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문단에 나온 이래, 발표하는 작품마다 독특한 문학세계를 선보이며 신선한 반향을 일으켜온 엄창석이 6년 만에 새로운 작품집 『비늘 천장』을 펴냈다. 이 소설집은 존재와 신, 운명과 우연, 의식과 무의식, 예술과 예술가 등 만만치 않은 주제를 끝까지 밀고 나가며 인간의 존재 의미를 성찰한다. 그러면서도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솜씨라든가 밀도 높은 작품의 결은 새삼 작가의 역량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각각의 단편들은 마치 하나의 장편소설을 읽는 것 같은 여운과 깊이로 다가온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선정 2006 우수문학도서
존재의 문제, 특히 존재를 특화(特化)하는 정체성에 대한 작가의 성실하고 진지한 성찰에 동참하는 것도 소설읽기의 한 즐거움이 된다. 두툼하면서도 촘촘하게 직조된 양탄자 같은 엄창석의 소설들에서 요즘에는 흔치 않은 심각함으로 천착되고 있는 것은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는 그 정체성이 아닌가 한다. 자기부정으로 주저앉고, 저명해진 다른 기호에 자신을 가탁(假託)하려 하고, 상처받고 위축되고 분열하는 정체성의 여러 위기 국면들은 느닷없는 섬뜩함으로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한다. _이문열(소설가)
존재에 대한 깊고 넓은 성찰
“그동안 새겼던 활자를 집어넣은 때였어! 나는 매우 놀랐네. 활자가 무한으로 조합되었던 게 아니라, 허용된 안쪽만으로 조립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도리깨처럼 이마를 후려쳤어. 정말 무엇에 얻어맞은 것처럼 눈앞이 번쩍거렸네.” ―「비늘 천장」
표제작인 「비늘 천장」은 기독교가 최초로 조선에 유입된 19세기 말, 『셩셔』를 한글로 판각해 전파하려는 ‘나’가 각자공(刻字工) 복인춘을 만나 겪는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성신(聖神)이 담긴 글(성서)을 아로새기기 위해 조선조 최고의 각자공 복인춘을 찾아나선다. 그러나 2백 년을 넘게 이어온 판각 장인가의 자손이자 활자에 대한 지독한 숭배자였던 복인춘은 반미치광이로 변해 있다.
양인(洋人)의 배를 불태우는 사건에 가담한 뒤, 복인춘은 판각에서 손을 떼고 눈에 보이는 것들을 부정하게 된 것이다. 30만 자에 이르는 활자로도 표현할 수 없었던 보이지 않는 세계, 활자의 부스러기에서 자란 구더기들을 통해 깨우친 문자의 ‘유랑’…… 한 세상의 정점에 이른 장인이 다른 세상의 경지로 이동하듯, 독자들은 복인춘의 득의(得意)와 좌절 과정을 통해 삶과 예술의 농익은 비의를 체험한다. (물론 여기에는 그 자신이 문자의 세계를 창조하는 주체이기도 한 작가의 자아가 반영돼 있다.) 그러면서, 독실한 기독교인인 주인공은 신의 말씀으로 나타나야 할 ‘셩셔’조차 ‘허용된 안쪽’만이 표면으로 드러난 것이 아닐까 하는 불경스러움에 시달리게 되는데…….
인간/신, 의식/무의식, 활자/구더기 등으로 대비되는 세계와 그 경계를 끝까지 넘어서려는 인간의 처절한 고투는 읽는 이들을 긴장시킨다. 그리고 촘촘하게 직조된 구성과 아름다운 문체에 힘입어 탁월한 미적 성취를 획득하고 있다. 이 소설집은 이렇듯 웅숭깊은 주제를 작가의 뛰어난 기량으로 형상화한 작품들로 가득 차 있다.
인간의 근원을 탐색하는 소설의 아름다움
「몸의 예술가」는 체코의 ‘단식 광대’를 통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치열한 의지를 묘사한 작품이며, 「고양이가 들어 있는 거울」은 수사관이면서 동시에 범죄자이기도 한 주인공이 미제 사건에 봉착하는 모순을 통해 존재의 문제를 특화시킨 작품이다. 이 작품은 잘 만들어진 범죄영화를 보는 듯 스릴 넘치기도 하지만, 한 몸에 깃든 두 개의 존재가 서로 갈등하며 미궁 속을 헤메는 과정을 치밀하게 묘사하며 심리의 표리(表裏)를 밀도 있게 형상화했다. 「해시계」는 조선시대 이야기꾼 채물음을 등장시켜 ‘이야기’와 인간의 근원에 천착해 들어간다. 「쉰네 가지의 얼굴」은 도피 중인 탈옥수가 주인공이다. 이 탈옥수를 현상수배하는 전단지에는 범인의 변장한 얼굴이 자꾸 덧붙여지다 종내는 다른 사람의 얼굴을 붙이게 되는데, 인간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어떻게 정의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호랑이 무늬」와 「오래된 전쟁」 역시 일상과 삶 속에 묻힌 의미를 꺼내어 현대인의 존재 양식을 성찰케 하는 수작(秀作)이다.
입체적 구성으로 독특한 울림을 직조해낸 수작들
개별인들의 구체성에 천착하며 인간이라는 존재, 인간의 실체에 좀처럼 육박해 들어가지 않는 게 요즘 소설의 경향이라면, 엄창석은 그 반대편에서 정면승부를 걸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나같이 근원에 대한 물음이 강렬하게 느껴지며, 깊은 성찰거리를 제공한다. 의식의 세계를 넘어 무의식의 끝, 무의식의 한계마저 더듬어보려는 작가의 욕심은 소설을 풍요롭게 빛내고 있다. 이를테면, 언어를 가진 자의 깊은 절망을 묘파해낸 작품은 도리어 인간이 언어를 통해 희망을 구성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눈에 보이는(可視)/눈에 보이지 않는(非可視)’ 세계의 대비와 갈등은 다시 그 사이에 난 통로 안으로 독자들의 머리를 들이밀고 있다.
매우 입체적인 이러한 이야기 전개방식은, 우리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 질문들을 던지는 것을 즐겁게 만든다. 출중한 작가의 기량과 작가정신이 돋보이는 바, “소설에서 멀어진 독자들이 다시 소설 읽는 맛을 들이게 하겠다”는 작가의 바람이 바람만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엄창석
1961년 경북 영덕에서 태어나 영남대 독문과와 동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주물공장의 노동자 문제를 다룬 중편소설 「화살과 구도」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소설집 『슬픈 열대』, 『황금색 발톱』, 장편소설 『태를 기른 형제들』, 『어린 연금술사』, 『유혹의 형식』 등이 있다.
몸의 예술가_7
고양이가 들어 있는 거울_43
비늘 천장_79
해시계_117
쉰네 가지의 얼굴_153
호랑이 무늬_189
오래된 전쟁_227
해설 | 홍기돈_317
작가의 말_340
예술가 소설의 새로운 진경과 자유로운 상상력의 한 경지 ―― 김중식 기자, 경향신문(2006. 07. 06.)
문학 물고 늘어진 ‘메타 소설’ ―― 최재봉 기자, 한겨레(2006. 07. 07.)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엄창석 소설집 '비늘 천장' ―― 조향래 기자, 매일신문(2006. 07. 06.)
성서 판각자의 처절한 고투 ―― 정철훈 기자, 국민일보(2006. 07. 02.)
활자와 활자 사이에 섬이 있다 ―― 박해현 기자, 조선일보(2006. 0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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