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의 문학/시

내 속에 숨어 사는 것들 (2012)

실천문학 2013. 8. 12. 11:05

 

 

 

 

 

 

 

 

 

               

 

 

 

 

 

 

 

 

 

2005년 계간 『실천문학』으로 등단한 이하 시인의 첫 시집 『내 속에 숨어 사는 것들』이 실천문학사에서 출간됐다. 등단한 지 7년 만에 나온 첫 시집으로 그동안의 시적 성과를 응축시켜놓았다. “소재의 신선함”과 “그것을 다루는 솜씨가 능숙하게 유감없이 발휘”되었다는 심사평를 받으며 여러 가지 현실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들을 써왔다.
시인은 상해, 북경, 내몽고, 항저우, 고비사막 등 국내외를 넘나들며 느낀 인간에 대한 연민과 진정성을 시집에 담아냈다. 특히 중국에서 만난 북한 탈주민의 비극적인 현실과 나라를 위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선조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렇듯 그가 첫 시집에서 재생한 삶의 순간들은 고통스럽게 자기 존재의 근원을 더듬어 나간 자의 기록물이다.

기록되지 못한 엑스트라의 변명

발터 벤야민은 얘기꾼들(「얘기꾼과 소설가」)을 두 가지 유형으로 보았다. 한 부류는 농부처럼 한곳에 정착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거나 전달해주는 존재라, 또 다른 부류는 선원처럼 바다 건너 머나먼 이국을 떠돌아다니며 자신이 듣고 본 것들을 전달해주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결국 얘기꾼이란 상상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내 전달하는 존재거나 혹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하 시인은 벤야민이 말한 유형 중에서 어떤 곳에 속할까? 상해, 북경, 내몽고, 고비사막, 접경 지역 등을 떠돌아다니며 들려준 시편들을 보면 분명 선원과 같은 부류로 보인다. 그가 떠돌면서 목격한 것은 북한 탈주민을 만나 “뭬에, 북서 넘어온 게 탄로 났네?/조선족이라고 우기디 그랬니”(「배춧속 버무리며」) 라는 대화를 지켜보거나, 고대 왕들의 무덤을 순례하며 “진시황아, 무열왕아, 천하통일도 좋지만 너희는 몇이나 순장(殉葬)했니?”(「토우」)라고 묻는 것처럼 핏줄의 역사성과 대면한다. 또한 한국에서는 잊혀진 독립운동 투사들의 이야기를 전하기도 한다. “김산은 어디로 숨었나/또 다른 이름으로 혁명에 참가해 버마에 숨어 싸우고 있나?”(「징산둥제 후퉁에서1」) 이런 시편들은 대개 한국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이며, 이국을 떠돌다 우연히 만난 존재들에 대한 존재론적 사유에서 탄생한다.
그러나 이하 시인의 시편들이 이국의 존재자들에 대한 존재론적 사유만을 전달해주는 것은 아니다. 농부처럼 여러 이야기를 전달해주는 시편들도 보여주고 있다. 가령 유년 시절에 할머니에게 들었던 이야기 “무엇이든 가두면 안 되는 것이여/뒷구리선 누구든 골목대장이여”(「반딧불의 묘」)와 같은 사유의 방식이 시인의 잠재의식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주노동자들의 고단한 타향살이를 전하기도 한다. “마을 목사의 설교 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스민다/모자란 잠 때문에 맥없이 감겨오는/눈꺼풀들에서도 비가 서린다”(「전화 결혼식」) 또한 이제는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문화 가정의 모습도 포착하고 있다. “베트남 부녀를 위한 한글학교/아이들 방학에 맞춰서 저녁에 합니다,/밭매다가도 달려오셔요.”(「베트남 부녀 한글학교」)
이렇게 이하 시인은 첫 시집 『내 속에 숨어 사는 것들』에서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사실 그는 벤야민이 말한 얘기꾼의 유형을 넘어서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시인이 꾸준히 견지하고 있는 중심축에 바로 역사성이 있기 때문이다.
연작시로 쓰여진 「스탠바이」, 「만적의 난」, 「격포항에서」, 「화장하는 부자」, 「국경의 남쪽」에서는 역사에서 소외된 민중의 이야기가 엑스트라를 통해 재현되고 있다. “왜 없는 놈들은 역사를 통틀어/엑스트라인가,”(「만적의 난」)라고 묻고 있으며, “물러서지 마라! 조선을 위해 목숨을 바쳐라!/큰 칼 찬 주인공 혼자/카메라 앞에 환하게”(「격포항에서」) 웃는 모습을 지켜보는 엑스트라의 비애를 통해 역사 속에서 이름 없이 희생된 민중들을 생각한다. 결국 시인은 사극이 재현하는 것은 역사의 반복이며 그 속에서 역할의 위계 또한 계속 이어져왔음을 통찰하고 있다.
이처럼 그에게 있어 국내외를 떠돌았던 경험은 “내 시커먼 핏줄 속으로/흘러왔다 흘러나가는 강”(「황푸강1」)을 바라보는 일이며, 역사를 통해 현재를 드러내는 일이다. 따라서 이하 시인에게 있어 역사 속의 인물을 소환하는 일은 현재에 대한 반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의 마음속에 숨어 사는 것들과 조우하게 된다.


한국에 온 지 4년째 되는 쁘띠와/다카의 신부 리나의/전화 결혼식이 열리는 날/소주병에 눌어붙은 붉은 두꺼비마냥/가리봉 이주노동자들이 공단 쪽방에 모여 있다//춥게 웅크린 저녁이 그들을 따 마시는 동안/한 번 서로의 안주가 되어보지 못한/쁘띠와 리나가 전화선을 비집고 입장한다/신부의 여린 숨결에도 찢기고 터진 등허리들은/기역 니은으로 엎어져 아프다 하는데/작업복으로 가만히 수화기를 감싸는 사내/젖은 그림자가 바다를 건널까, 취하여 비틀대는 어둠들을 비끄러맨다/마을 목사의 설교 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스민다/모자란 잠 때문에 맥없이 감겨오는/눈꺼풀들에서도 비가 서린다/거, 요새는 전화로도 같이 잠을 잔다는데, 이참에/첫날밤도 전화로 세우지 그러나?/엷은 웃음들이 서로의 콧김에 바람을 불어넣으면/구공탄처럼 금세 뜨거워지는 두꺼비들//비비기 전 갓 엎은 공깃밥처럼 리나의 꿈도/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전화 결혼식」 전문

■ 추천의 글
스스로를 엑스트라, 밤게, 한치, 덧니, 악어새로 비유하는 그는 상해, 북경, 내몽고, 항저우, 고비사막 등 국내외를 넘나드는 개방적인 시적 지평을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시들이 한낱 기행시로 떨어지지 않는 것은 그것들을 넉넉히 감당하는 진실한 체험과 더불어 “넘놀지 않고서는 한시도 감당할 수 없는” 시인적 기상이 담보되어 있는 까닭이다. 더구나 “나라와 제도를 잊”는 탈존과 기투(企投)를 통해, 그의 시들은 아득한 거리의 삶의 순간들과 역사적 장소를 현전시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명제들 사이의 연관성을 투시하지 못한 채 엉성한 말장난에 기댄 시들과 확실한 차별성을 드러낸다.
“왜 없는 놈들은 역사를 통틀어 엑스트라”일 수밖에 없는가란 매우 도전적인 시적 화두를 제기하고 있는 그에 대한 기대는 단연 여기에서 발생한다. “반성”할 줄 모르는 “혁명 놀이” 또는 역사의 연속성을 폭파하기 위해 “스스로를 불발”시키며 “봉기의 창끝”을 “동천(冬天)”에 세우고 있다. 무엇보다도 “뼈를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은 놈들”에 의해 짓밟히고 억눌린 선조 또는 역사의 기억에 “반칙”을 범하면서까지 “억압받는 민중이라면/중국인도, 일본인도/다같은 민족”이라는 세계시민적 인식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비록 그가 “국외자”가 되어 낯선 국경을 떠돌지만 그의 심층 무의식에 “뜨거운 모래”처럼 흐르는, “영(靈)과 육(肉)이 하나”로 약동하는 전통의 기운생동적 세계에도 소홀히 하고 있지 않기에 우린 “도랑의 물을 먹삼”아 큰 붓과 같은 “큰마음으로 세상에 뛰어들되 작은 것”들의 소중함을 잊지 않고자 하는 그의 다짐을 더욱 굳게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_임동확(시인)

 

■ 이하
1979년 서울에서 태어나 국민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2005년 『실천문학』 신인상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1부_스탠바이/만적의 난/격포항에서/화장하는 父子/국경의 남쪽/전화 결혼식/발걸음/평화시장에서/정전/폐업/몽골사람/모던 타임즈/나와 아저씨의 행방불명
2부_반딧불의 묘/그 가시내/허깨비/배내똥/베트남 부녀 한글학교/밤게/묏자리/악어, 악어새/지뢰 고개 넘으며/탄피를 캐며/서로의 얼개 놓지 않고1/서로의 얼개 놓지 않고2/게들의 적
3부_덧니/북한 술집에서/토우/배춧속 버무리며/반칙/그대에게 가는 길/푸른 물결/사막의 아이/징산둥제 후퉁에서1/징산둥제 후퉁에서2/상상의 정부/홍커우 공원에서/황푸강1/항저우 일기/천리마 축구단/황푸강2/다시 북한 술집 앞에서
4부_타워크레인/0호선/벽관/정관헌/남도 추어탕/회화나무展/입체경/묵언/마니산/서울 성곽/한 쌍의 붉은 십자가/풀잠자리 알/유월과 유월 사이/호두알 속의 우주/유전/한치잡이/이상한 나라의 작은 집/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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