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쟁이/담쟁이 어린이

이미영 장편동화 - 미순이 (2010)

실천문학 2013. 7. 30. 13:53

 

 

 

   

 

 

 

동시집 시리즈를 선보이며 아동문학 시장의 지평을 넓혀왔던 실천문학사가 본격적으로 아동문학 출판을 시작한다. 공상과 환상의 세계, 번역물이 주류를 이루는 작금의 동화판의 시류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로서의 ‘반동화’를 지향, 동어반복, 고정관념을 벗어던진 ‘담쟁이어린이’의 느리지만 믿음직스러운 행보가 기대된다. 앞으로 실천문학사가 펴낼 아동문학시리즈 ‘담쟁이어린이’는 꾸밈없는 동심과 현실에 밀착한 이야기들을 펼쳐 보일 것이다.


외로움과 외로움이 그리움과 그리움이 만나 빚어낸, 건강한 삶 그리고 나눔의 철학
"오랜만의 현실주의 동화의 출현!"


독특한 소재와 상상력을 강점으로 내세우는 근간의 동화들에 비추어 보면 『미순이』가 담고 있는 이야기는 오히려 너무나 사소한 일상들로 이루어져 있다. 미순이는 다락방에서 공상과 독서하기를 좋아하지만 이 이야기 속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을 펼치지 않는다. 오히려 지극히 천진한 시선으로 식구들과 친구들,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며 세심하게 스케치해낸다. 특히 아이들의 입을 타고 흘러나오는 옛 유행가들, 사람들이 모여 앉아 시청하는 이산가족 프로그램, 거지와 망태아저씨가 아이들의 관심사인 마을 정경 등 한국전쟁의 상흔이 아직 삶의 터전 곳곳에 남아 있는 1980년대를 『미순이』는 꼼꼼히 복원한다.

그러나 도시화, 산업화를 거치면서 심화된 빈부의 격차는 삶의 근간인 가족공동체부터 파괴하였고 다른 형태의 이산가족이 늘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적 배경을 훌쩍 뛰어넘는다. 한국전쟁 때 잃어버린 아들을 평생 가슴에 묻고 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돈 벌러 외지로 나간 아빠 엄마를 그리워하며 조부모님 밑에서 자라는 아이의 이야기를 어느 누가 옛날이야기라고 말하겠는가. 『미순이』가 담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정서는 ‘기다림’, ‘그리움’이고 이는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는 것이다.

작가는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떨어져 사는 마음을, 서투르지만 차곡차곡 꼼꼼히 적고 싶었다고. 부모님과 떨어져 살면서 외로움과 그리움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미순이는 아동문학가 강정규 선생의 말처럼, 그렇지만 언제, 어디서, 누구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며 건강하다. 아빠가 없는 무지개 다방 집 유진이, 아들을 잃은 할머니, 가족을 잃은 거지 달근이가 미순이와 함께 빚어내는 온갖 에피소드는 슬픔이 수렁에 빠지지 않고 다른 슬픔과 만나 힘이 되는 건강한 삶을, 나눔의 철학을 보여준다. 가난한 삶에 밀착한, 관찰과 경험이 잘 버무려진 작가의 넉넉한 시선이 따뜻하다.



개성 강한 캐릭터들, 그리고 '달근이'와 '밥'으로 읽는 『미순이』

한때 노름쟁이 술꾼에 예능인의 자질까지 충만했지만 이제는 밥그릇도 똥기저귀도 훌떡 패대기치는 아기가 되어버린 할아버지, 남편에게 욕을 하면서도 사랑을 다하는 욕쟁이 할머니, 조카랑 나눠 먹는 게 아까워 불을 끈 방 안에서 혼자 과자를 먹는 철없는 삼촌, 인형처럼 예쁘고 공부도 잘해서 미순이와는 영 딴판인 것 같지만 마음만큼은 미순이와 찰떡궁합인 유진이, 먼저 시비를 걸지만 늘 미순이에게 된통 당하고 먼저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전당포집 아들 왕남이……, 하나같이 개성 강한 캐릭터들 중 단연 돋보이는 이는 달근이다. 미순이의 아버지뻘 되는 거지 달근이는 미순이네 식구들에게 특별한 보살핌을 받고 있는데, 강정규 선생은 여기에 덧붙여 『미순이』의 중심축은 어쩌면 ‘달근이와 밥’일 것이라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전쟁 때 잃은 아들이 생각나, 떠돌이 달근이를 처음 거둔 사람이 할아버지이고, 할아버지가 풍으로 쓰러지면서 할머니가 바통을 이어받고, 뒤이어 미순이가 달근이의 깡통에 밥을 쏟아 넣는 것이다. 첫 장에서 달근이한테 놀라 오줌을 싸고, “거지새끼!”라며 된통 화풀이를 하던 미순이와 남몰래 웃음 지으며 달근이에게 밥을 가져다주는 마지막 장면의 미순이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한편, 재치 있는 인물 묘사와 자연스러운 입체감을 살린 삽화는 천방지축 왈가닥 소녀 미순이의 성장일기를 더욱 생동감 있게 만들어준다. 『미순이』의 그림 작가는 그림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해온 한은옥 씨다. 격월간 『삶이 보이는 창』의 표지그림을 오랫동안 맡아 그려오고 있기도 한데, 『미순이』를 두고 “오랜만의 현실주의 동화의 출현”이라며 반긴 노경실 작가의 말도 있거니와 글에 꼭 맞는 화가를 만났다는 후문이다.



●줄거리


“싸움대장, 욕쟁이, 악바리…… 천방지축 왈가닥 미순이의 진짜 속마음”

미순이는 엄마 아빠와 떨어져 욕쟁이 할머니, 똥오줌싸개 할아버지, 왕뺀질이 삼촌, 그리고 천사표 작은엄마와 함께 산다. 하지만 불쑥불쑥 심통이 난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있고, 삼촌은 작은엄마가 있고, 마당 연못에 금붕어도 한 쌍인데, 미순이만 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세 한탄만 하기엔 미순이의 일상이 너무 바쁘다. 거지 달근이를 요리조리 엿보다 뒤에서 호통을 치고, 때로는 탐정처럼 망태 아저씨의 뒤를 캐고, 참, 전당포집 아들 왕남이의 딱지 따기도 빼놓을 수 없다.

미순이의 가장 친한 친구는 유진이다. 유진이는 무지개 다방 마담의 딸이다. 고아에 거짓말쟁이라고 놀려대는 짓궂은 남자애들 때문에 곤경에 처한 미순이를 도와주면서 친해졌다. 예쁘고 똑똑한데다 착하기까지 한 유진이가 미순이는 정말 좋다.

어린이날 소원하던 초콜릿을 사다주고 언제나 마지막엔 미순이 편을 들어주는 할머니는 미순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다. 노래를 잘하고 특히 글씨를 잘 쓰던 할아버지는 몸이 불편해 누워만 계시는데 한 번씩 화가 나면 밥상을 뒤집어 할머니를 화나게 하고 애먼 미순이까지 혼나게 만든다. 그래도 미순이는 건강하실 때, 술 드시고 들어와 미순이와 놀아주던 할아버지 생각이 나 그런 할아버지를 미워할 수가 없다. 한국전쟁 때 피난 중에 잃어버린 아들, 미순이에게는 삼촌이 되는 ‘광호’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얼마나 큰 한으로 남아 있는지, 얼마나 큰 상처인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느 날, 어른들 이야기를 우연히 엿듣게 된 미순이는 유진이에 관한 비밀을 알게 된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 비밀이 미순이는 어쩐지 불길하다. 그리고 곧 미순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큰 슬픔이 닥친다. 싸움대장에 욕쟁이, 악바리, 천방지축의 철없는 소녀, 하지만 어느 누구보다 속 깊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미순이는 이 슬픔을 어떻게 이겨낼까.



●본문에서

지금, 여기서 콱 죽어 버릴까? 어린이날 초콜릿 하나도 먹지 못하고 죽은 아이……. 할머니는 후회할 거다. 그깟 초콜릿 하나 사 주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가슴 아파하면서. 하지만 때는 늦었다. 난 이미 하늘나라로 갔으니까. 그깟 돈이 뭐라고 엄마 아빠는 나를 이렇게 혼자 버려두는 걸까?
5월 5일은 어린이날이다. 푸르른 우리들의 날이란 말이다. 그런데 엄마 아빠는 올 생각을 안 한다. 봄이 오면 데려간다는 말만 할 뿐, 도무지 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밉다, 모두 밉다._본문 12쪽

좋은 기회다! 왜냐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빨간 모직치마를 입을 수 있는 순간이 지금 온 것이다. 할머니는 내가 그 옷만 입는다면 난리를 친다. 치마가 짧아 똥구멍이 보인다나 어쩐다나. 조금 낀다. 살이 쪘나? 할머니 말처럼 짧기도 하고. 그래도 입을 테다, 입고 꼭 유진이네 갈 거다! 마지막으로 하얀 양말을 신는다. 그런데 구두가 없다. 누렁이 새끼가 물어뜯어 놓지만 않았어도……. 지금도 분하다. 삼촌 말대로 보신탕을 만들 수도 없고. 대신 운동화를 걸레질한 후 신는다. 괜찮다, 이 정도면 제법 어울린다. _본문 66쪽

휴, 난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아이다. 성적도 거지발싸개로 받아 엄마 아빠도 만날 수 없다. 백 점만 받아 오면 자장면을 사 준다고 아빠가 약속했었는데……. 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딸이 이렇게 공부를 못하니 얼마나 부끄러울까. 이래서 내가 할머니 삼촌에게 구박받는 건가?
욕쟁이 할머니, 똥오줌 못 가리는 싸개쟁이 할아버지, 왕뺀질이 삼촌, 그리고 천사 작은엄마……. 모두 우리 가족이지만 어쩔 때 난 모두가 싫어진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있고 삼촌은 작은엄마가 있다. 모두, 짝이 있다. 근데 나만 없다. 언니도 오빠도 동생도 없다. 달랑 나 혼자다.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어쩔 수 없다. 할머니 말대로 이게 내 팔자일지 모르니까. _본문 130~131쪽

글 _이미영
1973년 서울 휘경동에서 태어났습니다. 2001년에 프랑스 작가 세르쥬 뻬레즈의 『당나귀 귀』를 만나면서부터 동화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습니다. 계간 『시와 동화』에 단편동화 「집으로 가는 길」과 장편동화 「2424」를 발표했고 지금은 ‘서울동화학교’ 벗들과 함께 동화를 쓰고 있습니다.

 

그림_ 한은옥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연극무대미술, 포스터, 벽화, 학습지의 삽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그림을 그려왔습니다. 그림을 그린 동화책으로 『해님이 다시 왔어요』, 『노래하지 않는 새』, 『원숭이 꽃신』이 있습니다.

 

달근이 / 종숙이 / 똥간 / 할아버지는 안 죽는다 / 작은엄마 / 인형처럼 예쁜 아이 / 보고 싶은 마음 / 딱지 / 오이 밭 /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 꽃 피는 봄이 오면 / 귀신 방귀에 쌈 싸 먹는 소리 / 뭐가 불쌍해? / 사람들은 모른다 / 망태 아저씨 망태 속 / 자꾸 눈물이 난다 / 할아버지의 밥 / 봄날의 제비처럼 / 작가의 말 / 추천의 말

 싸움대장에 욕쟁이, 악바리, 천방지축의 철없는 소녀, 미순이는 이 슬픔을 어떻게 이겨낼까. ―― 조정진 기자, 세계일보(2010. 9. 24. )
 할머니와 함께 사는 왈가닥 미순이 ―― 김희돈 기자, 부산일보(2010. 9.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