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의 문학/시

밥그릇 경전 (2009)

실천문학 2013. 8. 12. 00:25

 

 

 

 

 

 

 

 

 

                 

 

 

 

 

 

 

 

 

 

 

 

1981년 『시여 무기여』, 『팔레스티나 민족시집』으로 출발한 ‘실천문학의 시집’이 180번째 시집으로 이덕규 시인의 『밥그릇 경전』을 출간

하면서 디자인을 개편했다. 표지를 디자인한 안상수 선생은 시인이 발 딛고 선 땅은 곧 시의 기저요, 시인은 자신이 발 디딘 땅의 소리를 적는 자라는 데 착안해 작업했다. 표지뿐만이 아니다. 앞면지와 뒷면지 역시 시인의 공간, 시의 공간을 고스란히 옮겨놓았다. 앞면지는 이덕규 시인 집 근처의 저수지와 연꽃을, 뒷면지는 이덕규 시인의 논을 패턴화시킨 것이다. 시집에 담긴 한 편 한 편의 시뿐만 아니라 그 시를 담은 그릇까지 시적으로 승화시킨 디자인이 아닐 수 없다. 시가 침묵을 지향한다고 할 때, 이는 가장 단순한 기호들을 통해 드넓은 의미 지평을 확보함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시집의 디자인은 침묵에 가장 근접한 형식으로 다가온다.
시인이 살고 있는 대지를 질료 삼아, 그 흙빛에 가장 가까운 빛을 사용하고자 하는 실천시선의 표지는 앞으로도 시인들의 땅을 찾는 의미 있는 작업을 통해 대지의 스펙트럼으로 발전해나갈 것이다.




대지의 아들, 안테우스의 시선으로

이덕규는 자신의 두 번째 시집에 땅에 발 딛고 선 ‘대지의 아들’로서의 시선을 담았다. 그 시선은 때로는 농부의 시선이며 때로는 땅 위에서 가장 힘이 센 자, 안테우스의 시선이다. 안테우스는 땅 위에서 가장 힘이 세지만 자신을 지탱해주는 땅을 떠나서는 힘을 잃고 마는 대지의 자식이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지지대인 대지의 고통을 직시해야만 강할 수 있는 운명을 가진 자다.


흘러가는 뭉게구름이라도 한번 베어보겠다는 듯이 깎아지른 절벽 꼭대기에서
수수억 년 벼르고 벼르던 예각의
날 선 돌멩이 하나가 한순간, 새카만 계곡 아래 흐르는 물속으로 투신하는 걸 보았네

여기서부터 다시 멀고 험하다네

거센 물살에 떠밀려 치고받히며 만신창이로 구르고 구르다가
읍내 개울 옆 순댓국밥집 마당에서
다리 부러진 평상 한 귀퉁이를 다소곳이 떠받들고 앉아 있는 닳고 닳은 몽돌까지


-「머나먼 돌멩이」 전문


서시 「머나먼 돌멩이」에는 하늘과 대지의 ‘경계’에 자리한 안테우스의 다른 얼굴, 돌멩이가 등장하고 있다. 하늘을 노려보는 시선으로부터 투신, 구르기, 떠받치기로 변모하는 돌멩이의 움직임은 극적인 대립항들(‘뭉게구름’과 ‘새카만 계곡’, ‘수수억 년의 기다림’과 ‘한순간의 투신’, ‘예각의 날 선 돌멩이’와 ‘닳고 닳은 몽돌’)의 나열을 통해 한 생으로 단숨에 형상화된다. 여기서 안테우스는 머리가 향한 곳, 하늘을 바라봄으로써 대지를 벗어나 이상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공상을 떨치고 자신의 발 아래쪽으로 투신하는, 현실에 더욱 밀착하는 하강의 이미지로 발견된다. 그 하강은 「오, 새여」에 이르러 상승의 이미지로 발전한다. 모든 ‘발자국’은 대지를 향한 하강이며 그 발자국은 곧 날아오르는 자의 도움닫기로 이어지는 것이다.


강변 모래톱에 어지럽게 흩어진 새 발자국을 따라가다가 물가에서 방금 날아간 듯한

선명하고도 깊은 마지막 발자국을 보았습니다 더 높이 더 멀리 날아가기 위하여 달려간

생의 도움닫기 끝에 찍힌

지상의 그 웅숭깊은 마지막 족적 속에서 광대무변의,

그 먼 나라에서 흘리는 당신 눈물이 말갛게 차오르고 있었습니다


-「오, 새여」 전문


추천의 말

이덕규는 교실에서 길러진 시인이 아니다. 그에게도 시의 교재나 스승이 있다면 그것은 그를 키워낸 산과 들이다. 하여, 그의 시에서는 막 갈아엎은 전답의 흙내가 난다. 그렇다고 그가 유순한 농부시인이라거나 평화로운 전원시인이란 것은 물론 아니다. 반대다. 선한 이웃들을 위해 그는 선뜻 악역을 자처하고 나선다. ‘보통리 저수지’둑이라도 무너뜨린다. 독 묻은 비수를 꺼내들고 감성의 벼랑 끝에 선다. 당연히 그의 시는 점잔을 빼거나 정물로 앉아 있기를 거부한다. 쟁깃날에 부딪치는 돌멩이처럼 불꽃을 내며 튄다. 하지만, 누가 모르랴. 이덕규의 시편 어느 것이나 순정 어린 ‘위악(僞惡)’의 몸짓들임을! _윤제림(시인)

1961년 경기 화성에서 태어났다.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하고 제9회 ‘현대시학 작품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가 있다.

 

제1부 머나먼 돌멩이/위대한 체온/밤의 검은 선글라스/강 건너 불빛/밥그릇 경전/칼과 어머니/낙지/장아찌/한판 밥을 놀다/뚝딱, 한 그릇의 밥을 죽이다/논두렁/꽃꿈/오, 새여/마침표를 뽑다/선암사 5박6일/한식(寒食)/꽃과 같이 곱게 나비 같이 춤추며/저 흰빛은 다 어디로 가나―첫눈/단편, 봄날은 간다/한밤의 실내악 삼중주/소낙비 안부/꽃이 꽃 속으로 들어가/죄, 1977/두고 온 사람/어떤 후일담/헌화/낫께서 나를 사랑하사 제2부 백로(白露)/복상사(腹上死)/백로/찰떡궁합/작대기가 지게에게―夫婦뎐/지게가 작대기에게―夫婦뎐/연애질/합체/맛의 기원/걸림돌/오래된 질문/거름 내는 사내/알곡 추수하는 법/물을 기다리는 사람들/의문부호를 줍는 노인/지르박 권/간발의 차이/자일리톨껌/수갑(手匣)/여덟 번째 결혼식/맹물주사―명의열전/명일(命日)/까치 누이/괘랑리 시편/이슬 아버지/식물도감을 던지다/꽃 해설 김수이 시인의 말

깊어진 흙냄새 진해진 상상력 ―― 이왕구 기자, 한국일보(2009. 3. 9.)
막 갈아엎은 논과 밭의 흙내가 난다 ―― , 농민신문(2009. 3.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