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학지식은 자연을 어떻게 그려내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인간의 가치체계나 개념체계는 어떤 방식으로 개입하는가. 과학기술이 사회와 갖는 역동적 상호관계는 어떤 것이며, 과학기술에 대한 가치론적·윤리적 판단은 어떠해야 하는가.
과학, 인문학을 만나다!
고대 그리스에서 철학이 발생한 이래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고 이에 답하는 것은 철학자들만의 고유한 영역이었다. 그러나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더 이상 철학자들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그동안 인문학이 추적해온, 인간 존재에 대한 진리로 향한 길을 찾을 수 있는 실타래의 한쪽 끝은 유전자의 비밀을 나날이 새롭게 밝혀내고 있는 현대 생물학의 손에 넘어간 지 이미 오래다.
과학은 매우 짧은 시간 내에 인문학이 안고 있던 많은 난제들을,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어버린 알렉산더처럼 명쾌하게 해결해냈다. 다윈은 "비비(baboon)를 이해하는 사람은 로크(J. Locke)보다 더 많은 형이상학적 업적을 남길 것"이라고 했으며, 사회생물학이라는 용어를 만든 에드워드 윌슨은 "사회과학은 가까운 미래에 생물학의 한 분과가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과학은 더욱 어려운 문제들을 쏟아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과학의 발전에 따라 새롭게 등장한 인간배아복제 문제, 환경오염 문제, 핵 문제 등은 과학의 영역만이 아니라 윤리, 정치, 경제, 문화, 철학 등 인류의 삶과 관련된 거의 모든 영역에 복잡한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다.
과학이 인문학의 난제들을 해결해내기도 하고, 인문학적 사유와 상상력에 의해 해결해야 할 새로운 문제들을 제기하기도 함에 따라 개별 학문의 경계를 넘어선 학제간 통합연구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이에 실천문학사에서는 복잡한 세계를 통합적이고 총체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의 성과물 중 하나로서 과학과 사회·문화의 관계를 둘러싼 다양한 쟁점을 다루고 있는 『인문학으로 과학읽기』를 출간하였다.
최근 많은 종류의 교양 과학 서적들이 기획 출판되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외국 저작의 번역물이고 또 상당수가 깊이 없는 흥미 위주의 선정적인 책들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에 대중 과학 서적에 대한 독자의 수요가 상당히 높아졌지만 아직 그에 부응할 만큼 과학 저술의 수준이 높지 못함을, 좀더 근본적으로 과학에 대해 독자적으로 사고할 만한 역량이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음을 반영한다.
『인문학으로 과학읽기』는 과학에 대한 깊이 있고 독자적인 사고를 지향한 국내 소장 연구자들이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어보려는 시도이다.
여기에 실린 글들은 파편화된 전문적인 글들이 아닌 통합적인 사유를 위한 진지한 모색의 성과물이다. 개별 과학기술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활동들을 사회·문화적 패러다임 속에서 평가하고 그 대응책을 제시하고 있는 이 책의 출간이 과학과 문화가 서로 겉돌고 있는 우리 사회에 과학을 자기화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메타과학과 과학학
최근 들어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이 급속도로 새롭게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융합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그랬던 것처럼 자연과학 이론이 인문학적 발전에 기여하고 반대로 인문학의 상상력이 과학발견의 새로운 철학적 지평을 열어주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이런 흐름의 대표적인 분과가 과학학(Science of Science)이다. 과학학은 물리학이나 생물학 등의 특정한 대상을 다루는 수준의 과학이 아니다. 그것은 과학들을 다시금 대상으로 삼아 연구하는 메타 수준(Meta Level)의 과학, 즉 과학의 과학이다. 과학철학, 과학사 등을 아우르는 과학학이라는 학문은 과학기술의 문화, 사상, 철학, 역사적 배경을 살피고 이들의 상호 영향관계를 조명하는 새로운 인문학 분야라 할 수 있다.
과학학은 그동안 대학교 학부와 몇몇 대학원에서 꾸준히 연구되어 왔으며 얼마 전 한양대에서는 인문학적 소양을 가진 과학기술자를 양성한다는 목표 아래 이공계 학생들이 필수적으로 수강해야 하는 과목으로 지정한 바 있다. 또한 최근 우리나라 학계에서도 비상한 관심사로 대두되고 있다.
인문학적 상상력과 자연과학 이론의 접목
이 책은 과학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와 쟁점을 망라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과학을 둘러싼 인식론적 쟁점, 과학과 종교의 관계, 생명과학의 윤리적 쟁점, 과학과 동아시아, 우리나라 근대사회에서의 과학 등 과학과 사회가 맺는 관계의 다양한 양상을 접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 내에서 거대하게 성장한 과학은 단편적인 과학상식이나 과학자의 뒷이야기로는 그 전모를 이해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대상이 되었다. 예를 들어 생명 복제를 둘러싼 문제는 윤리, 종교, 생물학, 경제, 정치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쟁점을 이룬다. 이러한 대상을 어느 한 측면을 통해서만 바라본다면 그에 대해 적절하고 공정한 견해를 갖기 어려울 것이다. 이 책은 다양한 각도에서 접근한 과학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이 과학이라는 대상을 전체적이고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해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과학과 인문학은 아직까지 서로 긴장관계에 있는 듯이 보인다. 인간 복제, 맞춤 아기 등과 같이 겉으로 드러나는 과학적 성과들이란 전통적 윤리와 잘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긴장과 갈등이 둘 사이 관계의 전부는 아니다. 인문학과 과학이 서로를 무시하거나 위협하지 않고 상리공생할 수 있는 길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아니, 과학의 내용에 귀 기울이는 인문학자들과 자신의 연구를 음미할 줄 아는 과학자들에 의해 지금도 실현되고 있다.
과학과 인문학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경계인들
일찍이 『두 문화』의 저자, 스노우(C. P. Snow)가 지적했듯이 근대과학이 태동한 17세기 이후 자연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왔다. 게다가 눈부신 속도로 과학이 발전하는 오늘의 21세기에는 그 현기증 나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양자의 거리가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상황은 두 분야 사이의 상호간 대화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자연과학이 어느덧 현대인의 삶에 너무도 깊이 들어와버렸기 때문이다. 인문학이 사람들의 삶의 양태를 다루는 학문인 한, 더 이상 과학기술을 외면할 수만은 없게 된 것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자연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멀고 먼 거리를 잇는 다리를 놓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국내에서 성장한 과학학 연구자들에 의해 저술되었다. 저자들은 인문학적 배경에 과학에 대한 전문 지식을 지니고 학제간 구별을 넘어 과학과 인문학의 통합적 연구를 수행하는 ‘경계인’들이라 할 수 있다. 과학사, 과학철학, 과학정책 연구자들인 저자들은 학부에서 자연과학과 공학을 전공하여 우리 사회에서는 드물게 과학과 인문사회학을 통합적으로 볼 수 있는 소양을 가지고 있다. 특히 이들은 대부분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에 이르는 정치, 사회, 문화적 격동기에 학부와 대학원을 보내며 과학과 사회에 관한 문제의식을 키운 연구자들이다. 물론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대부분 1990년대 중반 이후의 저술이지만, 예리한 독자들이라면 글의 곳곳에서 1980년대 이래의 진지한 문제의식을, 그 성숙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내용과 구성
이 책의 제1부는 과학을 둘러싼 철학적 쟁점들을 다루고 있다. 이상욱의 글 「과학연구의 역사성과 합리성」은 몇년 전에 지식인들 사이에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소칼 논쟁을 분석하고 있다. 그는 소칼이 사회구성주의적 과학학에 제기한 논점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두번째 글인 이중원의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인식」은 과학이 지닌 객관적이고 진보적인 측면과 과학이 낳는 사회적 문제를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인식적인 틀로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인식에 주목하는 글이다. 이상원의 「실험철학의 기획」은 지금까지 이론을 중심으로 과학을 바라본 과학철학을 비판하면서 실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이다.
제2부는 과학과 문화, 과학과 역사, 과학과 사회의 접점에서 나타나는 쟁점을 다루고 있다. 성영곤의 「과학과 종교의 역사적 관계」는 과학과 종교가 서로 적대적이고 융합할 수 없다는 기존의 상식을 역사에 근거해서 정면으로 비판한다. 이어지는 장대익의 「철학이 생물학을 만날 때」는 생물철학의 최근 동향을 살펴볼 수 있는 흥미 있는 글이다. 진화론, 유전학, 분자생물학 등 근·현대 생물학의 여러 성과들이 던지는 철학적 문제들을 분석하고 있다. 임경순의 「양자역학의 형성과 학문적 스타일」은 20세기 과학의 커다란 혁명으로 일컬어지는 양자역학의 발전을 그 주역인 플랑크, 보어, 보른, 파울리, 하이젠베르크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홍성욱의 「1960년대 인간과 기계」는 자동화와 인공지능이 막 등장하고 컴퓨터와 수소폭탄과 같은 기술이 인간을 절멸시킬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만연하던 1960년대에 사람들은 인간이 기계와 무엇이 다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고, 이런 고민을 통해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생겼음을 보이고 있다.
제3부는 과학과 동아시아라는 주제로 한국·동양 과학사 쪽의 글을 모았다. 신동원의 「동아시아 전통과학사론의 비판적 검토」는 지금까지 동아시아 과학의 전개를 그 자체가 아니라 ‘서양 근대 과학’을 명시적, 암묵적인 기준으로 삼아 연구하는 경향을 비판하고 있다. 두번째 글인 이문규의 「동양 과학, 그 천년의 역정과 오늘의 의미」는 중국 송대로부터 20세기 후반에 이르는 천여 년간 중국, 한국, 일본의 과학사를 개관하고 있다. 제3부의 마지막 글은 한국 현대과학을 다루는 제4부와의 징검다리가 될 수 있는 김근배의 「20세기 식민지 조선의 과학과 기술」이다. 김근배는 여기서 일제 식민지 시기의 과학기술을 개발/수탈이라는 이분법으로 보는 것을 벗어나 식민지 시기 과학의 복합적 성격을 분석하고 있다.
제4부는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는 과학기술을 둘러싼 현실적 쟁점을 다루고 있다. 첫 글인 송위진의 「혁신체제론의 과학기술 정책」은 혁신체제론의 관점에서 과학기술정책의 근거와 특성을 체계화하려는 시도이다. 이어지는 「한국 생명 윤리 의제 형성에 대한 정책 네트워크」에서 김훈기는 1990년대 후반 이후 첨예한 사회 문제로 부상한 생명윤리법의 기안 과정과 그 과정에서 나타난 어려움을 살펴보고 있다. 마지막 글인 송성수의 「한국 과학기술정책의 특성에 관한 시론적 고찰」은 한국 과학기술정책을 시기별로 나누어 살펴보면서, 한국 과학기술정책의 전체적 특성으로 산업 발전 위주의 정책 수립, 외형적 투입 요소의 증가, 관료 중심의 정책 문화를 들고 있다.
김근배 전북대학교 과학학과 교수. 논문으로 「식민지시기 과학기술자의 성장과 제약」, 「리승기의 과학과 북한사회」, 「The Historical Development of Modern Science in Korea」 등이 있다. 남북한 과학기술의 비교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김훈기 동아사이언스 신문팀장. 저서로는 『유전자가 세상을 바꾼다』가 있다. 생명공학 정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성영곤 관동대학교 인문대 교양과 교수. 논문으로는 「알렉산드리아에서의 인체해부와 그 배경」, 「그리스 사회와 의사」, 「그리스의 공의제도」 등이 있다. 그리스 과학사, 과학과 종교, 과학사학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송성수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저서로는 『우리에게 기술이란 무엇인가』, 『과학기술은 사회적으로 어떻게 구성되는가』, 『청소년을 위한 과학자 이야기』 등이 있다. 기술의 역사, 과학기술과 사회, 과학기술 정책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송위진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연구위원 및 기술사회팀장. 저서로는 『정보고속도로와 정보기술산업:미국의 질주와 동아시아의 추격』(공저), 『한국의 반도체 산업 미래 기술을 선도한다』(공저), 『딜레마와 행정』(공저) 등이 있다. 한국 현대 과학기술 정책 등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신동원 KAIST 인문사회과학부 연구교수. 저서로는 『한권으로 읽는 동의보감』, 『조선사람의 생로병사』, 『조선사람 허준』 등이 있다. 한국 의학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문규 전북대학교 과학학과 조교수. 논문으로는 고대 중국인이 바라본 하늘의 세계」, 「중국 고대 分野說의 성립과정」, 「『晉書』 天文志의 천문 사례―해와 달에 관한 현상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관심 분야는 동아시아 과학기술사, 과학기술학, 과학문화 등이다.
이상욱 한양대학교 철학과 「조교수. 저서로는 『과학기술의 철학적 이해』, 『뉴턴과 아인슈타인:우리들이 몰랐던 천재들의 창조성』(공저) 등이 있다. 과학자들이 단순한 모형을 사용하여 복잡한 세계를 설명하는 과정을 철학적으로 이해하는 연구를 진행중이다.
이상원 포항공대 과학문화연구센터 연구조교수. 저서 『인간은 유전자로 결정되는가』(공저), 역서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 『과학이란 무엇인가』(공역) 등이 있다. 실험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중원 서울시립대학교 철학과 부교수. 저서로는 『삶, 반성, 인문학』(공저), 『인간과 과학』(공저), 논문으로 「양자이론의 실재성과 마음의 실재성」, 「실재에 대한 철학적 이해―실재론 논쟁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물리철학, 자연철학, 기술철학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임경순 포항공대 인문사회학부 교수. 저서로는 『20세기 과학의 쟁점』, 『100년 만에 다시 찾는 아인슈타인』, 『과학사신론』(공저) 등이 있다. 물리학사, 양자역학사, 환경사, 한국 과학기술사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장대익 KAIST 강사. 저서 『살인의 진화심리학』(공저)과 역서 『유전자와 생명의 역사』, 논문 「선택 이론의 개념적 쟁점」, 「유전자에 관한 진실을 찾아서」 등이 있다. 생물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홍성욱 전 토론토대학교 교수, 현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부교수. 저서로는 『잡종, 새로운 문화읽기』, 『생산력과 문화로서의 과학기술』, 『Wireless:From Marconi’s Black-box to the Audion』 등이 있다. 과학기술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보살 같은 헌신성이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제1부 과학의 철학적 쟁점
이상욱_과학연구의 역사성과 합리성 | 이중원_마르크스주의의 과학인식 | 이상원_실험철학의 기획
제2부 사회와 문화 속의 과학
성영곤_과학과 종교의 역사적 관계 | 장대익_철학이 생물학을 만날 때 |
임경순_양자역학의 형성과 학문적 스타일 | 홍성욱_1960년대 인간과 기계
제3부 동아시아의 과학과 근대성
신동원_동아시아 전통과학사론의 비판적 검토 | 이문규_동양 과학, 그 천년의 역정과 오늘의 의미 |
김근배_20세기 식민지 조선의 과학과 기술
제4부 과학기술 정책과 한국 사회
송위진_혁신체제론의 과학기술 정책 | 김훈기_한국 생명윤리 의제 형성에 대한 정책 네트워크 | 송성수_한국 과학기술 정책의 특성
'실천교양선 > 실천신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학으로 동아시아를 읽다 (2012) (0) | 2013.08.01 |
---|---|
문화의 숙명 (2003) (0) | 2013.08.01 |
다섯 단계로 본 동아시아 문명 (2002) (0) | 2013.08.01 |
포스트모더니즘의 환상 (2000) (0) | 2013.08.01 |
대표시 대표평론 2 (2000) (0) | 2013.08.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