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의해 채색되지 않은 자연을 노래하다
1984년 창작과비평사에서 발간한 공동시집 『마침내 시인이여』를 통해 등단한 이은봉 시인의 등단 30주년을 맞이하여 발표한 시집이 실천문학사에서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 『걸레옷을 입은 구름』을 통해 시인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지극한 연민과 애정을 변함없이 보여주면서도 꽃, 나무, 돌과 같은 생명과 무생물에서 세상의 근원적인 가치를 발견한다. 한편으로 이미 중년을 넘어서버린 자기 스스로를 발견하며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반성을 하는 내면의 목소리 또한 들려주고 있다.
잃어버린 신의 목소리를 찾아서
시인은 신이 인간에게 전해주는 목소리를 전달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데 현대와 같이 인간에 의해 자연이 파괴되고 유린된 세상에서 신의 음성은 어디에 남아 있을까?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문명의 방자하고 잔혹한 마수를 보면서 이 물음에 선뜻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오늘 구름은 고름 덩어리, 걸레옷을 입은 구름은 제 뱃속 가득 납과 수은과 카드뮴을 감추고 있다
이제 내 숨결은 달에게로 가지 못한다 달의 숨결도 내게로 오지 못한다
(중략)
기름때에 찌든 걸레옷을 입은 채 나와 달 사이에 철판 세우고 있는 저 구름을 어쩌지
끝내 바람이 구름의 걸레옷을 벗기지 못하면 누구도 잠들지 못한다
하느님조차도 눈 부릅뜬 채 몇 날 몇 밤을 깨어 있어야 한다
잠들지 못하면 어떤 영혼도 바로 숨을 쉬지 못한다 그렇게 죽는다.
_ 시 「걸레옷을 입은 구름」 부분
시인은 자연과의 교감을 원한다. 불안한 불면의 밤을 지내며 달과의 교신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하지만 구름은 고름덩어리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걸레옷을 입고 온갖 중금속을 내장에 감추고 있을 뿐이다. 바람이라도 불어와 오염된 구름의 걸레옷을 벗겨주면 좋겠는데 바람도 제구실을 못하고 있다.
“잠들지 못하면 어떤 영혼도 바로 숨을 쉬지 못한다 그렇게 죽는다”라는 시인의 말은 생태계 파괴의 실상을 차갑게 반영한다. 이미 우리 사회는 새만금이나 4대강과 같이 개발 논리 아래 수많은 목숨을 잃어간 자연 파괴의 모습을 목도해왔다. 자연의 다른 이름은 생명일 것인데, 우리가 목격하는 자연은 이제 더 이상 생명을 잉태하지 못할 만큼 파괴되어가고 있다.
생명의 온기를 품은 인간으로 돌아가는 길
살아 있다고? 지금, 아직, 정말?
그렇다니까 팽팽하게 살아 있다니까
(중략)
손가락 끝에서는 날카로운 손톱이
발가락 끝에서는 뭉툭한 발톱이
크고 있다니까 자, 나를 좀 보라고
머리에서는 머리카락이 자라고 있잖니
저 주검들 말이야 저 시체들
생의 오랜 껍질들이지 네 몸에도
이처럼 죽음이 살고 있다니까
삶이 곧 죽음이잖아 이미 죽음이
여기저기 도사려 있다니까
_ 시 「살아 있는 죽음」 부분
때로는 생명의 환희가 아픔으로 다가오고 생명의 찬란한 의미를 완전히 체감하지 못하는 미완의 상태에 있더라도 자연성을 회복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생명이 피어난 곳이 자연이고 죽어서 육신이 돌아갈 곳도 자연이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죽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 점에서 우리 몸에는 이미 수많은 죽음들이 내포되어 있다. 죽음과 삶이 공존하며 그 둘의 관계가 무한히 반복되는 것이 생명현상이고, 죽음과 삶이 결합되어 있는 공간이 바로 생명체이다. 이러한 인식은 자연 훼손과 생태계 파괴를 단순한 죽음으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생명의 기원’을 탐색하는 자세를 갖게 한다.
생명의 기원. 이것은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철학적 탐색의 출발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서 시인은 “생명의 알”(「生의 알」)을 상상한다. 껍데기가 깨어져야 생명체로 태어나는 알. 알에서 태어나는 생명체는 껍데기가 깨지는 아픔이 있고 껍데기에서 벗어나 홀로 나아가야 할 외로운 슬픔의 길이 있다. 알에서 태어났다가 다시 알을 낳는 생명의 순환은 생의 아픔과 슬픔을 숙명의 형태로 끌어안는다.
천둥이 치고 번개가 쳐야 生의 껍데기는 깨지지 生의 껍데기가 깨져야 알은 태어나지
生의 알…… 알에서 태어나는 生은 외롭지 슬프지 아프지
바퀴가 달려 있기 때문이지
바퀴는 돌고, 도는 바퀴의 축에는 ‘떠돌이’라는 굵은 글씨가 새겨져 있지
더러는 ‘나그네’라는, 더러는 ‘낙타’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기도 하지
‘아버지’ 혹은 ‘고향’ 따위의 글씨는 새겨져 있지 않지
바퀴가 달려 있는 알의 生, 한번 구르기 시작하면 글씨는 금세 사라지지
구르는 알의 生은 하나의 까만 점, 멈출 줄 모르지
멈추면 흙 속으로, 대지 속으로 아름답게 미끄러지는 거지 어머니의 자궁 속, 딱딱한 알의 껍데기를 뒤집어쓰는 거지
껍데기를 깨고 다시 밖으로 튀어나올 때까지는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바퀴는 구르지 구를수록 눈덩이처럼 커지며 신화와 전설을 만드는 알의 生
끝내 저를 깨뜨려 밖으로 튀어나오는 알의 生, 때가 되면 그도 멈추기 마련이지 바퀴에 구멍이 나기 마련이지
같으면서도 다른 生이 시작되는 거지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生……
아들의 生도 마찬가지지 그 또한 새로운 바퀴를 단 채 앞으로 달리지
그렇지 모든 생은 다 달리지 달리는 生은 외롭지 슬프지 아프지.
_ 시 「生의 알」 전문
우리의 삶은 아픔과 슬픔이 맞물려 돌아가는 바퀴와 같다. 인간은 태어난 곳을 떠나 거친 세상을 떠돌고 먼 세상을 헤맨다. 떠돌고 헤매다 어느 자리에 이르러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알을 낳는다. 새롭게 태어난 알 역시 그 부모가 그러했던 것처럼 보이지 않는 앞을 향해 나아간다. 세상에 태어난 생명체의 순환이 이러하다. 그렇게 생명의 순환이 일어나고 인간의 일이 이어지고 역사가 전개된다. 그래서 모든 생은 앞을 향해 달리게 되어 있고 달리는 생은 모두 외롭고 슬프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생의 아픔과 슬픔을 존재의 징표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잡다한 고난을 넘어설 수 있게 된다. 자연 파괴의 실상에 마음이 시달려 우울과 번민에 휩싸이는 데서 벗어나 자연의 내부로 들어가 아직 생명의 온기를 유지하고 있는, 때로는 생명의 불꽃을 키우고 있는 작고 순연한 생명체들의 눈부신 아름다움을 정밀하게 바라보는 눈이 열리게 된다.
생명의 근원적 가치를 발견하는 눈
인간보다 적응력이 강하고 질긴 생명력을 가진 생명체들은 생명이 깃들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스며들어 생명의 기운을 발동시킨다. 눈에 잘 띄지 않는 미물이라 할지라도 그들 속에 내장된 생명의 신비는 우리에게 신의 몸놀림을 보여주고 신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옛집, 무너진 담벼락 아래
함부로 흩어져 있는, 블록 벽돌 속
너무도 익숙한 텃새 두 마리
번갈아 드나들고 있다
날카로운 부리에는
메뚜기, 잠자리, 풀여치 따위
죽어도 좋다, 온몸 파닥거리며
꽈악, 물려 있다
거칠 것 없는 햇살들
두충나무 넓은 이파리를 뚫고
팍팍, 터져 내리는 늦여름 오후,
샛노란 새끼들의 주둥이
드높은 하늘을 향해
쫙쫙, 벌리고 있다
목청을 높이고 있다
짜식들, 발가락까지 샛노랗다
옛집, 허물어진 담벼락 아래
멋대로 나뒹구는 블록 벽돌 속
거기, 집의 집 있다
쪼르르, 찍찍, 짹짹
찌르르, 뽀짝뽀짝, 뽀오
어린 신의 목소리 즐겁다.
_ 시 「집의 집」 전문
다 무너진 옛집 깨진 벽돌 사이에 둥지를 튼 텃새 두 마리가 번갈아 먹이를 물어 새끼들의 주둥이에 넣어준다. 겉으로 보면 담벼락 허물어지고 블록 벽돌 함부로 뒹굴고 있어 폐허 같아 보이지만 이 텃새 가족에게는 더없이 아늑하고 소중한 보금자리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을 지금까지 인간의 관점으로만 보아온 데 대해 반성할 필요가 있다.
시인은 또 다른 시 「막」에서 자귀나무 꽃잎과 자신 사이에 아무런 경계가 없다고 노래한다. “내가 자귀나무 분홍 꽃잎에게로 건너가 자귀나무 분홍 꽃잎으로 피어오르더라도 누구 하나 아프지 않다”라는 그의 말은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인가. 자귀나무 분홍 꽃잎과 하나가 되어 건들바람을 따라 살랑대고 겨드랑이 아래로 푸른 꽃망울을 밀어 올리고 성숙의 계절을 따라 사랑의 열매가 익어간다. 시인 그 자신이 자귀나무가 되고 자연의 일부가 되어 깊고 아름다운 마음에 동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연은 실로 다양한 문양으로 우리 인간에게 기호와 문자를 드러내고 있다. 이 기호와 문자를 읽는 일이 시인의 임무이다. 올해로 등단 30년을 맞은 노시인은 이번 시집의 말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세상에 나온 지 60년, 시단에 나온 지 30년이다. 하지만 마음은 아직 한여름의 초록 숲길을 걷고 있다. 물론 머잖아 내게도 풍성한 가을의 들판이 펼쳐지리라, 나뭇가지 앙상한 겨울의 숲이 찾아오리라.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내게 무슨 다른 길이 있나? 순수하고,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죽음의 벼랑에 이를 때까지 시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수밖에.”
나이가 들수록 인간성을 지키며 살기가 어려운 세상에서 불순과 허위, 가식으로부터 인간의 본성을 잃지 않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자연을 마음에 품고 사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집은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필요한 자연의 몸짓을 담은 몇 안 되는 소중한 자산이다.
§. 추천의 글
이은봉 시인의 이번 시집에는 「민들레꽃」, 「주산리 꽃잔치」, 「일림산 철쭉」, 「산수유 노란 꽃」 등 꽃을 소재로 한 시들이 유난히 많다. 그래서 그런지 시의 분위기가 어둡거나 구질구질한 구석이 없다. 전체적으로 밝고 환하다. 그런 점은 이 시집의 전반부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대체로 시 하면 일단 엄숙하고 처연한 얼굴을 하고 대하게 마련인데, 이은봉 시인의 시를 읽다 보면 안 그래도 되니 시를 읽는 즐거움이 배가된다. 어쩌면 이 시인은 시와 삶의 가치를 아름다움, 따스함, 향기로움, 눈부심 같은 데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이 시인의 시를 읽으면 내내 즐겁다. 마치 노란 부리의 조카 놈들, 제수씨들, 형제들, 어머니가 한데 어울려 펼치는 민들레꽃, 제비꽃, 벚꽃 등의 꽃잔치에 초대되어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느낌이다. 아마도 이는 그가 시를 통해 우선 생명의 활기를 노래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_ 신경림 (시인)
§. 시인의 말
자연은 섬세하고 다양한 문양이다.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세상에 많은 자취와 흔적을 남긴다. 이때의 자취와 흔적을 이미지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자연이 만드는 이미지는 일종의 기호이고 문자이다. 이때의 기호와 문자는 즐거운 콧노래를 담기도 하고, 서러운 웅얼거림을 담기도 한다. 지금은 고통의 신음을 압축하고 있어 세상을 아프게 하지만.
바뀌고 변하는 자연이 만드는 기호와 문자…… 이때의 기호와 문자를 바로 읽는 일이 시인의 임무이다. 물론 이들 기호와 문자를 바로 읽는 일은 어렵고 힘들다. 신호이기도 하고 암호이기도 한 자연의 언어…….
자연의 언어는 신의 언어이다. 신의 언어는 진리의 언어이다. 진리의 언어를 바로 읽으려면 신의 눈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자연의 질서와 혼돈을 읽을 수 있다. 자연의 질서와 혼돈은 크고도 작아 쉽게 포착되지 않는다.
자연의 언어에는 삶의 언어도 포함되어 있다. 삶의 문양이 만드는 진리들…… 이 시집에는 삶의 문양이 만드는 진리들에 대한 독해도 들어 있다.
세상에 나온 지 60년, 시단에 나온 지 30년이다. 하지만 마음은 아직 한여름의 초록 숲길을 걷고 있다. 물론 머잖아 내게도 풍성한 가을의 들판이 펼쳐지리라, 나뭇가지 앙상한 겨울의 숲이 찾아오리라.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내게 무슨 다른 길이 있나? 순수하고,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죽음의 벼랑에 이를 때까지 시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수밖에.
_ 이은봉
이은봉
1953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1984년 창작과비평사에서 발간한 공동시집 『마침내 시인이여』를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좋은 세상』, 『봄 여름 가을 겨울』, 『절망은 어깨동무를 하고』, 『무엇이 너를 키우니』, 『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 『길은 당나귀를 타고』, 『책바위』, 『첫눈 아침』 등이, 평론집으로 『실사구시의 시학』, 『진실의 시학』, 『시와 생태적 상상력』, 『화두 또는 호기심』 등이 있다. 한성기문학상, 유심작품상, 가톨릭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 차례
제1부 저 산수유꽃|민들레꽃|봄 들판|봄꽃들|주산리 꽃잔치|나바위성당|오월이라고|늦봄|강아지풀|상수리나무들아|뻐꾸기 울음|낮달|참나무들|집의 집|여름비|담쟁이넝쿨|저 석양|바다
제2부 늦여름|봄밤|발목 잡힌 봄|산벚꽃|벽오동나무|빗방울들|오류동 빈터|여름, 쌍봉사|고구마 밭에서|상강(霜降)|옛 마을을 향한 내일의 노래|단감 몇 개|밤안개|폐타이어|막|生의 알|솔바람 소리|살아 있는 것들의 집
제3부 결석|고슴도치 봄밤|꾀꼬리 달|옛집|일림산 철쭉|금잉어들|안마사|셋집|기상대|날이 흐려서|시체 창고|생명의 집|물로, 바람으로, 씨앗털로|물의 비밀|달의 가출|죽음들|걸레옷을 입은 구름|살아 있는 죽음
제4부 산수유 노란 꽃|백양사 숲길|설악, 소식|춘양 가는 길|구름 묘지|고리|구절초 꽃술|삼척 바다|무등산|돌 속의 집|오늘 치의 죽음|숲의 식구들|나는 물이다|오이|빈집|너무 오래 걷는 일을 잊고 살았다|무등산|지구 밖에서
해설 이숭원|시인의 말
'신간안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국진 <옛 그림으로 떠나는 낚시 여행> 2013-06-28 (0) | 2013.07.30 |
---|---|
김형주 <빨대들> 2013-06-28 (0) | 2013.07.30 |
계간 실천문학_2013년 여름호 (0) | 2013.07.30 |
최성수 <청소년을 위한 고전산문 다독다독> 2013-05-30 (0) | 2013.07.30 |
하상만 <과학실에서 읽은 시> 2013-05-07 (0) | 2013.0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