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의 문학/시

내 안에 시가 가득하다 (2012)

실천문학 2013. 8. 12. 11:08

 

 

 

 

 

 

 

 

 

 

         

 

 

 

 

 

 

 

 

 

서정시의 눈부신 향연

투쟁과 자유 의지의 시인 양성우가 시의 본령인 그리움으로 회귀하였다. 시인의 열네 번째 시집 『내 안에 시가 가득하다』(실천문학사)는 서정시의 눈부신 향연을 보여준다. 첫 시집 『발상법』에서부터 『겨울공화국』을 거쳐 시력(詩歷) 40여 년 동안 양성우 시인은 투사적 이미지로 한국 시사의 돌올(突兀)한 별자리가 되었다. 이번 시집은 끊임없이 현실과 호흡해온 거대한 산맥 같은 시정신의 뿌리가 간단없이 샘솟는 간곡하고 지극한 사랑으로부터 연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번 시집을 통해 우리는 그의 언어가 출발하고 지향하는 세계의 기저에 자리한 상실과 그리움을 대면하게 된다. 상실과 그리움은 서정의 양면이다. 상실이 그리움을 낳고, 그리움은 현실의 불모성을 환기하면서 동시에 합일에 대한 지향을 낳는다. “아무리 지우려고 몸부림쳐도 지워지지 않는 얼굴”(「남포리」)들을 향한 긴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비탈에 분홍 꽃잎 흐드러지고 왕소나무 구부정”(「산 하나」)한 고향 마을이 드러나고, 때론 “하염없이 비가 내리”면 광주 감옥에 갇힌 아들을 생각하며 “담장을 주먹으로 때리며 내 이름을 부르며 우시던 어머니의 눈물”(「봄비」)로 가슴을 적시기도 한다. 시인은 모든 상처를 적시던 어머니의 눈물처럼 “노래가 되어 꿈이 되어” “목이 쉬도록 부르고 또 부르며” “송곳 같은 바람 끝에” 몸이 부서져도 “하얀 강을 건너서”(「하얀 강」) 너에게로 가리라 한다. 시인이 찾아가고자 하는 너란 세상의 모든 애틋한 사물들과 풍경들, 그늘지고 외져서 함부로 잊힌 삶에 다름 아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돌멩이나 지푸라기나 별이나 나, 온 길이나 갈 길, 슬픔이나 기쁨 등을 한통속으로 보는 그리움이 우주적 순환의 파동”(「해설」, 이경철)으로 확장된다.

파동의 언어적 형식은 근원적인 리듬에 휘감겨 그의 고향 마을을 휘감는 영산강 줄기처럼 유장한 가락을 이루며 흘러간다. 뜨거운 역사의 중심부로부터 뿜어져 나오던 열기를 부드럽게 식혀주며 흘러가는 가락은 기운 데가 없어 이것이 시인의 천성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한다.

숲의 외로움이 나를 그에게 데려가리
구슬픈 풀벌레 소리 여울물 소리가
나를 그에게 데려가리
아무 곳에도 보이지 않는 그에게
소리 없이 떨어지는 마른 나뭇잎들이
색 바랜 꽃잎들이 바람보다 앞서서
나를 그에게 데려가리
때가 되어 흔적 없이 사라져가는 것들과
숨어서 우는 새들의 슬픔이 나를
그에게 데려가리
저 산의 새들처럼 울고 싶어라
그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만 있다면
맨발로 가시나무 덤불을 태우는 불길
앞에 서고
풀 한 포기 없는 빈 골짜기에서라도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끝 모르는 숲의 외로움을 따라서 나는
그에게 가리
-「새들의 슬픔이 나를 데려가리」전문


상처를 쓰다듬는 그리움과 유장한 서정의 정신

어떤 시는 눈이 아닌 귀로, 소리 내어 읽고 싶은 욕망을 참을 수 없게 하는데 양성우의 시가 그렇다. 위 시는 리듬이 내용을 이끈다기보다 리듬 속에 뜻이 분리될 수 없는 한 몸으로 담겨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형식단위와 내용단위의 긴밀한 연합을 절경으로 보여준다. 미처 뜻을 새기는 작업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가락을 통해 뜻이 온몸으로 전달되어 온다고나 할까. 양성우의 시는 마침내 이처럼 자연스러운 리듬이 낯설게 느껴질 만큼 파편화된 산문적 삶을 살고 있는 현실을 돌아보게 만든다. 추천사에서 신경림 시인은 “그의 시를 읽으면 무언가 애달프고 서럽고, 한편 따듯하고 포곤하다. 여기서, 그의 시가 1980년대에 가장 많은 민중가요로 만들어져 애창되었던 까닭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오늘의 우리시가 가진 일부 문제점을 푸는 열쇠가 거기서 발견될 수도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라면서 폐쇄적인 언어 미학에 빠져버린 현재 시단의 병폐를 치유할 가능성을 그 독특한 가락으로부터 찾고 있기까지 하다. 삶의 진실에 대한 경건함과 경험에 대한 섬세한 미감이 호소력 있게 다가오는 이유를 또한 같은 맥락에서 짚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시에 대한 설명은 언제나 시 자체만 못한 것. 생래적으로 그리움에 처해진 존재가 벌이는 이 오랜만의 서정시 고유의 향연을 맛볼 기쁨은 온전히 독자들의 몫이다.


추천의 글
양성우 시를 관류하고 있는 것은 한 마디로 한(恨)이라 할 수 있다. 그 한은 삶의 구체에서 오는 것이기보다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살아오면서 보편적으로 지니게 된 정서라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는 이 한이 그만의 독특한 가락을 얻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의 시를 읽으면 무언가 애달프고 서럽고, 한편 따듯하고 포곤하다. 여기서, 그의 시가 1980년대에 가장 많은 민중가요로 만들어져 애창되었던 까닭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오늘의 우리 시가 가진 일부 문제점을 푸는 열쇠가 거기서 발견될 수도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신경림(시인)

 

양성우
1943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전남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70년 『시인』에 「증언」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발상법』, 『신하여 신하여』, 『겨울공화국』, 『북치는 앉은뱅이』,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5월제』, 『그대의 하늘길』, 『세상의 한가운데』, 『사라지는 것은 사람일 뿐이다』, 『첫마음』, 『물고기 한 마리』, 『길에서 시를 줍다』, 『아침꽃잎』 등이 있다. 현재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위원장.

 

격포에서 하룻밤/인제 가는 길에/초록, 어느 날 오후/동패리에서/능소화가 나에게/흐린 날 조천리/목련나무 아래서/그는 어디에나/3월의 시/개화산 입춘/남포리/언강에 나가/그대 생각/김천에서/미호천/어느 가을날 저녁에/그를 찾아서/너는 내 기쁨/여름 한 철/내가 생각으로 죄를 짓고 있는 동안에/이천 가면서/산 하나/멀리서라도 그윽이/청령포에서/봄비/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뗏목/하얀 강/흔적/한 송이 꽃이 다른 꽃송이에게/너에게 간다/물은 숨어서 홀로/마음의 길/무교동에서/하늘의 산/나를 보낸다/즐거운 그의 집/누구나의 인생/모래알 하나에도/구리 팔당에/안양천변 저녁놀/나비춤/오늘은 안 무너지겠네/꽃 앞에서/오직 그의 것/날개/내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지만/월롱역에서/그의 노래가 허공에 닿아서/우연이듯이/내 주머니에 티끌만 있을 때/설날 대포리/내가 그곳에 돌아갈 수만 있다면/추운 날 밤길/가을비 속에서/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다/달맞이꽃/요즘 그의 하루/가을풀밭/새들의 슬픔이 나를 데려가리/갈대꽃에 대하여/내 안에 시가 가득하다/나는 바람일까/문득 그가 와서/사당역에서/신기루/아무개에게/세월이 지난 뒤에는/물가에 앉아서/거리의 악사/해설 이경철/시인의 말

 

 

 

 

'실천의 문학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얼굴을 더듬다 (2012)  (0) 2013.08.12
나는 상처를 사랑했네 (2012)  (0) 2013.08.12
유리체를 통과하다 (2012)  (0) 2013.08.12
내 속에 숨어 사는 것들 (2012)  (0) 2013.08.12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2011)  (0) 2013.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