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박형숙은 모든 것이 빠른 속도를 앞세우는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무척 게으른 작가라고 할 수 있다. 1993년 『실천문학』에 「차임벨을 울릴 때」라는 작품으로 작가의 길에 들어선 이후, 13년이 지난 이제야 첫 창작집 『부치지 않은 편지』(실천문학)를 펴냈다. 그러나 느리게 한 걸음 한 걸음씩 옮길 때 비로소 보이는 삶의 전경이 따로 있는 법이다. 천천한 걸음으로 들여다본 삶의 전경이 곳곳에 녹아 있는 이 소설은 언어가 속으로 응집되어 말을 잃어버린 듯, 남김없이 에너지를 소진시키며 다가온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선정 2006 우수문학도서

생은 그때로부터 영원히 정지되었다고 믿는 스물서너 살 섬약하고 예민한 누이의 언어가 순정하다. 언어가 속으로 응집되어 말을 잃어버린 듯한 소설이다. 아주 오랫동안 홀로 타고 있는 촛불을 연상케 한다. 십 년도 적어 이십 년을 그렇게 탔는지도 모른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그녀가 우리의 죄를 대속했다고 생각했다. _전성태(소설가)
내밀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지난날의 자화상
“1980년대는 내 안에 뿌리내린 독이었다. 삼킬 수도 없고 뱉을 수도 없는 독. 어설피 삼키기에는 내가 동조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았고, 섣불리 내뱉기에는 이미 내 안에 넓게 퍼져 있었다. 사람들은 내게 말했다. 삼키거나 뱉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그러나 나는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았다. 단지 오랫동안 물고 있었을 뿐이다. 창작집을 묶어내는 이제 나는 선택할 필요가 없어졌다. 오랫동안 물고 있는 사이 이미 그것은 내 안에서 녹아버렸기 때문이다.” ―「부치지 않은 편지」
표제작 「부치지 않은 편지」는 박형숙 소설의 정신적 원점에 해당한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이 작품에서 박형숙은 그녀가 속한 세대의 구성원들이 통과해 나갔던 1980년대 중후반의 풍경들을 생생하게 재생시킨다. 이 작품에 나타난 운동권 선배와 후배의 연애상, 공장 활동을 준비하는 운동권들이 즐겨 은거하던 서울과 교외의 산동네 판자촌 풍경들, 보일러가 작동하지 않는 차가운 냉방, 더러운 이불, 라면, 재래식 화장실, 『삼포 가는 길』과 『광장』을 읽는 풍경들, 『모순론』과 『자본론』을 놓고 토론하는 장면들, 남녀가 함께하는 합숙 세미나를 둘러싼 이야기 등등은 1980년대 중후반의 나날들과 세태 풍경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1980년대 중후반에 20대의 초중반을 보낸 작가는 “그 시기가 나의 문학적 원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정신적 원점이 되리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이것을 나는 이제 담담하게 말한다”고 전한다. 작가가 대학에 발을 들여놓은 80년대 중반은 모든 것이 ‘운동’으로 수렴되는 시대였다. 그 시대의 중심부에 있든 주변부에 있든 누구도 이 사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 세대에게 중요했던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사회적 ‘실천’이었다. 그로부터 20년이 넘게 흘렀다. 1990년대 초반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21세기가 도래하고, 또 소위 386세대가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면서 1980년대에 대한 인식이 다양하게 변주되어왔다. 어찌 되었든 지난 1980년대는 우리에게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많은 숙제를 남겨준 세기다. 해서 이 작품을 1980년대의 운동에 대한 하나의 냉철한 반성문이자 비판문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반성과 비판에 그치지 않고 자기부정으로 한 발 더 나아간다는 점에서, 고행승과도 같은 이러한 자기부정으로 마침내 자신의 순결한 영혼을 확인하는 자기긍정의 반환점에 서기에 이르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미덕을 찾을 수 있다.
사랑과 욕망에 관한 그녀들의 섬세한 목소리들
총 여덟 편의 소설이 실린 이 소설집의 작품들은 주제별로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나누어볼 수 있다. 먼저 사랑 이야기. 이 창작집의 유일한 중편소설인 「부치지 않은 편지」는 1980년대의 사랑에 관한 편지글 형식의 회상 이야기이고, 「별이 지는 둑방」은 대학을 중퇴한 윤경과 운동권학생 출신 노동자 철현의 사랑 이야기다. 또 「달빛」은 조직사건으로 감옥에 가 있는 남자친구와 선배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성 주인공의 심리를 그린 것이고, 「여름날의 저물녘」은 운동의 시대가 지나간 후 형제인 두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갈등하는 여성 주인공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이들 네 작품은 모두 386세대의 운동과 그 이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후일담 소설에 속한다. 다음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은 학교 이야기. 「차임벨이 울릴 때」와 「담」 두 작품이 이 유형에 속한다. 「차임벨이 울릴 때」는 임시교사로 일하면서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선영이라는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고, 「담」은 학교라는 제도적 굴레 속에서 고민하면서 국어교사로 생활해가는 하 선생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의 작품 유형으로 묶을 수 있는 것이 「봄밤」과 「그리고 다시 눈이 내렸다」이다. 이들 작품은 여성적인 욕망에 대한 질문을 담고 있는 작품들이다. 각기 생맥주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영주라는 여성과 도서관 사서로 일하는 명희라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아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여성이 처한 상황을 욕망이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밀도 있게 그려내고 있다. 사랑 이야기, 학교 이야기, 욕망과 여성의 관계 양상에 관한 이야기들이라고 하면 지난 십 년간 흔하게 보아온 것이 아니냐고 질문하는 것이 아마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박형숙의 이야기들은 평범하고 흔해 보이는 외관과 달리 비범하고 뜨겁다. 사랑 이야기를 담은 작품들은 후일담이 보여주는 이상화나 비속화를 수반하지 않으며, 학교 이야기는 참교육에 관한 진부한 교훈담으로 흐르지 않는다. 또한 그의 작품들은 남성 중심적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과 욕망이라는 문제를 섬세하게 포착해내는 힘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박형숙의 작품은 아주 쉽게 읽히는 문장과 문법을 갖고 있다. 그는 형식상의 실험을 가하지도 않으며 기괴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지도 않는다. 마치 직접 경험했거나 바로 이웃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매우 쉬운 문장과 문법으로 이야기를 풀어감으로써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내장하고 있는 비정상성과 평범한 것처럼 보이는 것에 내재된 비범함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창작집에 실린 작품들을 찬찬히 감상하면서 그녀가 만들어 나갈 새로운 세계를 상상해 보아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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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숙 1966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왕십리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와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을 졸업했다. 1993년『실천문학』 가을호에 「차임벨이 울릴 때」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

부치지 않은 편지_7 봄밤_63 여름날의 저물녘_91 그리고 다시 눈이 내렸다_125 담_157 달빛_183 별이 지는 둑방_217 차임벨이 울릴 때_243

사랑과 욕망에 관한 그녀들의 섬세한 목소리들 ―― 강명기, 데일리안(2006. 0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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