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확의 시는 갖가지 나무들로 무성한 야생의 숲 같다. 특히 칡이나 다래의 덩굴이 뒤엉켜 있는 울창한 숲 같다. 그의 시구나 이미지들은 결코 고분고분하게 길들여지거나 가지런하게 정돈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일상적 화법의 틈새와 허점을 비집고 달라붙거나 기어올라 기어이 고개를 내민다. 그리고 그것은 온갖 욕망들이 뒤엉켜 있는 이 세상에서 희망을 찾아가는 시인 나름의 방법이기도 하다. ―최두석(시인) |
임동확 시인의 신작 시집 『나는 오래전에도 여기
있었다』가 실천문학사에서 출간되었다. 등단 이후 줄곧 “형벌처럼 각인된 살아 있음의 죄의식”에 기대어 ‘죽음’과 ‘고통’의 서사화에 주력했던
시인은 7년 만에 펴내는 이번 여섯번째 시집을 통하여 ‘신생’과 ‘생성’의 세계로의 존재 전환을 꾀한다. 그가 이 시집을 통해 보여준 가장 큰
변화는 대긍정 또는 대화해의 모색이다.
여럿 속의 하나인 나, 단절을
넘어 긍정의 세계로
시인은 “어떤 확신에 찬” 종교적 “신념”이나 “광기” 또는 “광신”에 의해 “집단적으로
도륙”당한 “목 없는 석불도” “그 나름”으로 “모두가 참”이라는 인식을 통해 온갖 분별과 차별로 얼룩진 이분법적 세계의 한계를 돌파하고자
한다. 또한 “필요한 자가 있다면 불두(佛頭)가 아니라 제 팔과 다리/아니 몸뚱이라도 스스럼없이 내주어야”(「온몸을 들어올려」) 한다고
강조하면서 적대적인 참과 거짓,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차이와 구분 자체를 넘어선 대긍정의 세계를
모색한다.
‘월인천강(月印千江)’이라는 부제를 달고 전체와 부분, 개체와 집단의 상호작용에 주목하고 있는 연작시 「지켜보는 이
없어도」, 「사랑의 노래」, 「바다에 내리는 비」, 「오직 하나뿐인 저 달이」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놓여 있다. 시인은 “인적 드문 바위
틈새에” 자라는 “나도제비난초”의 “꽃내음 속에 저를 스쳐간 모든 손길”, 즉 세월의 “기억”과 “조심성 잃은” 역사의 “발굽”(「지켜보는 이
없어도」)을 읽어내고자 한다. 또한 “네 속에 내가 사는 것도, 내 속에 네가 사는 것도 아니”며 “원래부터 우린 각기 혼자일 뿐”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서로를 위해 존재하길 자청하는 하나”(「사랑의 노래」)라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차이를 통한, 차이 속의 일치를 꾀하고 있다.
아울러 “금세 바다로 떨어진 한 빗방울”에도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하나의 중심”(「바다에 내리는 비」)이 살아 있다는 화엄경적 세계
모색을 통해 제 나름의 개성을 유지하면서도 본래의 면목을 유지하는, 개체와 집단 또는 부분과 전체의 조화 균형의 세계를 모색하고
있다.
잘 가라 청춘이여, 깊고 서늘한
사랑
시인은 이런 관점에서 “괴롭고 힘들”었던 “청춘의 날”(「고별사」)을 떠나보내며, 이제 폭력과 광기의
역사로 인한 바깥의 상처나 슬픔보다 “기억만으로 온몸이 달아오르는” “제 마음 속에 이리저리 뻗어 있는/황금광맥”(「너의 보배」)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은 시각보다는 시각의 타자라고 할 수 있는 ‘듣기’의 시세계로 나타난다. 즉, “온갖 부조리한 운명”과 “무거운 기억의
편린” 속에서 “더 생생한 침묵의 빛”을 받아들이고 “제 안에서 터져나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저녁의 노래」)며, “서늘한 외로움”과 “맑고
투명한 정신”이 빛나는 “심연 속의 심연만이 시인의 말이 솟아”나는 “샘”(「불꽃의 심연」)이라고 선언한다.
다시 말해, 그는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대상화하려는 시각 중심주의 시세계와의 결별을 꾀하면서 “더욱 깊어진 제 안의 물소리”(「구성폭포」), 또는 “제 안의
거대한 어둠 속에서” “얼굴 없는 신의 숨결”(「소리에 대하여」), 또는 “영원한 어둠”이 선사하는 “별빛의 눈짓”(「수월관음도」)으로 대변되는
신성(神性)을 맛보고자 한다.
생성의 밑자리, 희망을
찾아서
긍정과 화해의 세계를 지향하는 시인은 그러나 현실의 고통이나 부조리를 무조건 용납하려 들지 않는다. 주로
제3부에 실린 「폐어」, 「6월과 7월 사이」, 「백양사 약사암」, 「종이컵과 촛불」 등의 시를 통해 시인은 세상에 대한 짙은 연민을 내보이거나
잘못된 현실에 대한 분노감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희망”을 “끝없이 배반을 꿈꾸되 결코 배반하지 못하는 기차바퀴”로 정의하면서
꿈과 전망을 잃은 세기의 “희망”은 “증명되고 실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요청하거나 자청”한 “슬픔의 무한궤도와도 같은
것”(「희망의 존재방식」)임을 말하고 있다.
한편, 일견 대립되는 “왼손”과 “오른손”, 좌와 우의 균형과 조화를 통한
“양손잡이”의 “자유로운” 세계로의 도약을 꾀하면서(「내 애인은 왼손잡이」), “의지만으로 안 되는” 자신의 “운명”과 화해하는 방편으로
“형식”을 끌어들여 “삶에 불쑥 끼어든” 상처 또는 “의외”를 “끝까지 저버리지 않”(「운명과 형식」)으려는 자세를 보여준다. 또한 개별적
차이를 무시한 “통일” 또는 “통합”의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혼돈”의 가치를 새삼 옹호하며(「혼돈을 위하여」), “인과론과 필연성으로 꽉 짜인”
근대적 삶의 질서 속에서 “천덕꾸러기”로 취급된 “우연”(「수석전을 보다가」)의 가치에 주목한다.
시인은 최근 산문집 『들키고 싶은
비밀』과 시론집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 등을 한꺼번에 출간하면서 ‘생성의 시학’론을 의욕적으로 펼쳐가고 있다. 문학평론가 구모룡은
“청춘을 속박하던 폭력의 기억”은 이제 “그의 의식을 억압하고 사고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지 못한다”고 전제한 후 “존재의 해방을 지향하는
데에서 임동확의 새로운 시적 지평이 형성되고 있”다고 말한다. “갖가지 나무들로 무성한 야생의 숲”과 같은 그의 시들은 “온갖 욕망들이 뒤엉켜
있는 이 세상에서 희망을 찾아가는”(최두석 시인, 표지글) 진정성으로 빛난다. 그의 새로운 시세계를 주목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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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확 임동확 시인은 1959년 광주에서 태어나 전남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고, 서강대 대학원 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집으로 『매장시편』, 『살아 있는 날들의 비망록』, 『운주사 가는 길』, 『벽을 문으로』, 『처음 사랑을 느꼈다』 등이 있고, 시화집 『내 애인은 왼손잡이』, 산문집 『들키고 싶은 비밀』, 시론집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 등을 펴냈다. 현재 한신대학교 문예창작과 겸임교수로 있다. |
외면 못했던 5월 광주, 그 '누명'을
마주하다 ―― 홍성식 기자, 오마이뉴스(2005. 12. 14.)
임동확 시집 '나는
오래전에도 여기 있었다'
그때 그 아픈 시간에 이별을 고하며…
80년 광주가 남긴 청춘의 굴레 벗고 이젠
화해의 사랑과 변화를 열망
그러나 여기 시의 치열함은 그대로 / 실천문학사 7,000원
임동확 시인의 새 시집에서,
3부에 수록된 시 ‘고별사’를 우선 읽자.
▲고별사
잘 가라 내 청춘
미친 개들의 입에서 입으로
뺏고
빼앗기며 핥고 깨물어도 아직 삼켜지지 못한
뼈다귀 같은 슬픔뿐이어도
제대로 된 긴 전망 하나 없이도
끄떡없이
저 피의 세기를 건너왔느니
끝내 신원 될 기약조차 없이
생매장된 검은 기억의 꽃밭 위를 맴돌다가
금세 날아가버린
나비처럼
나의 눈길은 저 언덕 너머 양떼구름을 쫓고 있느니
검고 윤기 나던 긴 머리칼 한번
뽐내지 못한 채
죄 없이 쥐어뜯다가
어느새 새하얗게 세어버린 청춘의 날들이여
잘 가라
그 어느 연대, 땅에선들
청춘의 날들은
억지로라도
괴롭고 힘들어 하지 않았으랴
잘 가라 내 청춘
다가오는 날들이 결례 같은 죽음뿐일지라도 무작정 떠밀려온
채 살아 애쓰는 여기가 나의 거점 그때 그 패배와 나락의 순간들이 없다면 이토록 깊고 서늘한 사랑의 완성을 꿈꿀 수
없으리
1980년의 봄을 고향 광주에서 21살의 더운 피로 감당한 시인이, 이제 돋보기를 써야 하는 나이가 됐다. “비록 젊은
날처럼 사물을 함부로 보지 못한다 해도/ 이젠 열정 때문에 무례를 범하지 말아야 할 나이”(‘노안’)라는 것이다. 꼭 나이 때문이랴마는, 어쨌든
이제 그가 “여기”를 “나의 거점”이라고 한다.
“그때 그 패배와 나락의 순간들”을 긍정하며 “깊고 서늘한 사랑의 완성을 꿈”꾼다고
한다. 87년 시집 ‘매장시편’(민음사)으로 등단한 이래 18년, 5권의 시집을 내는 동안 고집스레 져 온 시간의 무게, 그 좌절과 비애와
환멸과 자조의 굴레, 기억의 억압들을 이제 풀어놓고자 하는 것이다.
그 지난한 탈피의 몸부림과 마침내 도달한 거점의 대강이 이번
6번째 시집의 어렴풋한 풍경이라 하자.
‘고별사’가 실린 시집 3부의 소제목이 ‘추억은 힘이 세다’다. 그리고 2부(‘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며’)는 그 힘 센 추억 세계의 일부를 엿보게 하는 공간이다. 가령, “아무리 생각해봐도, 생은 투자 없는 끝없는 소비”이고,
“즐겁거나 슬프거나 쉬 지워지지 않은 기억들만/ 떨어져나간 단추 자리처럼 뚜렷하다/ 문득 사랑하는 일마저 어느새 닳고/ 더러워진 옷소매처럼
감춰야 할 부끄럼”(‘걸레질을 하다가’)이며, “이미 저질러진 과거사들이 손전등 불빛을 둘러싼/ 어둠처럼 달라붙어 익숙한 길조차 더듬거리던
밤”이고, “결코 다가오는 날에도 오래 자유롭지 못할/ 치욕의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울음을 터뜨리”던 나날들이었다는 것이다.
시인은 그 나날들의 “허공처럼 커진 슬픔 덩어리 하나를/ 창녀처럼 껴안고 삼보일배하며”, 사막을 건너듯, 견뎌온 것이다. “어느새
비애와 환멸의 수염만 쭈볏 웃자란/ 중년의 사내”로 “희망도 없는 세기의 밤길을 술 취한 채 걷고 있”(‘눈’)지만, 이제 그 “공허의
사막속에서도/ 끝끝내 무너지지 않는 사랑의 구층탑”을 복원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변화의 징후는 지난 생을 일러 ‘끝없는 소비’라
했을 때 감지됐겠지만, 1부의 시들은 그 의지를 보다 선명히 드러낸다. “오, 너무나도 무겁거나 혹은 가벼워서 서러운 생이여!/ 가슴마다 제
것이 아니었으면 좋을 법한/ 홀로 살찐 추억의 부스러기만 혹처럼 등에 단 채/ 저 성난 세월의 혓바닥에 가득 술을 부어/ 일찍이 꿈꾸어보지 못한
자비와 휴식을 노래해야 하리//…마침내 이젠 미치도록 행복하고 싶어, 소리치며/ 모두들 그렇게나마 제 운명을 한 번쯤 옹호해야 하리”(‘무겁거나
혹은 가볍거나’) “그러니 어느새 제법 아름다워졌을 법도 한 어제와/ 늘 용서받기에 급급할 내일에도 난 그 누구든 미워할 수 없다/…슬퍼하거나
오래 아파할 이유도, 그럴 여유도 없다”(‘한 시절의 파도가 고요하매’)
태도와 관(觀)의 변화가 세계에 대한 인식의 굴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세상은 여전히 “덫이자 먹이의 허공”이며 “탱크의 무게로 깔아뭉개며 밀려오는 죽음”의 공간이다.
그
앞에 생은 종이컵 두른 촛불처럼 “목숨의 열망을 연소하며”(‘종이컵과 촛불’) 서 있다. 다만, 내려앉은 가지의 흔들림을 따라 “흔들리지 않을
때까지 날개를 퍼덕이”는 새처럼, “아무도 쉬 장담하지 못하는 평화가, 안식이 그렇게라도 다가온다면// 흔들리면서 끝내 흔들리지 않은 사랑이
그렇게라도 꽃필 수 있다면”(‘흔들리지 않을 때까지 날갯짓을’) 여린 근육이 엉키고 눈에 실핏줄이 터져도 퍼덕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변화의 열망은 머리가 아니라 시간의 짐이 남긴 어깨의 굳은 살에서 비롯된 것이겠기에 든든하다. 그가 제 몸 그토록
짓찧으면서도 완벽히 까라지지 않은 것은 “끝없이 배반을 꿈꾸되 결코 배반하지 못하는 기차바퀴 혹은 그 기차바퀴가 내는 거친 마찰음과도 같은”
‘희망의 존재 방식’을 믿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달빛이 천강(千江)을 비추듯, 바다로 내려 섞이는 빗방울들이 각각 하나의 중심이고
전체의 중심이듯, ‘운명과 형식’은 숱한 이탈과 변칙에도 서로를 배제하지 않음을 보았기 때문이다(5부의 시들).
그러니 그의
시는, 변하지 않았다고 하자. “손 쉬운 귀향보다 화려한 절망의 가출을 독려”(‘겨울비’)하든, “온 힘을 다해 축복받은 귀향길에 들고
있다”(‘바다에 내리는 비’)고 하든 그의 시는 달라지지 않았다고 하자. “시는 외침이 아니라, 외침이 터져나오는 자리”(김현의 평문, 그의 시
‘불꽃의 심연’ 재인용)라 한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그는 시집의 제목처럼 ‘오래 전에도 여기 있었’고,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오직 너는 나의
너였”던 것이다.
-한국일보.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 200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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