. 안개 밑으로 퍼져 나오는 풍란 향기를 맡고 귀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 치맛자락처럼 스르르 흘러내리는 섬의 꽃향기라니.

하지만 섬백리향 키우기는 만만치 않았습니다. 물을 너무 많이 주고 손때를 많이 묻혀 죽이고 말았습니다. 시인은 죽은 나무 앞에서 ‘마음 어느 구석에 너무 지나치거나 너무 모자라는 데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시인에게 나무는 곧 향기의 발전소입니다. 정향나무에서도 ‘없는 듯 있으면서 강한 향기’와 마주칩니다. 섬백리향과 정향나무의 꽃향기가 먼 곳으로 퍼져나가는 원심력이라면, ‘가까이 다가가야 느낄 수 있는’ 살구꽃 향기는 구심력의 향기입니다. 시인은 원심력과 구심력을 고루 갖춘 향기를 희구하며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꽃잎처럼 살고 싶’어 합니다. 슬픔의 뿌리가 빨아올린 향기와 꽃잎을 닮고자 하는 시인의 자세가 얼마나 단아하고 단정한지요.

향기는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꽃향기는 뿌리와 줄기, 잎사귀는 물론이고 햇빛과 공기, 물과 흙 등 우주 전체와 교감한 결과입니다. 그리하여 향기와 꽃잎의 삶은 상생의 세계관에 바탕합니다. 하지만 안다는 것과 행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다른 문제입니다. 시인은 잘 알고 있습니다. 시 ‘섬백리향’에서 시인은 말합니다. ‘향기를 가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시인은 향기를 갈구하기 이전에 가진 것을 버리는 일을 선택하고 거기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단풍 드는 나무에서 시인은 ‘버려야 할 것이/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는 사태를 목격합니다. 존재의 이유이자 삶의 전부였던 것을 버리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서’는 것이지요.(‘단풍 드는 날’) 바로 집착을 버리는 ‘방하착’의 경지. 작은 것을 모두 버리는 순간, 우주를 얻을 수 있다는 지혜 말입니다. 꽃잎처럼 낮은 곳을 향하는 삶은 방하착의 미학을 자기화하는 순간, 가능해집니다.

‘슬픔의 뿌리’를 덮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오랜만에 삼림욕을 했구나. 도종환 시인의 나무 시편들은 피톤치드가 많이 발생하는 울울창창한 침엽수림이었습니다.

--- 동아일보 책의향기 이문재 (시인) (2003년 1월 25일 토요일)

쓸쓸함의 배면에 투영된 사랑

한 해를 마감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쓸쓸하다. 펑펑 쏟아지는 눈발을 기다리지만 눈은 히끗히끗 머리만 적셔놓고 만다. 뽀드득거리는 눈을 밟고 내내 걸어보려 했는데…. 비가 온 것인지 눈이 온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달력은 덜렁 한장만을 남겨놓고 있는데.

“이 세상이 쓸쓸하여 들판에 꽃이 핍니다/하늘도 허전하여 허공에 새들을 날립니다/이 세상이 쓸쓸하여 사랑하는 이의/이름을 유리창에 썼다간 지우고/허전하고 허전하여 뜰에 나와 노래를 부릅니다/산다는 게 생각할수록 슬픈 일이어서/(중략)사람들도 쓸쓸하고 쓸쓸하여 사랑을 하고/이 세상 가득 그대를 향해 눈이 내립니다”(‘쓸쓸한 세상’)

도종환 시인(48)의 여덟번째 시집 『슬픔의 뿌리』(실천문학사)는 쓸쓸함에 대해 부르는 노래다. 하지만 ‘접시꽃 당신’에서의 절절한 망부가(亡婦歌)처럼 순애보적 센티멘탈이 아니다. 짧은 시보다는 비교적 긴 시가 주를 이룬 이번 시집에서 그는 중년의 고개턱에서 마주친 삶의 원형질로서의 쓸쓸함을 마주보고 있다.

“쓸쓸한 지 오래되었다//들 끝의 미루나무 한 그루/내 안에 혼자 서 있은 지/오래되었다//나뭇잎 무수히 떨리는 소리로/낯선 산기슭 떠도는 지/오래되었다//(중략)서산 너머로 달이 지듯/소리 없이 사랑도 저물면서//풍경의 안에서고 밖에서고/쓸쓸한 지 오래되었다”(‘쓸쓸한 풍경’)

그가 느끼는 쓸쓸함은 세상에 대한 사랑과 연민,자신의 삶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사물에 대한 속깊은 관심과 애정에서 비롯된다. 쓸쓸함의 배면에 투영된 사랑은 개인의 일로 그치지 않고 “혁명의 꿈을 접은 지는 오래되었지만”(‘나뭇잎 꿈)이나 “슬픔의 뿌리를 찾으러 가는 발걸음이 오래지 않아 끝나고/새벽하늘처럼 빛나는 시간은 반드시 오리라”(‘자귀나무꽃을 찾아서’)에서처럼 역사의식으로 발전한다.

겨울 벌판에 뽑다만 무청은 얼핏 쓸쓸하지만 그 뿌리가 놓인 자리는 다시 희망의 안쪽이다. “희망의 바깥은 없다/새로운 것은 언제나 낡은 것들 속에서/싹튼다 얼고 시들어서 흙빛이 된 겨울 이파리/속에서 씀바귀 새 잎은 자란다/희망도 그렇게 쓰디쓴 향으로/제 속에서 자라는 것이다 지금/인간의 얼굴을 한 희망은 온다”(‘희망의 바깥은 없다’)

--- 국민일보 책과길 정철훈 기자 (2002년 11월 29일 금요일)

사랑… 낭만… 슬픔의 카타르시스

시인 도종환(48).그의 이름에는 언제부턴가 사람을 슬프게 하는 사랑 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아마도 시집 『접시꽃 당신』의 잔상 때문이리라. 그렇게 기억되고 또 말해지는 그가 여덟번째 시집 『슬픔의 뿌리』(실천문학사)를 냈다. 지난 98년의 『부드러운 직선』(창작과 비평사) 이후 4년만이다.

4년이라는 세월의 간극을 메우는 건 아직도 ‘사랑’이고 ‘슬픔’이다. 그의 시구마다 ‘산다는 게 생각할수록 슬픈 일’이어서 그는 여전히 세상을 ‘사랑과 슬픔’의 판별식으로 해체하고 또 조립한다.“살면서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사랑이었다/살면서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사랑이었다.”(목련나무 중)는 그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결코 낭만주의의 끝자락 같은 우울의 변주가 아니다. 오히려 치열한 그의 의식세계를 필터로 해 걸러진 정련(精鍊)의 미학 같은 것이다.

“십칠 번 국도 위에서 역사를 우롱하던 바람은/한 찰나도 빼놓지 않고 피 묻은 뻐꾹새 울음을 귓가에 실어오고/부대끼는 밤구름을 능선 위에 옮겨왔다 ./안전장치를 풀고 방아쇠를 당겨도/이제 나의 개인화기는 발화하지 않을 것이다.”(사격명령 중)라는 시에서 보듯 그는 광주민주화 운동 때 계엄군으로 역사의 현장을 지킨 이다. 이때 그의 총이 격발되지 않은 것은, 탄창의 실탄을 거꾸로 박아넣은 그의 치명적인 ‘이적행위’의 결과였다.

전교조 활동도 지금의 그에게는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암으로 먼저 아내를 떠나보낸 뒤 감옥에 갇힌 그를 지켜낸 것은 홀로 남 은 어린 아들과 시였다.“희망은 스스로 균열하는 절망의/그 안에서 고통스럽게 자라난다/안에서 절망을 끌어안고 뒹굴어라/희망의 바깥은 없다.”(희망의 바깥은 없다 중) 사실 생의 간난을 수없이 겪은 사람에게서 ‘온유’와 ‘사랑’만을 구한다 는 것은 너무나 일방통행식 욕심이다. 그러나 지금도 사람들은 ‘시인 도종환 ’에게 사랑과 연민, 그리고 슬픔의 카타르시스를 요구한다. 일종의 대체체험 을 바라는 것이다. 이런 이들은 아포리즘적인 시 ‘저녁 무렵’을 읽자.

“열정이 식은 뒤에도/사랑해야 하는 날들이 있다/벅찬 감동 사라진 뒤에도 /부둥켜안고 가야할 사람이 있다(중략)이정표 잃은 뒤에도/찾아가야 할 땅이 있다/뜨겁던 날들은 다시 오지 않겠지만/거기서부터 또 시작해야 할 사랑이 있다.”

평론가 유성호는 이런 그의 시를 두고 “이전의 시집들보다 삶에 대해, 세계에 대해 한층 근본주의적인 사유를 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시인은 말한다.“그럴 수만 있다면 강물처럼 조용히 깊어지고 싶다”고.

--- 대한매일 심재억 기자 (2002년 11월 15일 금요일)


'사랑' 끝나지 않았어 또 시작해야 할 '사랑'이 있으니까

교사 시인 도종환(48)씨의 새 시집 『슬픔의 뿌리』가 실천문학사에서 나왔다.

“이 세상이 쓸쓸하여 들판에 꽃이 핍니다/하늘도 허전하여 허공에 새들을 날립니다/이 세상이 쓸쓸하여 사랑하는 이의/이름을 유리창에 썼다간 지우고/허전하고 허전하여 뜰에 나와 노래를 부릅니다”(<쓸쓸한 세상>)

시집의 첫머리에 놓인 시에서 시인이 세상을 쓸쓸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은 이채롭다. 시인은 그 동안 교사이자 교육운동가, 지역의 문화운동가로서 그 누구보다 활동적이며 성실하게 살아왔다. 전교조 활동과 관련한 옥고와 해직의 아픔도 그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그런 그가 `쓸쓸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만이 아니라, 시집 도처에서 시인은 쓸쓸함과 슬픔, 외로움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다.

“할 수만 있다면 한적한 강 마을로 돌아가/외로워서 여유롭고 평화로워서 쓸쓸한 집 한 채 짓고/맑고 때묻지 않은 청년으로 돌아가고 싶다”(<그리운 강>)

그는 이제 싸움을 접은 것일까. 지치고 좌절하여 이제 그만 쉬고 싶은 것일까. 쉬면서, `휴전’의 대가로 주어진 안온한 일상과 소소한 행복에 안주하려는 것일까.

아니다. 그는 싸움을 접은 것이 아니다. 다만 싸움의 방식을, 싸우는 태도를 바꾸려는 것일 뿐. 이제 그는 거창한 목표와 큰 목청 대신 작고 소박한 목표와 낮은 목소리를 택한다. “가없이 넓고 크고 자유로운 세계에 대한 꿈을/버린 것은 아니지만 작고 따뜻한 물소리에서/다시 출발해야 할 것 같다”(<그리운 강>)고 그는 말한다.

“뜨겁던 날들은 다시 오지 않겠지만/거기서부터 또 시작해야 할 사랑이 있다”(<저녁 무렵>)고 그가 쓸 때, 그 사랑은 싸움과 동의어가 된다. “사랑이라고 말했지 그러나/괴로움이었어”(<풀잎 한 촉>)라는 시를 보면 그 사랑은 또 괴로움과 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그가 말하는 사랑은 적극적인 의지와 그에 기반한 실천, 거기서 초래되는 희생과 고통을 두루 포함하는 것이다. 사랑의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고통과 슬픔이 크고 깊을 때 그는 자신을 향해 “쓰러져, 쓰러져, 견딜 수 없을 때는”(<풀잎 한 촉>)이라고 주문한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을 영영 포기하라는 뜻은 아니다. 시인이 쓰러짐과 절망을 말한다면 그것은 현실에의 냉정한 직시를 통한 새로운 일어섬과 희망을 위해서이지 다른 뜻은 아니다. “우리가 길을 잃었어도 길은 반드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꺼버린 불>)이라 믿을 정도로 그는 확고한 낙관주의자이기도 하다.

도종환 씨의 시들은 말을 억누르거나 깎아 없애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도록 내버려두는 가운데 태어난다. 까다로운 시적 장치나 인위적인 언어의 조탁은 그의 몫이 아니다. 그는 단어와 구절, 문장의 대비와 반복을 즐겨 구사하는데, 그의 시들이 일견 산문처럼 풀어져 보이면서도 리드미컬한 음악성을 유지하는 것은 그에 말미암은 것이다.

--- 한겨레신문 최재봉 기자 (2002년 11월 11일 월요일)

절망 안에서 자라난 희망

사랑과 연민, 스스로에 대한 반성적 사유라는 시인의 체질이 이번 시집에도 그대로 배어있다. 중년의 삶이 치르는 근원적 쓸쓸함을 노래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녀린 희망을 발견하려 한다.

‘이 세상이 쓸쓸하여 들판에 꽃이 핍니다/ 하늘도 허전하여 허공에 새들을 날립니다/ 이 세상이 쓸쓸하여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유리창에 썼다간 지우고/ 허전하고 허전하여 뜰에 나와 노래를 부릅니다…’(쓸쓸한 세상)

쓸쓸함은 시집 전체의 확연한 정조이지만 ‘낯선 곳을 떠도는 눈발처럼 허망하고 시리고 쓸쓸한 것들도 저희끼리 모여 단단해지며 나뭇가지를 꺾던 기억이 떠오르고 낯선 곳에도 언제나 낯선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길이 있다는 걸’(양안치고개를 넘으며) 말하면서 시인 특유의 긍정과 희망의 자세로 돌아온다. 그에게 쓸쓸함은 비극성으로 발전하기보다 생의 조건으로 승인되며 희망으로 거듭난다.

‘…곪은 상처 그 밑에서 새살이 돋는 것처럼/ 희망은 스스로 균열하는 절망의/ 그 안에서 고통스럽게 자라난다/ 안에서 절망을 끌어안고 뒹굴어라/ 희망의 바깥은 없다’(희망의 바깥은 없다). 실천문학사

--- 경향신문 책마을 한윤정 기자 (2002년 11월 9일 토요일)


중년의 고독을 보듬는 속 깊은 사랑

산간에 눈 내리고 도심에 칼바람 몰아쳐 흔적도 없이 겨울인가 했더니 가을의 절정은 역시 11월이다. 찬비 내린 뒤 환한 햇살인가 했더니 금세 뿌연 바람 불어 다 탄 나뭇잎들 우수수 하염없이 지고 있다. 제 아무리 청춘이라 우겨도 중년일 수밖에 없는 50으로 넘어가는 나이, 도종환(48)씨가 최근 펴낸 여덟번째 시집 『슬픔의 뿌리』에는 가을. 중년의 쓸쓸함이 가득하다. 그러나 그 쓸쓸함마저 이제 깊숙이 감싸안는 속 깊은 사랑도 넘쳐난다.

"가장 높은 곳에 있을 때/가장 고요해지는 사랑이 깊은 사랑이다/나릿재 밑에 나리소 못이 가장 깊고 고요하듯/요란하고 진부한 수식이 많은 사랑은/얕은 여울을 건너고 있는 사랑이다/사랑도 흐르다 깊은 곳을 만나야 한다/여울을 건너올 때 강물을 현란하게 장식하던 햇살도/나리소 앞에서는 그 반짝거림을 거두고 조용해지듯/한 사람을 사랑하는 동안 마음이 가장 깊고/착해지지 않으면 진짜 사랑 아니다/물빛처럼 맑고 투명하고 선해지지 않으면"('나리소'전문)

도씨는 죽어 헤어진 아내에 대한 사랑을 사무치게 읊은 『접시꽃 당신』을 1986년 펴내 시집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60만 권이나 읽힌 시인이다. 그 와중에 전교조 소속으로 참교육 실천 등 민주화운동을 하다 해직돼 10년 만인 1998년 복직된 교사다. 아내에 대한 사랑도, 제자들에 대한 사랑도, 나아가 세상에 대한 사랑도 다 한가지, '맑고 투명하고 선한 '사랑이어야만 세상을 밝히고 감동시킬 수 있음을 이 시집은 보여주고 있다.

"순결한 남자들/저녁노을같이 붉고 곱던 남자들/그들과 함께 한 시대도 저물어/채울 길 없는 허전함으로 끔찍한 날이 많았다/솔바람 소리 아름다운 음악 소리를 들어도/채워지지 않고 파도 소리에 젖어도 젖지 않는/밤들이 많았다/길을 떠나려다 문득문득/순결한 남자들 보고 싶어지는 날이 있다/뜨거움도 간절함도 없이 살고 있어서/눈물도 절규도 없이 살고 있어서"('저녁노을'중)

젊은 날 대책 없는 순정함으로 부잣집 털어 가난한 집 도와주려다 잡혀 오랜 옥살이하다 풀려났으나 금세 죽은 '남민전 전사'김남주 시인 같은 70, 80년대 '순결한 남자들'의 시대는 이제 신화가 됐다. 뜨거움도 간절함도, 눈물도 절규도 없는 이 뜨뜻미지근한 시대, 중년에 순정한 남자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 시집에서 도씨는 '요란하고 진부한 수식'이 아니라 그래도 지극한 사랑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 순정하고 지극한 사랑을 우리 자연의 친숙한 것들에 빗대어 과장, 가식 없이 노래하고 있기에 우리 가슴으로 직접 밀물져 들어오는 것이 도씨 시의 대중적 미덕이다. 나아가 사랑의 첫마음이 우리의 여전한 희망임을 도씨는 노래하고 있다.

"사람들은 늘 바다로 떠날 일을 꿈꾸지만/나는 아무래도 강으로 가야겠다/가없이 넓고 크고 자유로운 세계에 대한 꿈을/버린 것은 아니지만 작고 따뜻한 물소리에서/다시 출발해야 할 것 같다/(중략)/할 수만 있다면 한적한 강 마을로 돌아가/외로워서 여유롭고 평화로워서 쓸쓸한 집 한 채 짓고/맑고 때묻지 않은 청년으로 돌아가고 싶다"('그리운 강'중)

--- 중앙일보 행복한 책읽기 이경철 문화전문기자 (2002년 11월 9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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