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교양선/여행서

금강산유기 (1998)

실천문학 2013. 7. 30. 14:50

 

 

 

   

 

 


춘원 이광수가 1992년 문예지에 연재했던 금강산 기행문. 한국전쟁으로 훼손되기 이전의 금강산 풍경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이광수의 손으로 그려진 한 위대한 자연에 대한 이 비망록이 우리에게는 훼손되지 않은 금강산에 대한 '조선의 마지막 풍경'이요, '근대적 지식인이 본 첫 풍경'으로 남겨졌다. 금강의 심연을 다시 체험하고픈 이 시대의 정신적 주체들이 애독할 만한 책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금강산을 마음의 성지로서 숭배해 왔고, 당대의 시문가 치고 금강산을 노래하지 않은 자가 드물었으니, 근대 서사문학의 ‘문체’와 ‘규범’을 틀 지었다는 대문호 춘원 이광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금강산유기』는 1922년 문예지 《신생활(新生活)》에 연재한 것으로, 단행본으로는 1924년 시문사에서 처음 출간되었다. 춘원은 소설, 평론 등에서와 마찬가지로 기행문에 있어서도 신문학의 개척자라 할 수 있다. 기행문 속에 시조를 섞는 것도 타 기행문과 전혀 다른 새로운 시험으로 보인다.
금강산은 우리 민족의 정신을 어르고 기른 위대한 장소이다. 『금강산유기』를 쓴 동기에 대해서 이광수는 “위대, 장엄한 자연 속에서 내 영의 세례를 받자, 지리멸렬한 인격의 통일을 얻어보자, 직접으로 천공의 계시를 들어 나의 일생의 진로를 정하자…”라고 했다. 불행하게도 우리 민족의 가슴에 전해오던 바 그대로인 금강산은 그가 마지막 체험자가 된 게 아닌가 싶다. 결국 이광수의 손으로 그려진, 한 위대한 자연에 대한 이 비망록이 우리에게는 훼손되지 않은 금강산에 대한 ‘조선의 마지막 풍경’이요 ‘근대적 지식인이 본 첫 풍경’으로 남겨진 것이다.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인 이광수의 눈에 비친 금강산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광수가 금강산을 찾은 것은 두 차례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한 번은 1921년 8월 3일 병을 앓고 난 아내와 함께 기차를 타고 철원을 거쳐 고산역에서 내려 장안사에 도착, 8월 8일 망군대, 10일 만폭동, 11일 비로봉에 올랐다가 다시 장안사로 돌아와서 12일에 자동차로 세동으로 가서, 온정령을 넘고 만물초를 만난다. 이 숨찬 초행길은 8월 15일 구룡연에서 끝난다. 두번째는 1923년 여름방학이었다. 원산, 장전을 거쳐 신음사 보광암에서 자고 유점사, 은선대, 미륵봉, 안무재 등 까다로운 코스를 거치고, 다시 비로봉을 넘어 장안사로 내려왔다가 이튿날 백탑동을 도는 것으로 여정을 마친다.
“과연 험합니다. 계곡물을 따라가다가 막히거든 기어오르고, 비탈길로 비스듬히 붙어 가다가 막히거든 바위벽을 간신히 기어오르거나 혹 심한 데는 다래덩굴에 매달려 오릅니다. 십수 걸음 앞에 가는 사람도 소리만 들리고 모양은 안 보이며, 훨씬 앞에 가는 사람이 ‘웨이’ 하고 외치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내려옵니다. 혹시 4, 5인이 일렬에 서서 담벼락을 기어오를 때에는 앞 사람의 발 뒤꿈치가 뒷사람의 코에 닿습니다. 게다가 지난밤에 비를 맞은 길이라, 가다가도 미끄러지고, 섰다가도 미끄러지고, 앉았다가도 미끄러질 지경이외다. 우거진 잡목 숲에서는 매미 소리가 납니다. 이제는 저 천길 만길 밑에 흐르는 물소리도 안 들리고 얌전한 다람쥐가 겁도 없이 길로 뛰어 지납니다. 참말 험난하고 위태로운 길이외다. 인생의 행로난(行路難)을 생각게 합니다….” 도솔암을 가는 길목을 그린 부분이다.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장안사며 유점사 등 금강산을 훼손되기 전인 6.25 이전 모습으로 만날 수 있어 흥미롭다.
훼손되지 않은 금강산의 형상이 근대적 언어로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기행문은 우리 시대와의 오랜 불화를 씻고 다시금 행복한 재회를 기다려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남북은 시간적으로 남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남이 되었다. 역사적 종교적 철학적 단절을 통해 우리는 이미 그것을 상실한 지 오래지만, 아직도 우리와 금강산 간에 좀더 심원한 관계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 우리들 마음속의 금강산을 향한 유실된 길을 다시 찾을 때, 바로 이 기행문이 그 회귀의 입구가 되지 않을까?

 

이광수(李光洙, 1892~?)
호는 춘원(春園). 평북 정주(定州) 출생이다. 메이지 학원에 편입하여 공부하면서 소년회(少年會)를 조직하고 《소년》지를 발행하는 한편 시와 평론 등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입학, 1917년 1월 1일부터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무정>을 《매일신보》에 연재하였다. 1919년 도쿄 유학생의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후 상하이로 망명,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신문사 사장을 역임했다.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을 지내고, 1933년조선일보 부사장을 거치는 등 언론계에서 활약하면서 <마의태자>, <단종애사>, <흙> 등 많은 작품을 썼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보석된 뒤부터 본격적인 친일 행위를 했다. 1939년에는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 회장이 되었으며 가야마 미쓰로라고 창씨개명을 하였다. 8 .15광복 후 반민법으로 구속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했으나 6 .25전쟁 때 납북되었다.

그 밖의 작품에 『윤광호』 등의 단편과 『이차돈의 사』『사랑』『원효대사』『유정』 등 장편, 그리고 수많은 논문과 시편들이 있다.

1. 남대문역에서 고산에
2. 고산역 - 철령관 - 장안사
3. 영원동 - 망군대
4. 만폭동
5. 백운대 - 선암- 수미암
6. 선암
7. 수미암
8. 비로봉
9. 온정령
10. 만물초
11. 구룡연
12. 보광암 - 동석동
13. 유점사
14. 은선대
15. 미륵봉 - 중내원
16. 안무재
17. 백탑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