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의 문학/소설

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 (2005)

실천문학 2013. 8. 6. 10:52

 

 

 

 

 

 

       

 

 

 

 

 


젊은 소설가 이재웅의 첫 장편소설. ‘인간의 그늘과, 그 아래 드리운 세계의 징후’를 드러내며 ‘참담한 우리의 빈곤’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소설은 몸을 파는 여자로 전락한 누나의 집에 들어와 살게 된 한 소년의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과 소년의 의식을 묵직한 문체와 구성으로 그려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선정 우수문학도서


늙은 소년

주인공이자 소설 속 일련의 사태에 대한 서술자인 ‘나’는 고작 열두 살 된 소년이지만, 열두 살이라는 생물학적 연령에 걸맞지 않게 노숙한 의식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이미 눈물 흘리는 법을 잊어버린 소년인 ‘나’는 경험을 통해 “거짓은 밝고 행복하고 진실은 어둡고 불행”한 것임을 파악하고 있다. ‘나’를 감싸고 있는 냉소적 분위기는 ‘나’의 고통과 굴욕을 초래한 사회적 조건을 아무도 해결해줄 수 없다는 것을 ‘나’ 자신이 부지불식간에 느끼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소년이 대화 중 사용하는 붙임성 없고 지극히 냉소적인 어투나, 과거와 현재의 상황에 대한 독백에 가까운 발화는 독자를 충격에 몰아넣는데, 소년은 이러한 언어와 허위의식이 제거된 시선으로 온갖 변태적 성행위와 폭력이 횡행하는 어두운 세계를 조명한다.



가난한 사람들

그렇다면 무엇이 이 소년에게 정신의 조로를 유발한 것일까. ‘나’가 ‘늙음’의 스승으로 지목하는 것은 바로 ‘가난’이다.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고아이고, 그의 유일한 피붙이인 누나는 어마어마한 빚을 지고 있는, ‘나’가 그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들의 가난은 소작농이었던 그들의 아버지가 농촌을 떠날 때부터 이미 예견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의 가족은 끝내 도시빈민층에 편입되고 마는데, 그들의 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등 그들의 가족이 해체될 때 가난이라는 조건은 거의 필연적인 것이 되고 만다.

『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는 하나의 줄거리로 포착되기 어려울 만큼 수많은 삽화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만큼 다양한 인간 군상이 등장한다. 그런데 소설에 등장하는 그 많은 인물들은 그것이 경제적 빈곤이건 정신적 빈곤이건 간에 모두가 지독한 가난에 허덕이는 인물들이다. 이들을 이런 궁핍한 상황이나 결손감의 수렁에 몰아넣은 것은 부조리한 사회이지만, 이들이 사회의 이러한 부조리함을 뚫고 충족감의 세계로 진입할 가능성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를테면 ‘태호’라는 아이는 가난을 거의 거역할 수 없는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있으며, ‘나’와 ‘나’의 누나는 포주인 문곽호의 견고한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 이처럼 작가는 소년의 불우한 생의 조건과 의식을 통해 가난의 문제를 천착해간다.



‘늙은 소년’의 의식에 포착된 타락한 사회

좁게 볼 때, 소설에서 소년의 말과 의식으로 매개되는 현실은 제도적으로 은폐되어 있는 변태적 성매매의 현장이다. 내부의 시점에서 보자면 뒤틀린 욕망들이 스스럼없이 드러나는 이곳은 대다수의 성인들이 그 존재와 성격을 알고 있는 공간이다. 그러나 자신의 주장과는 무관하게 여전히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소년이며 오히려 그것 때문에 고통과 굴욕을 겪을 수밖에 없는 나의 의식은 이 음습한 세계에 감염되어 있지도 않거니와 그에 대한 항체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성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느슨한 공범의식이나 죄의식, 또는 위선과도 거리가 멀다. 그러하기에 이 소년의 말로 매개되는 세계는 성인 독자들에게 낯설고 뼈아프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가 빚는 비인간적 현실들은 나쁜 것이지만, 이것에 무감각하다는 것은 더욱 슬픈 일이다. 이 소설에서는 그러한 현상들이 문제적 현실로 부각되고, 블랙홀과 같은 어두운 세계가 ‘늙은 소년’의 독한 말투와 의식을 통해 빛 속으로 끌려온다. 『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는 제도를 파괴하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파헤침으로써 변혁의 불가피성을 은밀히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소설을 통해 한 시대의 예각을 만날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나가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그늘과, 그 아래 드리운 세계의 징후를 읽을 길 없는 소설을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재웅의 소설은 이 질문에 치열하게 응답하고 있다. 문학이, 감당하기 어려운 물질적 풍요와 상간하며 욕망에 몰두하는 시절에 이재웅은 참담한 우리의 빈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조용하게 등장한 이 신인이 주목받는 이유는 그의 작품이 빈곤의 문학이 아니라 ‘문학의 빈곤’에 대해 도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가 방현석


“정말 힘들게 소설을 쓰는 작가라면 누구를 들 수 있을까요?” 누가 나에게 그런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이재웅의 이름을 말머리에 올릴 것이다. 그의 소설에는 사소한 문장이 없다. 끝까지 전력으로 투구하고, 언제나 정면으로 승부한다. 그는 무모하다. 그러나 이 무모함 앞에서 우리는 결국 가슴을 적시게 된다. 그것은 바로 그가 온몸으로 밀고 가는 사실(寫實)의 힘, 바로 문학의 힘에 압도되기 때문이다. ―소설가 박민규



작품 줄거리
열두 살 되던 해, 할머니가 죽자 나는 나를 데리러 온 이복누이와 문곽호라는 중년 남자를 따라간다. 소작농이었던 아버지는 식구들을 데리고 상경했으나 일가는 빈민촌으로 흘러들어가야만 했고, 어머니와 누나는 일찌감치 집을 나갔다. 나는 아버지마저 돌아가버리자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었던 터였다.

누나는 몸을 팔아 먹고사는데, 미모가 빼어나 사내들에게 인기다. 포주이자 누나의 정부인 문곽호는 누나의 빚을 대신 갚아주고서 결국 누나를 1억이라는 빚으로 옭아맸다. 문곽호는 누나에게 함부로 대하지만 실은 누나를 좋아하고 있다. 내가 이들과 함께 지내는 아파트에는 끊임없이 손님이 찾아오고, 나이는 어리지만 이미 늙어버린 소년인 나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누나를 좋아한다.

나는 학교에 다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초등학교에서 나는 왕따이지만 이에 개의치 않는다. 고아원에서 도망 나와 공원에서 노숙하는 태호라는 아이와, 역시 왕따인 동급생 완주가 내게 말을 걸어올 뿐이다.

문곽호에 따르면 누나는 한번 사랑에 빠지면 잘 헤어나오지 못하고,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여자였다고 한다. 누나가 빚을 지게 된 것도 실은 사랑하던 사내들에게 사기를 당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송봉권이라는, 빵공장 공원과 사랑에 빠졌는데, 누나는 그를 사랑하게 된 뒤로 일을 하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사업차 일본에 갔다가 돌아온 문곽호는 누나의 이러한 변화를 눈치채고 누나를 한시도 자유롭게 풀어두지 않는다. 점차로 송봉권은 문곽호라는 인물의 존재와 현실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게 되며, 자신을 잊으라는 쪽지를 누나에게 보낸다. 나는 답신도 없는 누나의 쪽지를 계속 전해 날라야 한다.

태풍이 불어 닥친 어느 날, 누나는 문곽호의 배를 칼로 찌르고서 도망한다. 소식을 전해들은 송봉권은 누나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나는 당분간 송봉권의 아파트에서 생활한다. 송봉권은 누나와 나를 돌보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눈치다. 누나는 누구의 아이인지 모를 아이를 유산한다.

문곽호가 어떻게 알았는지 누나의 병원을 찾아온다. 수술을 했으나 누나의 건강은 쉽게 회복되지 않고, 송봉권은 삶의 의욕을 잃은 채 술로 나날을 보낸다.
누나는 문곽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퇴원한 누나는 문곽호의 아파트에서 쉬던 어느 날, 칼로 손목을 긋고 문곽호에 의해 다시 병원으로 실려 간다. 폭우가 쏟아지고, 나는 여름감기에 걸려 악몽을 꾼다. 할머니가 소년에게 자신을 목 졸라 죽이라고 말하며 쫓아오는 꿈이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는데, 누나는 송봉권을 완전히 잊은 듯하고, 문곽호는 누나와 결혼하여 일본으로 가고 싶어한다. 그런데 공원에서 누나가 송봉권을 만나는 장면을 문곽호가 목격한다. 이를 알고 있는 나는, 피곤해하는 누나를 재우고서 과도를 들고 공원으로 가 문곽호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이재웅
1974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중앙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1년 『실천문학』 가을호에 소설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와 소설집 『럭키의 죽음』등이 있다.

 

 

미친 세상 미치지 않으려 미친 듯한 ‘늙은 소년'

[한겨레] 신인 작가 이재웅(31)씨가 첫 장편소설 <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실천문학사)를 내놓았다.


주인공은 “이미 늙은 소년” ‘나’다. 이름은 이준태. 비록 열두 살 어린 나이지만, 그는 소설 곳곳에서 자신을 ‘늙은 소년’이라 지칭하며 남들에게도 그렇게 주장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그가 어려서 일찍 늙은 것은 가난 때문이다. “가난은 나를 늙게 했다”(18쪽)고 그는 말한다.

할머니와 단 둘이 반지하 방에서 살던 그는 할머니가 죽자 이복누이에게 맡겨지는데, 이복누이 혜숙은 중년 사내 문곽호와 동거하는 아파트에서 몸을 파는 신세다. 일찍이 가출해 유흥업소와 매음굴을 전전하던 누이는 그 과정에서 진 빚을 곽호가 갚아 주자 그의 ‘소유물’이 되어 뭇 사내들의 정액받이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저 애의 몸은 제게 있어 공장의 기계 같거든요”라고 문곽호는 말한다).

천장과 사방에 유리가 달리고 모조 가죽 채찍과 막대기, 재갈, 거대한 인조 성기 등이 비치된 수상쩍은 방에서 누이가 ‘손님’을 받으며 신음과 비명을 흘리는 아파트가 주인공 소년의 거주지다. 그러나 보통의 소년들에게라면 충격과 공포의 근거가 될 이런 상황이 주인공 소년에게는 그다지 놀랍거나 실망스럽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는 “거짓은 밝고 행복하고 진실은 어둡고 불행”(36쪽)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늙은 소년’이기 때문이다.

물론 ‘늙은 소년’이라고 해서 비정상적인 상황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그가 보기에 세상은 미쳤고(172쪽), 그 역시 “미치기 일보 직전”(71쪽)인 상태로 내몰리고 있다. 소설은 모두가 미친 세상에서 혼자서라도 미치지 않기 위해, 미친 듯이, 몸부림치는 소년의 이야기이다.

모두가 미친 세상에서 아이들이 덩달아 미치지 않기 위해 택하는 전술이 조숙인지도 모른다. 주인공 준태의 주변에는 그말고도 조숙하고 영악한 아이들이 여럿 등장한다. 그를 첫사랑이라 부르는 동급생 완주는 뜻밖에도 준태의 누이를 모델로 삼아 언젠가 창녀가 되겠노라 다짐하는 소녀다. “세상은 좋아지지 않아”(95쪽)라고 단언하는 완주는 냉철한 비관주의자라 할까. 고아원을 탈출해 공원에서 기숙하는 태호. “나는 그 누구도 이길 수 없어. 나는 억세게 재수가 없을 뿐 아니라 버려진 아이니까”(161쪽)라고 말하는 그는 무력한 패배주의자로 보인다. 준태가 일찍이 일곱 살이었을 때 선교회 유치부에서 만난 동갑내기 계집애는 어떤가. 다른 아이들은 모두 괴롭히면서 준태만은 “나처럼 가난하니까”(250쪽) 괴롭히지 않는다는 이 아이는 당돌한 ‘계급주의자’라 할 만하다. 어쩌면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난 아이들은 나만큼 늙지는 않았지만 나만큼이나 영악했다”(189쪽)는 준태의 말처럼 조숙과 영악은 아이들의 공통된 특성인지도 모른다.


“거짓은 행복하고 진실은 불행”

소년의 시점으로 서술되는 소설에서 도덕적 타락의 중심에 있는 소년의 누이가 사뭇 순결한 구원의 상징처럼 그려지는 것이 이채롭다. 누이는 ‘사랑의 상업적 타락’이라 할 매춘에 종사하면서도 끊임없이 누군가를 향한 ‘진짜 사랑’에 매달리고, 그러느라 감당할 수 없는 빚을 떠안는다. 소설 속 현재 상황에서도 빵 공장 노동자인 송봉권과의 금지된 사랑과 그에 대한 문곽호의 방해는 중요한 갈등과 모순 요인으로 작용한다. 누이는 송봉권과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문곽호의 배를 칼로 찌르고 도망쳤다가 다시 붙잡히며, 소설의 결말은 과도를 옷 안에 숨긴 소년이 문곽호의 등장을 기다리는 장면으로 되어 있다.

또한 누이는 소년에게 오이디푸스적 사랑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내가 걸음마를 배우기도 전에 엄마가 나를 버리고 달아”(7쪽)난 뒤, ‘나’를 “업어 키운”(23쪽) 것이 바로 누이였다. 이렇게 엄마 같은 누이에게 ‘나’는 은밀한 연정을 품는데, “그녀의 미소는 나를 황홀하게 했다”(103쪽)거나 “그가 원하는 곳은 누나의 품 안이었다”(109쪽), 또는 “나는 침대 속으로, 그녀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우리는 껴안았다”(174쪽)는 대목들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결과 ‘나’는 누이와 송봉권의 사랑을 위해 문곽호와 대결하는가 하면, “그 남자는 아기처럼 그녀의 젖꼭지를 빨고 있다.(…) 송봉권이 나와 다른 것이 무엇이던가?”(110쪽)라며 송봉권에 대한 누이의 사랑을 질투하는 이중적이며 모순된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욕망과 타락, 폭력과 몰염치의 극을 달리는 지옥도를 그린 이 신인 작가의 소설에서는 어쩐지 조세희씨의 연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난쏘공)이 연상된다. 냉혹한 단문과 드물지 않게 보이는 번역투 및 경구투의 문장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난쏘공> 연작 중 한 편인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를 떠오르게 하는 “잘못은 담임선생에게 있었다”(38쪽)는 문장 때문인지도. 어쨌든, 작가의 문체적 특징을 확인할 수 있는 몇 대목을 인용해 보자.


‘난쏘공’의 냉혹한 단문 연상

“누나는 울고 있었다. 나는 울지 않았다. 우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눈물을 흘려도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난 열 살 이후부터 울어본 적이 없었다.”(116쪽)

“지친 사람만 슬픈 음악을 들어요.”(127쪽)

“네 누나는 태석이 엄마와 얘기를 해야 해. 태석이 엄마는 그걸 원하신다.”(141쪽)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칼을 숨긴 채 문곽호를 기다리는 동안 준태는 <한스의 밤의 여행>이라는 어린이 그림책의 내용을 반추한다. 그러나 “한스는 행복했어요”라는 그림책의 마지막 구절에 대해 그는 발악하듯 거부감을 표한다: “거짓말이야, 순 거짓말이야.”(319쪽) 뭉크의 그림 속에라도 갇힌 듯 절규하는 ‘늙은 소년.’ 그런데, 누가 이 소년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있을까.


- 한겨레. 9. 1. 최재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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