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심상』으로 등단한 이후 『나비의 침묵』, 『풍경의 위독』, 『아인슈타인의 달팽이』, 『로깡땡의 일기』 등의 시집을 통해 현대인들의 욕망과 그것을 키우는 미로 같은 자본주의 사회의 혼란스러운 풍경을 세밀하게 그려온 전기철 시인의 새 시집 『누이의 방』이 실천문학사에서 출간되었다.
전기철 시인은 이번 시집 『누이의 방』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가진 오래되고 곪은 상처들을 뼈아프게 매만지고 마침내 터트린다. 그래서 그는 살을 파고드는 아픔 너머, 치유의 길을 바라보며 다시 이 희망 없는 세상에 말을 걸고 있다.
희망 없는 세상에서 노래하기
전기철 시인의 두 번째 시집 『풍경의 위독』에 실린 시인의 말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갈수록 고향은 멀고/도시의 불빛은 가깝다”. 이탈리아의 시인 체사레 파베세가 “살아간다는 것은 고향에서 멀어지는 일”이라고 했듯이 전기철 시집에 등장하는 화자들은 국적이 없고, 한곳에 머물지 못하며, 고향이 없는 사람들 같다.
아무도 나를 읽을 수 없다네.
달로 이민을 가려고
야곱의 사닥다리를 오르며
죽은 자들과 친구 하고
산 자가 그리우면
산 너머
떡갈나무에게 하소연하는
나는 불운의 연습장
고독의 전단지라네.
_ 시 「시인의 영토」 부분
그의 시에 등장하는 화자들은 “수취인 불명의 편지처럼 나는 이 지상에 안주할 곳이 없”(「강물에 써놓은 말들」)거나, “나는 먼 왕조의 위장 간첩”(「굿모닝 충무로」)이다. 그리고 그들은 “생각이 죄가 되는 시대/나는 어둠과 말다툼을”(「외눈박이 거인의 나라」)하거나 “경찰에게 잡히기 전에 빨리 어딘가로 가야겠다, 경찰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 죄가”(「작은 새, 나의 작은 새여」)된다고 말한다. 도대체 이 화자들이 말하는 세상이란 어떤 풍경일까.
노래방에서 밤새 일하는 누이에게
서정시란 몇 푼어치의 위안인가?
아침이면 잠이 오지 않는다며
폐가가 허물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전화를 하는
누이에게 서정시란 무엇인가?
오빠, 나한테 인간이 되라고 하지? 그런 말 하지 마. 나는 종말론자야. 허공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내일은 없는 거야. 영혼을 모두 돈에 팔아버렸거든. 밤은 나의 대륙이고 나는 종말의 박물관이야.
나는 홀로 우체통처럼 빨개져서
할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시부렁대는 시계를 바라보며
서정시 같은 말을 뱉는다.
너에게 시집을 보낼게. 네 밤을 지켜줄 거야.
오빠, 시가 밥 먹여줘? 오빠도 알지. 내 꿈이 투우사라는 거. 커다란 경기장에서 카포테를 들고 서 있는 투우사 말이야. 여자 투우사!
_ 시 「여자 투우사」 부분
전기철 시인이 바라보는 이 사회는 ‘시가 밥을 먹여주지 못하는 사회’이자 한마디 위로의 말이 단지 ‘서정시 같은 말’이 될 뿐이다. 그런 사회에서 서정시를 쓰는 시인의 존재 가치는 사라져버린다. 가장 섬세한 사람의 마음결을 어루만지는 것이 시(서정시)라고 할 때, 그런 시가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하는 세상은 참으로 견디기 힘들고 서글픈 세상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람의 마음에 가장 큰 평화와 위안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
그런데 오빠, 밤마다 야근을 하는 달은 시급이 얼마나 될까?
나 같은 년의 아픔 때문에 지구가 무거워지면 안 되는데……. 그치, 오빠!
그 순간
투우사의 칼이
나의 시
한복판에 박히는 것을 보았다.
_ 시 「여자 투우사」 부분
시 「여자 투우사」에서 밤새 노래방에서 일을 하는 누이의 꿈은 여자 투우사다. 그녀에게 서정시는 한낱 사치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시를 가만히 읽어보면 이 ‘누이’가 불행해 보이는 이유는 그녀가 단지 돈이 없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녀에게 ‘서정시’라 할 수 있는 ‘꿈(여자 투우사)’이 영영 꿈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꿈을 가진 가난한 자들에게 이 사회는 그저 넓고 넓은, 결코 그곳을 빠져나갈 수 없는 커다란 감옥과 같다.
‘유년의 대륙’과 무용(無用)의 가치
전기철 시인의 이번 시집은 내용이나 형식적인 면에서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불우한 가족사부터 내면의 갈등 그리고 정치 문제까지 실로 광범위한 주제들은 그의 시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 혹은 음악이나 작품들을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 시집을 통해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것이 바로 브레히트와 유사한 시적 발상이다. “이 바보 같은 사회에서/서정시는 무슨 소용이 있는가?”(「여자 투우사」)라는 자조는 “나의 시에 운율을 맞춘다면 그것은 내게 거의 오만처럼 생각된다”는 브레히트의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의 절규와 상통한다. 시인의 이와 같은 절규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인간의 이기적인 삶에서 비롯된, 척박한 세상에 내던져진 우리의 자화상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바람이 어둠과 범벅이 되어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거리에서
떨고 있는
나의 누이, 플라타너스여,
아직 나는
유년의 대륙을 찾지 못해
고독을 어깨에 짊어지고
증오를 직업으로 삼은 채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왜 이렇게
그리움은 쉽게 마모되고
희망은 마약인가.
가진 자들이 사이코패스가 되어 눈을 부라리는
엄혹한 세상에서
나는 저주받은 시나 쓴다.
나의 누이, 플라타너스여,
내 유년의 대륙으로 가고 싶다.
그곳에 가서
쓸모없는 나무가 되고 싶다.
_ 시 「플라타너스」 부분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를 추모하는 형식으로 쓰인 이 시에서 시인은 그리움의 공간이자 희망이 살아 있는 곳으로 ‘유년의 대륙’을 그리고 있다. 그곳은 때 묻지 않은 곳이라는 점에서 예이츠의 시 「이니스프리의 호도」의 이니스프리와 같은 성격의 공간이기도 하다.
시집의 해설을 쓴 우대식 시인은 “저주받은 시를 쓸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때 묻지 않은 유년의 대륙에 가서 ‘무용지목(無用之木)’이 되고 싶다는 욕망은 그가 투신한 문학의 한 정점을 보여준다”고 했다. 다시 말해 문학의 현실적 무용(無用)이 가장 훌륭한 문학의 쓰임이라는 아이러니에는 문학에 전적으로 투신한 전기철 시인의 욕망과 좌절이 음각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특히 이 시의 마지막 구절, “불평 많은 나의 시를 데리고/이니스프리로 가고 싶다”는 말은 욕망 속에 그의 곤고한 삶과 문학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더욱 뜻깊다.
자기분열적 징후와 그 형식적 실험
시집의 1부와 2부를 통해 아픈 가족사와 자본주의 사회가 일으키는 인간의 내면적 갈등을 그려온 시인은 제3부에 들어 본격적인 형식적 실험을 통해 정치 문제에 대해 날카롭게 접근하고 있다. 이 시들은 역사를 기술하는 한 방법론을 차용하여 세계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있기도 하다. 시 「약 아이」, 「그리고 아무도 오지 않았다」, 「슬픈 피에로」등의 작품이 그것으로 ‘오바마 모년 혹은 이명박 모년 모월 모일’ 혹은 ‘이명박 모년 모월 모일 모시’와 같이 연대를 기록하는 편년체 수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바마 2년 혹은 이명박 3년 1월 4일 폭설이다
거리는 자동차들의 무덤이다. 서울은 모욕을 당했다. 내 안의 괘종시계가 심장을 두드린다. 웅크린 가난에는 귀가 없다. 미국이 벌이는 전쟁으로 아프간에서는 나무들이 레퀴엠을 연주한다고 한다. 인사동에서 인형을 샀다. 나는 소녀의 슬픈 청동 책 속에 인형을 넣어준다. 너무 많은 손들이 들어와 있어 책이 끙끙 앓는다. 나는 맥주로 머리를 헹궜다.
_ 시 「약 아이」 부분
나를 자꾸 추하게 하는 것은 희망이다.
망령들 위에 세운 자본의 도시여!
묘비처럼 우뚝우뚝 솟은 빌딩이여!
나는 기도하는 손을 갖고 싶다.
약이 없으면 견딜 수가 없어요. 세상은 항상 알약처럼 뱅뱅 돌아요.
아버지를 따라간 유곽에서 관음보살의 손을 본 뒤부터예요. 창녀의 하
얀 손이 아버지를 만지고 있었어요. 나는 그 여자의 손을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는데 그때, 홀 한쪽에서 본 관음보살의 손, 손들
_ 시 「나사로의 언덕」 부분
시인은 「약 아이」와 같은 시편들을 통해 세계의 경찰국가임을 자임하는 미국이 오히려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분쟁에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과 우리 사회에서도 용산참사와 같은 처참한 현실이 “한쪽에서는 끝났다고 하고 또 다른 쪽에서는 끝나지 않았다고”(「약 아이」)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고발한다.
제3부에 실린 일부 시편들은 형식적으로 ‘이중주’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형식은 한 편의 시를 읽을 때 어느 하나의 시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한다. 시인은 이러한 의도적인 독서 방해를 통해 일종의 시적(사회적) 분열을 그려내며 시적 의미의 영토를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전기철 시인의 『누이의 방』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그의 시적 토대가 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 노출된 인간성의 자기분열적 징후가 다변화되고 파편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번 시집이 어떤 의미를 획득하는 까닭은 새로운 형식적 실험을 통해 자신만의 치유와 화해의 길을 모색하고 고군분투하는 그 자세 때문이다. 앞으로 그의 시적 행보가 어떤 궤적을 보여줄 것인지 기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추천의 글
이 시집은 ‘그늘’에 관한 비망록이다. “금지곡에서 희망을 찾았”던 제복을 벗은 군인이 다스리는 엄혹한 시절과 “오바마 1년 혹은 이명박 2년” 혹은 “한일합방 100년” ○월 ○일로 독특하게 호명하는 두 시대의 그늘은 거울처럼 서로를 마주보고 길항하고 있거나 현재성을 가지고 오버랩되기도 한다. 시집에 등장하는 비정상적인 시대를 사는 아버지와 아들, 자살한 친구, 떠나간 사랑하는 사람들, 세파 속에 힘겹게 사는 누이 등 허공에 뿌리내리고 사는 사람들은 빗속에서 몸을 터는 개처럼 점점 외로워져 한밤의 체증을 앓는 시인 자신이기도 하다.
생을 도둑질당하고 비명과 불안 속에 헐떡이며 미래를 담보로 잡힌 체증을 오랫동안 가슴에 담고 사는 노련한 환자이기도 한 시인은 “떡갈나무의 나라는 어디쯤 있을까” 하고 어렵게 묻는다. 비명 가득한 출구를 찾기 어려운 시대에 궁구한 끝에 찾은 이 질문 위에서 시인은 아버지의 부재를 딛고 아버지의 전언을 전하는 “발해의 말 장수”로 등장한다. 시리우스(天狼星)가 밝히는 밤하늘 아래 “왼쪽 가슴에 난 창문”을 열고 “안개 자욱한 초원” 발해를 향해 “청동 말”을 타고 달리는 시인이 펼치는 말(馬/言)의 난장을 함께 달릴 이 어디에 없는가.
_ 곽효환 (시인)
1954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1989년 『심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나비의 침묵』, 『풍경의 위독』, 『아인슈타인의 달팽이』, 『로깡땡의 일기』 등이 있다. 현재 숭의여자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제1부 여자 투우사|한여름 밤의 꿈|발해의 말 장수|플라타너스|키치|풀 하우스|풍금|광주|작은 새, 나의 작은 새여|불행해서 기뻐요|약 아이|부러진 봄|마왕|누이의 방|어느 자해공갈단의 고백|낙원시장 89호 금이네 집|휴전선 편지
제2부 강물에 써놓은 말들|천 개의 도시|죽음과 소녀|법주사의 밤|타르코다르 1|타르코다르 2|시인의 영토|수다쟁이 햄릿|몽유병자|침묵|피튜니아|굿모닝 충무로|여름 가족|그리고 아무도 오지 않았다|茶山은 왜 요한을 배반했을까|눈의 변주곡|권태
제3부 슬픈 피에로|태풍|눈 오는 밤|브레히트를 읽는다|떡갈나무의 나라는 어디쯤 있을까|목련|버스 정류장|외눈박이 거인의 나라|나사로의 언덕|양철 지붕의 재잘거림|르누아르|오랑캐꽃|바그다드 카페|새의 초상화
해설 우대식|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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