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시인, 그리고 우리시대 가장 치열한 양심의 시인 김수영의 생애를 완벽하게 재현한 ‘김수영 평전’의 결정판. 시인 최하림은 주변 인물들의 증언을 꼼꼼히 정리하여 열정적으로 엮어내었다. 김수영의 생애와 면모를 제대로 알 수 있다는 점에도 이 책의 의미가 있지만, 이 책 자체로도 문학도에겐 이미 고전에 드는 작품이다. 때로 소설을 연상케 할 만큼 섬세한 심리 묘사와 증언을 토대로 한 객관적인 서술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어서 문학가의 평전이 어때야 하는지에 대한 모범을 보여준다.
최하림의 김수영 평전 다시 쓰기
1981년 발간된 『김수영 평전』이 독자들과 지은이(최하림 시인)의 바람에 따라 더욱 충실해진 모습으로 재발간되었다. 이 책은 김수영 사진 30여 컷과 더불어 전반적인 내용을 이루는 평전과 아포리즘(시와 말과 자유)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은이인 최하림 시인은 이 책의 재판을 앞두고 몸이 축날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다. 그 충실도는 분량 면에서도 나타난다. 이전의『김수영 평전』(문학세계사)이 [김수영 아포리즘]과 [연구자료]를 제외한 실제 평전 부분의 분량이 신국판 260페이지였던데 반해 재판의 분량은 신국판 변형으로, 아포리즘인 [말과 시와 자유] 50페이지를 제외하고 평전 부분만 410페이지에 달한다.
지은이의 끊임없는 노력과 관심으로 이 재판에는 문인들과 가족들의 증언에 이어 김수영이 만주 길림시에서 연극을 함께 했던 임헌재, 거제포로수용소에서 함께 포로생활을 했던 장희범, 서강에서 이웃에 살았던 김경옥, 그리고 박순녀, 김영태, 염무웅, 김철, 김우정 선생님 등의 증언이 추가되었다.
특히 지은이는 충실한 평전이 되기 위하여 이 재판에서는 '김수영을 가장 잘 아는' 김수영의 어머니의 증언을 중심에 두고 풀어나갔는데, "김수영과 같이 단순치 않은 시인의 상(像)을 그려낸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일 수 없다. 시인은 이런 일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저런 일들을 어떻게 생각했으며, 어떤 표정과 말씨로 대했을까, 묻고 또 물어야 했다."([재판을 내며] 중에서)고 그 어려움을 고백하고 있다. 바로 이 책은 그러한 고민의 집적물이다.
그렇게 엮어진 이 책은 한 편의 소설이나 드라마와 같은 그의 일생을 증언과 재현을 통해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쫓아갔다. 특히, 충북 영동에서 창작에만 전념하고 있는 최하림의 구수한 말투가 들려주는 그의 일생은 그 어느 이야기보다도 재미있다.
재판으로 발간되는 이 책은 그러한 노력의 결실로 우리의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멀어져 가고 있는 김수영이라는 위대한 시인을 완벽하게 재현해내는 결정판이 될 것이다.
절규와 치열함이 사라진 시대에 들여다보는 '거대한 뿌리'
― 소설보다 흥미로운 일대기
오는 11월 27일은 김수영의 탄생 80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의 김수영의 문학적·사상적 변화과정은 쉽게 정의되지 않음으로 해서 더욱 값있는 탐구와 과제를 가져다 준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현대사를 한몸에 받아안으며 살았던 그의 순탄하지 않은 일대기와 맞물려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제와 전쟁, 포로수용소, 4·19까지 그의 인생은 한번도 역사의 변방에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삶과 그의 시는 내외의 모든 면을 두루 갖춘 우리 역사와 문단의 소중한 자산이며 동시에 거대한 뿌리이다.
이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의 삶이 그 어떤 소설보다도 흥미롭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의 시와 맞물린 삶의 이야기는 지적 면모와 더불어 유희적 욕구도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김수영을 다시 부활시키는 것은 그의 만행이 개인적 일대기를 넘어 절규와 치열함이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던져주는 메시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얼마 전 이화여대 국문과 석좌교수직에서 물러난 평론가 이어령 씨와 김수영이 벌인 '문학의 사회참여' 논쟁이 김수영의 면모를 십분 발휘하며 흥미를 끈다. 김수영은 이씨가 1967년 말 <조선일보>에 쓴 [에비가 지배하는 문화]가 정치권력의 구체적, 현실적 억압을 도외시한 채 '에비'라는 막연한 두려움만을 부각시켰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한 반비판의 과정에서 이어령 씨는 참여문학을 공격하게 되고 그에 따라 김수영은 "모든 전위문학은 불온하다. 그리고 모든 살아 있는 문화는 불온한 것이다"라는 명제를 세운다.
김수영 삶의 대략
1921년 11월 27일 서울 관철동에서 출생하였다. 선린상고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41년 도쿄상대(東京商大) 전문부에 입학했으나 1943년 학병 징집을 피해 귀국했다. 이듬해 가족과 함께 만주 길림성으로 이주하여 길림 제육교에서 교원을 지냈고 연극운동도 했다. 광복이 되자 귀국하여 서울에서 거주하며 통역 일을 했고 연희대 영문과 4년에 편입(1945년)했으나 중퇴했다. 북한의 남침으로 미처 피난하지 못해 북한군에 징집되었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그 뒤 미군 통역 생활을 하고 평화신문사 문화부, 선린상고 영어교사 등 여러 직장을 전전하다가 56년부터 시쓰는 일과 번역에만 전념했다.
1968년 6월 16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1945년 『예술부락』에 시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하였으며, 1949년에는 김경린, 박인환 등과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하여 모더니스트로 각광받았다. 1954년 환도 후 주도 태평양, 평화신문에서 근무했고, 1955년 이후 자택에서 양계(養鷄)를 하면서 시작(詩作). 번역. 평론에 전념하였다. 이때 그 동안 발표한 작품을 모아 시집 『달나라의 장난}을 간행했고, 제1회 시협(詩協)상을 수상하였다.
시작 초기, 그의 작품은 소시민적 비애와 슬픔을 모더니즘적인 감각으로 노래하고 있으며, [헬리콥터], [폭포] 등이 대표작이다. 그는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현실에 대한 적극적 관심을 표현한 참여시를 쓰기 시작한다. [하…… 그림자가 없다], [육법전서(六法全書)와 혁명], [푸른 하늘을] 등이 이 시기의 작품으로서 혁명과 사회변화,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적극적 관심과 열망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시의 한 전환점을 이루는 이 시기의 지속적인 주제는 사랑과 자유인데, 자유는 그의 시적.정치적 이상으로, 사랑은 그 자유의 실현을 억압하는 현실적 조건에 대한 인식론적인 사랑으로 나타나고 있다.
5.16 후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그는 자유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하는 '적(敵)'에 대한 증오와 그 적을 수락 할 수밖에 없는 현실 사이에서 연민. 탄식. 풍자 등을 작품화하게 되는데, [그 방을 생각하며], [적] 등이 이 시기의 작품이다.
이후 그는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을 노래한 [거대한 뿌리], [현대식 교량], [사랑의 변주곡] 등을 썼고, [풀]은 1970년대 민중시의 길을 열어놓은 대표작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그 밖에도 [시여, 침을 뱉어라] 등의 평론을 통해 참여시와 시의 현대성을 주장하였다.
최하림
1938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다. 1960년대 김현, 김승옥, 김치수와 함께 <산문시대>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1964년 「빈약한 올페의 초상」으로 조선일보를 통해 등단했다. 신문사, 잡지사, 출판사 등에서 근무했고 전남일보 논설위원, 서울예술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현재 충북 영동에서 시작에 전념하고 있으며, 시집으로 『우리들을 위하여』, 『작은 마을에서』, 『겨울 꽃』, 『침묵의 빛』,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등이 있다. 조연현문학상, 이산문학상 수상자이다.
철들 무렵
동경유학시대
절망은 연극을 낳고
명동으로 모여드는 젊은 시인들
김수영과 김병욱, 그리고 박인환
미아리고개를 인민군이 넘어오다
북으로의 행진
거제도 포로수용소
바람 많은 거리에서
폐허의 도시에서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시인들, 다시 명동으로
그는 이렇게 자유를 말하였다
그 방을 생각하며
아이들은 자란다
피아노와 시금치
시여, 침을 뱉어라
풀잎처럼 눕다
에필로그
시와 말과 자유
시인연보
새살 돋아난 김수영
1981년에 출간되어 김수영의 삶과 문학으로 이끄는 길라잡이 구실을 톡톡히 했던 최하림 시인의 『김수영 평전』이 20년 만에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왔다.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재판은 시인의 노모의 증언을 축으로 삼고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함께 포로생활을 했던 이, 만주에서 함께 연극을 했던 이 등의 새로운 증언을 참조해 분량을 크게 늘렸다.
새로 나온 『김수영 평전』에서 관심을 끄는 부분은 얼마 전 이화여대 국문과 석좌교수직에서 물러난 평론가 이어령 씨와 김수영이 벌인 '문학의 사회참여' 논쟁을 다룬 장이다. 김수영은 이씨가 1967년 말 조선일보에 쓴 '에비가 지배하는 문화'가 정치권력의 구체적, 현실적 억압을 도외시한 채 '에비'라는 막연한 두려움만을 부각시켰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한 반비판의 과정에서 이어령씨는 참여문학을 공격하고 김수영은 저 유명한 명제 "모든 전위문학은 불온하다. 그리고 모든 살아 있는 문화는 불온한 것이다"를 제출했지만, 논쟁의 끝은 개운하지 않았다. 이씨가 '서랍 속에 있는 불온시의 정체가 뭐냐'고 물고 늘어졌고, 그 말에 등을 떠밀린 듯 십여 명의 '사복'이 김수영을 연행해 갔던 것이다. 최하림 시인은 이 경험과, 사복들의 취조 과정에서 알게 된 북쪽 동생의 존재가 김수영의 정신을 위축시켰을 것으로 짐작했다. 김수영이 자정 가까운 귀갓길에 버스에 치여 숨을 거둔 것은 그로부터 불과 석 달 뒤였다.
--- 한겨레 문학 최재봉 기자 (2001년 9월 17일 월요일)
김수영의 침은 아직 마르지 않았다
자기 검열을 몰랐던 자유의 시인 김수영(1921-1968).그는 한 시대의 가장 서슴없고 가장 치열한 양심이었기에 다른 시인들에게는 차라리 고통스런 존재였다.
충북 영동의 한적한 마을, 호탄리에 4년전 정착한 최하림 시인(62)이 최근 펴낸 『김수영 평전』(실천문학사)은 20년 만에 손을 본 개정판이지만 지난 세월동안 김수영의 가족, 지인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어떤 개인적 환경 속에서 김수영 문학이 탄생했는지를 보여주는 ‘정본(正本) 김수영'에 값한다.
-지난 81년에 나온 『김수영 평전』은 민감한 내용이 많아 당국의 검열에 걸리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죠.
-예를 들어 1950년 8월 김수영이 북한군에 징집된 뒤 북으로 끌려가 평남 개천에서 강제노동을 하다 탈출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를 재구성하기 위해 "당시 미군 1명당 북한군 5명씩을 포로로 잡아라"는 미군 명령서를 인용했는데 미군이 잡은 포로 가운데는 소년병은 물론 민간인 할아버지도 있었다는 내용을 썼는데 삭제되고 말았습니다.
-평전을 손질하면서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 대목은.
-김수영과 카프 계열의 임화와의 관계라고 할 수 있죠. 김수영의 단편소설 의용군을 보면 존경하고 있는 시인 임동은으로 임화가 등장합니다. 당시 임화는 문인보다는 연극인과 곧잘 어울렸죠. 임화와 김수영은 드라마라는 우리 문화의 속성에는 부재한 것을 시에 받아들였다는 점과 모더니즘에서 민족주의로 회귀했다는 점에서 매우 닮았습니다. 김수영의 시에서 밀고 나가려는 산문적 힘은 임화로부터 영향받은 것입니다.
-최근 국사편찬위가 공개한 미군 방첩대(CIC)문서에는 임화가 CIC 첩자로 활동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과연 개연성이 있다고 봅니까.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임화는 충분히 미국을 갖고 놀 만한 배포 있는 인물입니다. 미국과 남북한 상황을 이중적으로 이용했다는 정도일 것입니다.
-김수영의 말년은 어땠습니까.
-엄청난 강박에 시달렸지요. 작고한 해인 1968년 문학평론가 이어령 씨와의 사이에서 벌어진 문학의 사회참여 논쟁 이후에는 강박이 극에 달했습니다. 당시 이어령은 문학적 가치를 정치 사회적 이데올로기로 평가하고자 하는 참여론자들은 자신의 무덤을 파는 결과에 봉착한다는 논지의 주장을 했습니다. 당시는 동백림 사건에 대한 재판이 진행 중이었고 무장간첩의 서울 침투 사건이 터지는 등 냉전 분위기가 극심했습니다. 이어령과의 논쟁을 끝낸 10여일 후 김수영은 중앙정보부 요원에 의해 연행됩니다. 그들은 김수영의 월북한 남동생 수경을 북한의 남파훈련소에서 보았다는 자수간첩의 진술을 확인하기 위해 연행했다고 설명했으나 김수영은 이를 믿지 않았다는 것이 측근들의 증언입니다. 그는 이어령과의 논쟁 뒤끝에 이런 모진 꼴을 당하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자연인 김수영과 시인 김수영과는 다른 면모도 있을 텐데.
-이번에 김수영의 성적 편력에 대해서도 언급했습니다. 연희전문 영문과를 다니던 46~48년 사이에 그의 여성 편력이 상당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일종의 파격이지요. 그 파격은 김수영이 평생 갈구한 자유의 정신이 되어 그의 문학 안으로 수용됐습니다.
-시인이 보는 시인 김수영은.
-그는 언어적 막힘이 없는 독보적인 현대 시인이었습니다. 김수영이 생존해 있다면 80년대 시를 가장 혐오했을지도 모릅니다. 반면 신동엽이 살았다면 80년대에 가장 각광을 받았을 겁니다. 광주 민주화운동 이후 우리 문학은 반성을 시작했습니다. 문학의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것이 더 깊은 것입니다만 반성 이후 어떤 문학이 나올 지 저도 궁금합니다.
--- 국민일보 정철훈 기자 (2001년 9월 11일 화요일)
재출간 책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충실한 정보량이 시간의 흐름을 이겨내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꼭 20년 전 선보였던 시인 최하림의 이 책 역시 지금 되읽어도 역저다. 우리 문단의 퇴색하지 않은 젊은 시인이자 산문가로 통하는 김수영(1921~1968)의 피투성이 삶이 실물크기로 묘사돼 있기 때문이다.
정밀한 고증과정을 거친 서술이기 때문에 김수영의 일상이 손에 쥘 듯이 그려져 있고, 시의 탄생과정도 흥미롭게 엿볼 수 있다. 하긴 저자가 김수영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문단의 후배이기 때문에 서로간의 코드 공유가 이런 작업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얼마 전 선보인 철학교수 김상환의 『풍자와 해탈, 그리고 사랑과 죽음』과 함께 이 책을 되읽어봄직하다. 그러나 이 책의 한계는 있다. 김수영을 너무 '근접 묘사'한 점이다. 당대 사회사와 함께 이 문학 거인을 입체적으로 그려내는 작업은 뒷세대의 몫이다.
--- 동아일보 책의향기 (2001년 9월 15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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