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교양선/실천신서

문화의 숙명 (2003)

실천문학 2013. 8. 1. 15:34

 

 

 

  

 

 


기어츠는 20세기 후반에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경계를 재정립한 대표적인 인류학자로 손꼽힌다. 철학 및 문학 연구에 바탕을 두고 인류학적인 문화의 개념을 활성화하고 변형시켜 문화가 인문학 분야에도 유관한 개념임을 명백히 밝혔다. 이 책은, 기어츠의 작업을 되돌아보면서 현대적 맥락에서 그의 연구가 지니는 지속적 가치를 고찰한다. 네 분야의 학문을 대표하는 7명의 학자들은 변화하는 시대적 상황에 맞게 문화 개념의 위상을 재정립하는 문제, 현지조사에서 감정이입과 '공모'가 차지하는 비중, 문화와 역사, 인류학과 문학이 서로를 조명해 주는 방식 등의 이론적 ·방법론적 쟁점을 다루고 있다.


최고의 석학들이 조명한 기어츠의 문화이론
인류학이 꽃핀 20세기, 프랑스에서는 레비스트로스의 연구가 문학이론에까지 널리 영향을 미쳤으며, 미국에서는 마거릿 미드, 루스 베네딕트 등의 연구가 학계 및 일반인들에게까지 많은 시사점을 제공했다. 미국에서 이들의 뒤를 잇는 상징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Clifford Geertz)는 레비스트로스만큼이나 그 영향력이 큰 학자임에도 아직까지 국내에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이에 실천문학사에서는 각 분야의 저명한 학자 7인이 기어츠의 문화이론의 의미와 그 영향에 대해 조명한 『문화의 숙명』을 출간하였다.

인류학자 셰리 오트너의 중요한 서론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레나토 로살도, 조지 마커스, 릴라 아부루고드(이상 인류학자), 문학비평가 스티븐 그린블래트, 역사학자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 역사학자 겸 정치학자 윌리엄 슈얼의 논문들을 포함하고 있다. 각계의 정상급 학자들인 이들은 변화하는 시대적 상황에 맞게 문화 개념의 위상을 재정립하는 문제, 현지조사에서 감정이입과 '공모'가 차지하는 비중, 문화와 역사, 인류학과 문학이 서로를 조명해주는 방식 등의 이론적·방법론적 쟁점을 다룬다. 인류학에 관심을 가진 이는 물론, 미시사나 철학·문화이론 등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는 오랜 기다림에 값하는 풍성한 영감의 보고가 될 것이다.

실증주의에 맞설 대안을 인문학과 사회과학에 제시한 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는 20세기 후반에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경계를 재정립한 대표적인 인류학자다. 기어츠는 철학과 문학 연구에 바탕을 두고 인류학적인 문화의 개념을 활성화하고 변형시켜, 인문학에 있어 문화를 핵심적인 위치로 끌어올렸다. 아울러 인류학의 과학화와 법칙화를 강조하는 실증주의적 경향을 비판하며, 인류학은 순수과학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분석의 초점은 가시적 현상 자체가 아니라 이면에 놓인 의미와 상징을 해석해내는 작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다.

상징인류학이라 불리는 그의 작업은 인류학뿐 아니라 광범위한 학문 분야에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20세기 중반까지 당시 사회과학을 주도하던 과학만능주의에 경종을 울리고 오늘날까지 거의 모든 사회과학 분야에서 영향력을 행사해온 중요한 대안을 내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인류학의 위상도 크게 높아졌다. 즉 이색적이고 특수한 학문으로 지식 세계의 한쪽 구석을 차지하던 인류학이 논의의 중심 무대로 자리를 옮겼다. 그의 논문집은 인류학 저술의 귀감으로 인식되면서 인류학계 안팎에서 널리 읽혔으며, 인류학뿐 아니라 역사학, 문학비평, 정치학, 철학 등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인류학을 인문학적 논의의 중심무대로 끌어올리다
기어츠는 문화를 민족지학자가 해독해야 할 '텍스트'와 같다고 보는 새로운 시각을 내세운다. 『작품과 생애』에서 그는 에번스 프리처드, 말리노프스키, 레비스트로스, 베네딕트의 민족지에 나타나는 상상력과 은유를 분석하여, 인류학이란 단지 '글쓰기의 일종'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이는 단 하나의 인류학적 진리 대신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여러 개의 다층적 진리를 성립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류학 분야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중대한 도전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는 인류학의 참신한 시도에 시선을 집중시키는 데 성공했고, 포스트모던 인류학으로 가는 길을 닦았다. 혹자는 그가 선구자에 그치지 않고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의 일부라고 말하기도 한다.
한편 기어츠가 인접 분야에 미친 파장은 해석적 접근법을 통해 다른 문화적 세계를 열 수 있는 방식을 제시함으로써 문학적·역사학적 상상력을 자극했다는 점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이론은 신역사주의 문학비평에 영감을 불어넣었고, 문화사 연구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과 프랑스 문화사 속의 다른 이야기들』 및 이 책의 공동저자이기도 한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의 『마르탱 게르의 귀향』 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기실 1970년대 이후 역사 연구의 한 분야로 등장하게 되는 미시사의 등장은 전적으로 기어츠의 인류학의 성과에 기반해 있다. 기어츠는 문화분석이 의미를 추구하는 해석과학임을 선언했고, 이는 역사학이 과학의 객관적인 방법을 포기할 때 과거를 복원시키면서 과거를 새롭게 상상할 수 있다는 혁신적인 사고를 열어주었다. 또한 인간의 행동이 곧 상징이 되며, 상징이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역사학의 사료범위를 기존의 문서 이외의 것으로 확대시켰다. 결과적으로 그는 인류학이 인문학적 논의의 중심 무대에 등장하도록 해주었는데, 인류학의 역사를 통해 레비스트로스를 제외하곤 다른 분야에 이토록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은 없었다.

클리퍼드 기어츠(Clifford Geertz)
기어츠는 1926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고, 하버드 대학원을 졸업한 후 버클리와 시카고 대학에서 강의했으며, 프린스턴 대학 고등학문 연구소의 사회과학 교수(유일한 인류학자)로 재직했다. 그는 자바, 발리, 모로코 등지에서 현지조사를 수행했고, 종교(『자바의 종교』, 1961), 문화생태학(『농업의 퇴화』, 1963), 근대화(『행상인들과 왕자들』, 1963), 사회사(『한 인도네시아 도시의 사회사』, 1965),
이슬람(『이슬람 관찰』, 1968), 국가의 형태(『네가라 : 19세기 발리의 무대 국가』, 1980), 인류학적 글쓰기(『작품과 생애』, 1988) 등에 대한 중요한 저작들과, 자신의 경력을 회고하는 『사실 이후 : 두 나라, 사십 년, 한 인류학자』(1995), 두 권의 중요한 논문집 『지역적 지식』(1983)과 『철학적 주제에 관한 인류학적 성찰』(2000)을 펴냈다.

셰리 오트너(Sherry B. Ortner/책임 편집자) 컬럼비아 대학교 인류학과 교수. 『의례를 통해 본 셰르파족』(Cambridge, 1978), 『고등종교 : 셰르파 불교의 문화·정치사』(Princeton, 1989), 『에베레스트 산에서의 삶과 죽음』(Princeton, 1999) 등 셰르파족에 대한 민족지적 자료를 문화이론(특히 실천 및 행위력 이론)에 접맥시키는 책을 저술했으며, 『성별 만들기: 문화의 정치와 성애』(Boston, 1996)를 비롯해 여성 문제를 다룬 책과 논문도 많이 썼다. 현재 미국 중산층에 대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스티븐 그린블래트(Stephen Greenblatt) 하버드 대학교 영문과 교수. 『셰익스피어의 협상』을 비롯해서 근대 초기의 문학과 문화에 대한 책들을 저술했으며, 『노턴 셰익스피어 전집』의 책임 편집자이다. 최신 저서로는 『신역사주의의 실천』(공저, Chicago, 2000), 『연옥의 햄릿』(Princeton, 2002)이 있다.

레나토 로살도(Renato I. Rosaldo Jr.) 스탠퍼드 대학교 인류학과 교수. 저서로는 『일롱고트 머리사냥, 1883∼1974』(Stanford, 1980), 『문화와 진리 : 사회분석의 새로운 지평을 위하여』(Boston, 1993[1989』) 등이 있으며, 현재 캘리포니아 주 산호세에 거주하는 아메리카 원주민, 멕시코인, 치카노인의 문화적 시민권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윌리엄 슈얼(William H. Sewell Jr.) 시카고 대학교 정치학과 및 역사학과 교수. 『프랑스의 노동과 혁명』(Cambridge, 1980), 『부르주아 혁명의 수사학』(Duke, 1994)을 비롯해 다수의 책을 썼으며, 현재 역사와 사회이론을 다루는 저서를 집필 중이다.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Natalie Zemon Davis) 프린스턴 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이며 토론토 대학교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미시사의 백미로 손꼽히는 『마르탱 게르의 귀향』(Cambridge, 1983)의 저자로 유명하며, 최근 저서로는 『주변적 여성들 : 17세기의 세 가지 삶』(Harvard, 1995)이 있다.

조지 마커스George E. Marcus) 라이스 대학교 인류학과 교수. 대표적인 저서로는 제임스 클리퍼드와 공동 편집한 『문화 쓰기』(Berkeley, 1986), 마이클 피셔와 공동 저술한 『문화 비평으로서의 인류학』(Chicago, 1986) 등이 있으며, 1992년 이후 시카고 대학에서 출판된 세기말 시리즈를 편집해 왔다. 대표적인 포스트모던 인류학자들 중 한 명이다.

릴라 아부루고드(Lila Abu-Lughod) 컬럼비아 대학교 인류학 및 여성학 교수. 『베일에 싸인 감정』(California, 1986), 『여성의 세계를 쓴다』(Berkeley, 1993)의 저자이며, 『대중매체의 세계 : 새로운 분야의 인류학』(California, 2002)을 공동으로 편집했다.

내용 소개

서론 _ 셰리 오트너
기어츠에게 쏟아진 실증주의적·정치적 비판을 각 논문의 저자가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기어츠적인 문화의 개념이 처한 상황과 앞으로 나아갈 바람직한 방향을 진단하고 있다.

문학과 현실의 교감 _ 스티븐 그린블래트
신역사주의 문학비평의 기수인 저자는 17세기의 유령 소동과 관련된 한 범부의 심문 기록과 『햄릿』을 예로 들면서 문학비평의 현실성 확보에 기어츠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공시적 순간을 떼어내 당시의 심문 기록과 『햄릿』이 서로를 해명해줄 수 있는 방식으로 이용될 가능성을 타진한다. 또한 이러한 문화적 분석을 더 큰 서사 ― 17, 18세기에 국가가 유령 출몰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현상과 중요한 정치적 사건들과의 관련 속에서 "유령의 실체에 관한 지속적이고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는 것 ―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직접적 맥락을 뛰어넘어 그 시대의 사회·정치적 갈등에 깔린 문화적 토대를 열 수 있게 한다.

문화평론가로서의 기어츠 _ 레나토 로살도
기어츠의 글을 난해하다고 여기는 독자들을 위해 지역 고유의 관점, 연구의 맥락, 비교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기어츠의 특징을 개관한다.

기어츠, 문화체계, 역사 : 공시성에서 통시성으로 _ 윌리엄 슈얼
기어츠의 문화론이 공시적인 문화적 관계를 분석해내는 통찰력을 제공함으로써 사회사 연구자들에게 과거 사회의 연구에 인류학적 방법론을 적용할 수 있도록 하였음을 밝히고, 그럼에도 문화적 행위를 일차적으로 생산해낸 역사적 상황 또는 구조화된 사회적 긴장에 대한 이해를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기어츠의 개념들을 생산적으로 수정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종교와 자본주의 재고 : 17세기 유대 상인의 문화 _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
돈의 다중적 의미, 부에 대한 다양한 태도, 명예의 중요성 등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17세기 유대 상인의 자서전을 통해 17세기 유대인들이 삶을 추구하는 방식이 자본주의의 등장을 설명하는 허술한 인과관계 속의 단순한 '윤리'로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저자는 17세기 유대 상인의 문화를 유대인의 본질적 특성 또는 '자본주의 정신'으로 설명하는 좀바르트와 베버식 설명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이들의 삶의 방식은 문화에 바탕을 둔 독특한 행위력과 의도성의 형태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현지조사 여건의 변화와 공모의 개념 _ 조지 마커스
전통적인 인류학 현지조사의 이상이었던 친화성 개념의 허구를 지적하고, 변화한 시대적 상황에 적합한 공모의 개념과 다지역적 현지조사의 틀을 모색한다. 그에 따르면 문화가 특정 지역이나 집단에 내재해 있다는 고전적인 개념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텔레비전의 확산과 문화의 해석 _ 릴라 아부루고드
중층기술의 개념을 확장하여 대중매체와 관련된 특정 지역의 삶을 다루고 있다. 저자는 도시의 여성 극작가가 쓴 이집트의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이 농촌 마을에 거주하는 여성들에 의해 어떻게 수용되고 재해석되는가를 검토하면서, 의미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라는 문화의 개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아울러 텔레비전 연구가, 상아탑에 안주하며 '거창한 단어들'에만 매달리는 인류학이 아니라 우리가 작업하는 세계의 다른 사회적 분야들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인류학을 촉구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현대 인류학의 학문적 관심의 폭과 다양성을 엿볼 수 있는 논문이다.

중층적 저항 : 히말라야 등반을 통해 본 죽음과 행위력의 문화적 구성 _ 셰리 오트너
셰리 오트너는 기어츠가 의미의 문제를 권력의 문제와 대립시켰다는 한계를 지닌 반면, 권력에 초점을 두는 이론들(푸코/사이드류의)은 의미의 문제를 배제함으로써 행위자의 편에 서서 권력의 작용을 해부하는 이론이 바로 그 행위자의 의미 ― 욕구와 의도, 신념과 가치 ― 에 대한 관심을 간과하는 역설을 가졌다고 지적한다. 그는 히말라야 등반을 통해 형성된 사히브 오리엔탈리즘을 예시하고 있다. 여기서 오리엔탈리즘은 삶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규정된 사람들(셰르파들)의 목숨을 계속해서 위태롭게 하고 앗아가도록 하는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메커니즘이 되었다. 저자는 이러한 분석의 필요성에 긍정하면서도 단지 오리엔탈리즘의 작용만을 보여주는 것은 그것이 겨냥하는 사람들의 '삶, 역사, 관습'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에 관심을 갖는다면 '행위력(행위자들은 어떻게 욕구와 욕망, 계획과 전망, 세상에 개입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양식을 만들어내는가)'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입장을 바탕으로 권력과 행위력의 구성이 문화적 관념을 구성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셰르파들은 단순히 권력에 순응하거나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권력을 조정하려고 시도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