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의 문학/시

눈의 심장을 받았네 (2010)

실천문학 2013. 8. 12. 10:44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한 길상호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 출간되었다. 길상호 시인은 앞서 상재한 두 권의 시집으로 현대시동인상, 이육사문학상, 젊은시인상, 천상병시상 등을 수상하며 시단 안팎의 주목을 받아왔다.

첫 시집이 자연친화적인 서정성으로 요약된다면 두 번째 시집은 내면의 불안과 고통을 직시하는 성찰의 자세로 쓰여진 시편들이었다. 특히 시인은 언어에 대한 남다른 자의식으로 우리말을 능란하게 구사하는 시인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이번 시집 『눈의 심장을 받았네』 역시 눈부시게 풍요로운 시어를 펼쳐 보여주는 한편, 앞의 시집들과는 또 다른 시세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세상의 상처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그 아픔을 견뎌내는 모양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그(것)들이 내는 소리에 가장 낮은 자세로 귀 기울이는 시심(詩心)이 “눈송이처럼 차면서도 수정처럼 맑”다.

세상의 가장 깊은 데 소리를 담는 귀로 지은 (시)집

길상호 시는 착하다. 반듯하다. 등단작인 「그 노인이 지은 집」에서 보여주는 꽉 짜여진 비유와 은유,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어깨를 겯고 나아가는 이미지들의 연대는 자연친화적이며 자연순응적인 서정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로부터 온 불안과 고통, 절망과 분노가 바깥으로 향하지 않고 시적 화자의 내면을 겨냥해 들어가는 시편들을 선보였다. 해설을 쓴 이수정의 말대로 길상호 시인의 시적 특성은 “대상을 이해하려는 노력”, 즉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 안는 자세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눈의 심장을 받았네』는 이러한 길상호 시인의 시적 경향이 그대로 이어지는 한편, 훨씬 더 방법적으로 세련되어졌다. 시적 대상보다는 시적 자아에 골몰했던 과거에 비추어 ‘시적 자아’는 숨고 ‘시적 대상’에로 향하는 시선이 좀 더 예각화되어 있다. 물론, 이때 ‘시적 대상’에 다가가기에 앞서 이해하고 포용하려는 ‘길상호적’ 자세는 여전하다. 거기에 덧붙여 이제 시인은 ‘시적 대상’에의 단순한 이해와 포용을 넘어 그 이면에 숨겨진 소리에 귀 기울인다. 보여지는 것 너머에 존재하는 진실한 모습에 눈 맞추고 귀를 열어 숨길을 불어 넣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서시 「蓮의 귀」는 이번 시집을 읽는 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두 번째 시집의 뒤표지글을 쓴 이재무 시인이 지적하기도 했거니와 길상호 시인은 매 시집에 주요한 모티프가 되는 사물을 반복적으로 등장시켜왔다. 『눈의 심장을 받았네』의 중심에는 ‘귀’가 놓여 있다. “딱딱한 입”으로 내뱉는 “보아도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말”(「물끄러미」) 같은 세상의 소리들, 누구에게도 가닿지 못하고 허공으로 발화되어 이내 툭, 툭 바닥으로 떨어져 하수구로 흘러들고 마는 ‘팬티 장수’의 말(「혼잣말 가게」, 「헐렁한 팬티」)에도 시인은 귀를 활짝 연다. 이때 시인의 귀는 “수면처럼 평평한 귀”이자 “부처님같이” 넓혀진 귀이다(「蓮의 귀」). 그렇다면 시인의 귀가 세상의 온갖 소리들에 귀 기울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진짜 소리, 진짜 말, 진짜인 시를 얻기 위함이다.

蓮들이 여린 귀를 내놓는다//그 푸른 귀들을 보고//고요한 수면에//송사리 떼처럼 소리가 몰려온다//물속에 가부좌를 틀고//蓮들은 부처님같이 귀를 넓히며//한 사발 맛있는 설법을//준비 중이다//수면처럼 평평한 귀를 달아야//나도 그 밥 한 사발//얻어먹을 수 있을 것이다 (「蓮의 귀」전문)

그런데 바로 이 ‘귀’가 향한 곳이 전작들과 다른 지점이다. 바로 주변부화된 삶의 풍경이 직접 노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팬티를 파는 노점상, 쪽방의 독거노인 등, 남루한 현실, 밑바닥 계층의 삶의 현장이 시 속으로 뛰어들어와 있는 것이다. 이때 귀를 열고 세상의 소리를 담기 위해 필연적으로 뒤따라야 하는 것은 ‘나’의 침묵이다. “어둠도 잠이 든 밤 리어카 좌판에 늘어놓은 말들을 챙겨, 침묵이 사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헐렁한 팬티」) ‘나’의 고독과 침묵으로, 비로소 진짜 소리만이 귀에 남게 되는 것이다.

1부와 2부의 시편들이 시적 자의식과 그 주변을 에워싼 세계의 관찰로 빚어진 시편들이라면 3부는 외로움과 그리움의 시편들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먼저 간 어머니와 아버지, 할머니의 흔적들을 더듬기도 하고 좀처럼 곁을 내주지 않는 먼 그녀를 향해 신호를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때의 외로움과 그리움은 떠나간 육친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존재론적인 것에 가깝다. 그간 길상호의 시에서 중요한 상징으로 쓰여왔던 ‘어머니’가 이번 시집에서는 사라졌다고 본 이수정의 지적도 있거니와, 그들이 떠나간 자리에 홀로 남은 시인은 이제 홀로 견디는 법을 익히고 있는 듯하다. 그리움의 힘, 외로움의 힘, 고독과 침묵의 힘으로 삶을 견뎌내고 절망과 분노를 이겨내는 법을 온몸으로 체득 중인 것이다.



■ 추천의 글

길상호 시인의 시들은 눈송이처럼 차면서도 수정처럼 맑다. 마지막 넘어가는 햇살처럼 서러운가 하면 여린 귀를 내놓은 연처럼 아름답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이 시집의 시들은 시인 스스로 자신의 시의 싹을 틔웠다고 말하는 ‘구름에서 뛰어내린, 마른 땅에 머리가 터진’ 그 수많은 빗방울을 닮았다. 그 빗방울이 내는 소리는 요란하지 않다. 그러나 가만히 귀를 기울이는 자에게만 그 소리는 많은 것을 얘기한다. 어쩌면 그 소리는 세상의 가장 깊은 데서 들려오는 소리일는지도 모른다. _신경림(시인)

길상호_ 1973년 충남 논산 출생으로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현대시동인상, 천상병시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 『모르는 척』이 있다

 

제1부_ 蓮의 귀 | 병아리떼 종종종 | 조로 | 물끄러미 | 자기장을 읽다 | 계단 길 | 눈의심장을받았네 | 가벼운 여자 | 訃音 | 小春 | 탈출의 시간 | 동물구조대 | 밥그릇 식구 | 봄날 또 간다 | 붉은 마침표 | 지는 꽃 | 알자리 | 투명한 가을 | 무당벌레

제2부_ 소금우물 | 빚 | 혼잣말 가게 | 스프링노트 | 골목을 그리는 창 | 벽돌공장 그녀는 | 명주잠자리 | 허탕 | 손가락이 하는 말 | 쪽방의 여름 | 비닐하우스 | 혼잣말 | 눈깔사탕 | 툰드라의 아침 | 도마에 오르다 | 비, 웃는다 | 먹그늘나비 | 헐렁한 팬티 | 할머니와 숟가락 | 꽃을 지우다 | 고등어 자국

제3부_ 식욕 | 포기 | 옷이 마르는 사이 | 울화 | 외상 | 못된 버릇 | 비의 손가락 | 고등어구이를 먹는 저녁 | 좀비씨 안녕 | 오이디푸스의 인형 | 그릇 속에서 울다 | 지나가는 말 | 궁여지책 | 종점 | 유목의 습관 | 울다가 웃다가 | 그 밤에 내린 눈은 | 뒤숭숭 | 목욕 | 적선
해설 이수정 | 시인의 말

 

 

 

 

'실천의 문학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과 노동시 (2010)  (0) 2013.08.12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 (2010)  (0) 2013.08.12
밥그릇 경전 (2009)  (0) 2013.08.12
말똥 한 덩이 (2008)  (0) 2013.08.12
내게 진실의 전부를 주지 마세요 (2008)  (0) 2013.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