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어떤 시인보다 많은 시들을 깊이 있게 읽어온 박영근. 그가 선택한 44명의 시인과 46편의 시들은 그 나름의 생명성과 밀도 있는 언어로써 우리에게 반갑게 다가온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 현대시사의 날줄과 씨줄 사이에서 스스로 빛을 발하는 별들이 새록새록 눈뜨는 것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눈 밝은 한 시인이 동시대를 호흡한 시인들의 시를 읽어내리는 동안, 독자들은 각 시들이 지닌 풍요로운 내면의 숲길을 걸어가며 그 경이로운 탄생 과정과 만나게 될 것이다.
앞머리에 '박영근의 시 읽기'라는 설명어를 달고 있지만, 새로운 형식으로 씌어진 책들이 그렇듯이 이 책의 성격을 한마디로 말하기는 쉽지 않다. 이 책은 시 비평서도 아니고, 시를 공부하는 이들을 위한 단순한 해설서도 아니다. '책머리에'에서 "하룻밤을 꼬박 새우면 시 한 편의 꼭지가 떨어지곤 했다"고 밝히고 있듯이, 저자는 우리 시대를 대표할 만한 46편의 시들 한편한편에 '하룻밤'씩을 꼬박꼬박 바쳐가며 깊이 있는 해석과 감상을 펼쳐가고 있다.
20여 년에 이르는 박영근의 시적 도정은 삶의 밑바닥에서부터 21세기의 정신사적 지평에까지 줄기차게 심화·확대되어왔다. 1981년에 노동시를 통해 그의 이름을 시단에 등재한 이래 박영근은 1994년에는 {김미순傳}으로 신동엽창작기금을 수혜했고,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에서는 민족의 역사적 지평으로 그의 시적 상상력을 확장시켰으며, 시대적 허무의 밑바닥까지 파헤침으로써 인간의 보편적 고뇌에 도달한 {저 꽃이 불편하다}로 지난해에는 백석문학상을 받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지난 몇 년 동안 시에 대한 비평적 글쓰기를 통해 그가 펼쳐보인 미학적 성취는 정서가 메마른 시비평에 염증을 느껴온 독자들에게 시적 정서의 깊은 맛을 전해주었다. 그의 비평적 글쓰기의 이러한 특성은 이번에 상재한 {오늘, 나는 시의 숲길을 걷는다}에서 가장 눈부신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주로 밤에만 글을 쓰는 저자는 한 편의 시와 씨름하며 온밤을 지새우고도 "지친 몸을 눕히면서 듣던 새벽의 바람 소리를 나는 잊지 못한다. 그것은 내가 못다 읽은 시 행간의 퀭한 여백의 울림은 아니었는지"라고, 일말의 아쉬움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좋은 시들은 어느 누구의 해석으로도 그 바닥을 다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리라.
시세계의 씨줄과 날줄 사이를 아슬히 걷는 황홀함
이 시대의 어떤 시인보다 많은 시들을 깊이 있게 읽어온 저자이기에, 그가 선택한 44명의 시인과 46편의 시들은 그 나름의 생명성과 밀도 있는 언어로써 우리에게 반갑게 다가온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 현대시사의 날줄과 씨줄 사이에서 스스로 빛을 발하는 별들이 새록새록 눈뜨는 것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눈 밝은 한 시인이 동시대를 호흡한 시인들의 시를 읽어내리는 동안, 독자들은 각 시들이 지닌 풍요로운 내면의 숲길을 걸어가며 그 경이로운 탄생 과정과 만나게 될 것이다.
흔히들 박영근 시인을 '노동시인'으로 불러왔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그의 시적 행보를 주의깊게 지켜본 사람이라면, 격동의 한 시대를 건너오는 동안 그가 펼쳐온 시세계가 내적으로 깊어지면서 가난한 시대에 내던져진 이웃들에 대한 깊은 연민, 그리고 21세기의 시대정신을 꿰뚫어보는 치열함에 주목했을 것이다. '책머리에'에서 온밤을 꼬박꼬박 새우면서도 "그 비유의 세계의 씨줄과 날줄 사이를 아슬히 휘청거리듯 걸으며 느끼는 행복감을 달리 무슨 이름으로 불러야 할까" 하고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러한 치열성은 이 책의 집필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남달리 많은 시와 글들을 읽는 것으로 알려진 저자이기에 다른 이들의 해석이 도달하지 못한 새로운 경지에 이를 때마다 그와 같은 충족감으로 밤을 지새운 고통을 보상받았을 것이다.
박영근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시를 '사는' 사람이다. 이는 시를 대상화하여 해석하고 평가하는 비평가들의 글쓰기와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저자는 곧바로 시 내부로 깊숙이 파고들어 시의 내재적 움직임과 교감하며 그것을 절제된 언어 속에 담아낸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한편한편의 글들이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상식과 교과서적 해석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었던 '시의 내밀한 자궁'이다. 이론이나 외적 규정이 섣부르게 시의 해석에 끼어드는 것을 경계하면서, 시 한 편을 "그것만으로 독자화시켜 온전하게 읽"('책머리에')어내기 위해 펼쳐진 노력들은 새로운 형식의 글쓰기를 통해 곧바로 우리를 시의 본령으로 안내한다. 무엇보다도 그의 심미적인 문장들은 시적 영혼의 고백과 반응하면서 독자적인 시들이 뿜어내는 숨결과 호흡을 같이하는 드문 경험을 선사한다. 거기서 우리는, 낱낱의 시들이 내밀한 자궁 속에서 탄생하는 과정을, 그 시들이 그 나름의 깊이와 그늘 속에서 비상하고 꿈꾸는 여정을 지켜보게 된다.
시의 깊이와 실존적 세계 이해
이 책은 우리 현대시사의 분수령을 이루었던 시들에 대한 박영근 시인의 사유의 진폭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을 뿐만 아니라 한편한편의 시들에 그 나름의 실존적인 무게를 부여하고 있다. 행간의 여백들을 읽어내고 거기서 배어나오는 각 시인들의 삶과 세계를 읽어내는 성찰 또한 눈부시다. 이러한 효과는 미처 시로 씌어지지 못했거나 시로 씌어질 수 없었던 사회·역사적 좌표까지 읽어냄으로써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시읽기는 기존의 해석들에 기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유명한 시인의 유명한 시에 대해서도 무조건적인 예찬을 거부한다. 예컨대, 지난해에 그가 받은 상에 그 이름을 제공한 백석의 시에 대한 그의 해석에서는 이러한 구절도 눈에 띈다.
춥고 폐쇄된 공간에서 치러내는 작가의 자기 성찰은 대개의 시들과 비교해볼 때 그렇게 치열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한국시들의 과도한 엄숙주의와 과장된 제스처를 고려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현실과 내면에 대한 시적 탐구보다는 다른 것에 기대려 드는 허약한 감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불행에 지나치게 압도당한 탓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해석에서 우리는 백석의 시 자체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기존의 상투적인 시비평에 대한 저자의 비판정신을 뚜렷이 엿볼 수 있다.
우리 현대시의 진경을 담아낸 이 책은 무엇보다 깊이 있는 시읽기와 심미적인 문체가 빚어낸 글쓰기의 한 모범을 보여준다. 그래서 {오늘, 나는 시의 숲길을 걷는다}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낱낱의 시들은 그 실존적인 의미와 질감, 그리고 체취까지 우리들에게 오롯이 드러내고 있다. 그렇지만 이 시인은 그 자신의 시읽기에 어떠한 권위도 부여하지 않는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의 머리말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나는 이제 내가 읽은 시들을 본디 있던 자리로 돌려보낸다. 그 시들은 어떤 미련도 없이 나를 떠나 자신의 자리에서 고통과 상처를 길어올리고, 그만한 깊이와 그늘 속에서 자유와 비상을 꿈꿀 것이다. 또 다른 눈 밝은 이가 있어서 나와는 전혀 다르게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 낱낱의 시에 어려올 그 표정들을 생각해본다." 그 자신이 시인이기에 박영근은 어떠한 시도 한 사람의 해석에 사로잡힐 수 없다는 것을 뚜렷이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박영근
1958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1981년 『反詩』 6집에 「수유리에서」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취업공고판 앞에서』, 『대열』, 『김미순傳』,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 『저 꽃이 불편하다』 등이 있으며, 1994년 신동엽창작기금을 수혜하고, 2003년 백석문학상을 수상했다.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백석
무등茶―김현승
그리움―이용악
禪雲寺 洞口―서정주
이 한국문학사―김수영
묵뫼―신경림
최근의 고백―고은
김수영 무덤―황동규
말의 형량―정현종
실미도―신대철
우리가 물이 되어―강은교
해창에서―김지하
마음의 고향·6―이시영
첫 수업―최민
소나기―정희성
잠꼬대 아닌 잠꼬대―문익환
東豆川 Ⅰ―김명인
東海 Ⅰ―장영수
살붙이―송기원
봄밤에 비는 내리고―이영진
세월에 대하여―이성복
사진리 大雪―고형렬
뼈아픈 후회―황지우
한강(하나)―김정환
아름다운 집, 그 집―김용택
금강경―이문재
위대한 식사―이재무
빈집―기형도
그리고 십 년―박영희
인생 / 옷―김영승
배를 밀며―장석남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박철
바다가 / 저녁 스며드네―허수경
어민 후계자 함현수―함민복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2―유하
上弦―나희덕
빈집―박형준
거미―이면우
갱구(坑口)가 전하는 이야기―정연수
적멸보궁―이 원
마지막 섹스의 추억―최영미
死産하는 노래―장철문
백석을 찾아서―정철훈
영아다방 앞에서―김해자
차가운 골방에서 시의 기상을 읽다 ―― 정철훈 기자, 국민일보(2004. 05.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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