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의 문학/시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 (2006)

실천문학 2013. 8. 11. 23:55

 

 

 

 

 

 

 

 

 

            

 

 

 

 

 

 

 

 

 

 

2003년 [작가세계]로 등단한 이후, 세계를 지배하는 자본의 질서에 의해 꺾이고 소외받은 자들의 삶과 굴절된 역사에 대한 탐구의식으로 가득한 작품을 발표해 주목을 받아온 박후기 시인의 첫 시집이 출간되었다.


가난과 허기, 유랑하는 삶의 자취

박후기의 시는 과거의 삶이나 역사에 대한 기억과 정신의 자기성찰이라는 오랜 ‘시간의 반추’에 의해 직조되고 있다. 이 기억과 성찰의 그물망에 잡힌 삶의 풍경 속에는 현대자본주의 사회의 폭력적인 질서에 의해 삶의 근원을 뿌리 뽑힌 채 “철봉 대신 연봉에 매달리며 살아가고,/바닥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내리는 눈을 온몸으로 맞”(「철봉은 힘이 세다」)으며 유랑하는 가난하고 소외받은 이웃들의 초상이 “검은 그을음 같은 구름”과 “깊숙한 어둠 속”(「움직이는 별」)에서 음울한 배경으로 떠돌고 있다.

박후기 시 세계의 핵심적 모티프로서 이 어둠의 이미지는 “들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가 장화를 벗으면, 퉁퉁 불어터진 발가락들이 꽈배기처럼 꼬여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검은 장화 속 같은 날들”(「검은 장화 속의 날들」)이었던 유년기의 ‘가난’과 “아무리 허리띠를 졸라매도/바지를 흘러내리게 하는 생의 허기”(「행복의 나라로」)와 같은 ‘허기’의 이미지를 통해 구체적인 실감을 얻어낸다. 그런가 하면, “힘줄은 꿈틀거렸고/물려받은 가난은 호적에 그어진 붉은 줄만큼이나 불편했”(「청년들」)던 나날 속에서 “폐타이어 화단의 봉숭아 씨앗들”처럼 “나도 팍, 터지고 싶었”(「내 가슴의 무늬」)던 청춘기의 방랑에 대한 어두운 기억은 시인의 섬세하고도 맑은 감성의 필터를 통과하면서 애조가 서린 투명한 서정의 풍경으로 되살아난다.

비가 내렸고, 아궁이에 물이 스몄다. 아버지, 삭정이 같은 팔을 뻗어 눅눅한 신문지 모서리에 성냥을 그어댔다. 아버지의 손가락이 타들어갈 것만 같았다. 짙은 연기가 뱀처럼 부엌 바닥을 기어다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훅, 바람을 일으키던 아버지 입에서도 하얀 연기가 흘러나왔다. 물 위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어린 누이가 어두운 방 안에 누워 열꽃을 피웠고, 나무 몇 토막 살 밖으로 끓는 수액을 밀어내며 타들어갔다. 검은 솥단지가 칙칙거리며 눈물을 흘렸고, 굴뚝의 인후부를 간질이며 피어오른 연기가 쓰러진 나무처럼, 하늘 바닥에 엎드린 채 비에 젖고 있었다. _「슬픈 온기」 전문


기지촌, 아버지, 어둠 속에서 빛나는 삶

박후기의 시가 펼쳐 보이는 삶의 풍경 속에는 자신의 존재와 삶을 뿌리 뽑힌 자의 우수나 비애와 더불어 유랑하는 삶의 궤적이 아주 또렷이 각인되어 있다. 이러한 유랑의 삶은 ‘미군 부대’(혹은 ‘기지촌’)로 상징되는 공간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은데, 이 공간적 배경이야말로 유랑의 삶 자체의 상징이랄 수 있다. 「도두리」, 「애자의 슬픔」, 「옆집에 사는 앨리스」, 「목필 연가」 등 많은 작품에서 유랑하는 삶의 그림자와도 같은 어두운 배경을 형성하는 ‘미군 부대’가 상징하는 바는 다소 복합적이다. 그것은 분단 체제 아래 있는 이 땅의 비극을 지시하기 위한 상징이고, 미국적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질서에 포획된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현실을 지시하기 위한 수사일 수도 있으며, 강압적인 군사문화가 지배하던 지난 시대의 역사적 질곡을 드러내기 위한 배경 장치이기도 하다.

전신주 위의 애자가 몸을 떨고 있네
기지촌에 비는 내리고
먼 데서 달려온 뜨거운 전기가
쉴 새 없이 애자의 몸을 핥고 지나갔네

철조망에 매달린 물방울이 보이네
전선을 타고 흐르는 애자의 눈물이 보이네
고통은 길지만 지나가는 것이고,
생(生)은
애자의 몸을 시커멓게 더럽히며 사라진
찰나의 스파크 같은 것이라네

깨진 애자의 젖은 몸이 길 위에 뒹굴고
미제 험비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불에 그을린 애자의 몸을 밟고 지나갔네
_「애자의 슬픔」 전문


이렇듯 박후기의 시 세계에서 ‘미군 부대’로 상징되는 현실의 상처와 고통을 가장 극명하게 대변하는 것은 “미군 부대 철조망 사이로 남몰래/펩시콜라를 건네주던 아버지”(「도두리」)나 “미군 부대 격납고 지붕에서/땅으로 내리꽂힌 아버지”(「뒤란의 봄」)의 이미지이다.

시인의 기억 속에서 ‘뿌리 뽑힌’ 삶을 산 아버지의 이미지는 “낡고 상처받은 것들의 아늑한 정원”(「뒤란의 봄」)으로 자리하게 되면서 자신의 삶의 근원이자 뿌리에 대한 ‘추억의 힘’으로 작용한다. 시인은 “아버지는/집이라는,/식량과 돈과 희망을 제물로 받는/가장 더럽고도 아름다운 신전을 떠받치던/기둥 속 강철 혈관이었다”(「강철 혈관」)고 추억하면서, “알전구 같은/백목련 꽃봉오리에 내려앉은 햇살이/필라멘트처럼 떨고 있다/필름 속 세상은 깊고도 어두워/오히려 상처가 환하게 빛난다”(「목련」)고 노래하며 “바위의 안부를 묻는 빗방울처럼/쉬지 않고 내세를 두드리는/희망이라는 유전자”(「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를 발견해낸다.

그해 가을,
지구를 떠난 보이저 2호가
해왕성을 스쳐 지나갈 무렵
아버지가 죽었다

이제 우리 집에 힘센 것은
하나도 없다 힘센 것은 모두
우리 집의 밖에 있다

함석을 두드리는 굵은 빗줄기처럼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미군 부대 격납고 지붕에서
땅으로 내리꽂힌 아버지가
멀어져 가는 보이저 2호와
나와의 거리만큼이나
아득하게 느껴질 무렵,

겨울이 왔고
뒤란에 눈이 내렸다

(중략)

그 겨울의 뒤란에는
버려진 것들이 군락을 이루며
추억의 힘으로 자생하고 있었으니,
뒤란은
낡거나 상처받은 것들의
아늑한 정원이었다_「뒤란의 봄」 (부분)


박후기의 시에는 “세상의 무게가 실려 있다. 요즘 흔치 않은 인파이팅 시인으로서 그의 매력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세상의 품 안을 파고들 때 잘 드러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상처를 준 세상조차도 기실 상처투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세상과 함께 가는 길을 모색”(장경린 시인)하고자 하는 열정은 소중하다. 그로데스크한 상상과 도발적인 언어, 초월적인 이미지를 앞세운 이른바 환상주의 계열의 시들이 주류인 듯한 요즘의 젊은 시단에서 박후기의 시는 그 대척점에 곧추서서 서정적 공명이 풍부한 맑은 애가로서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박후기

박후기 시인은 1968년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나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였으며, 2003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하였다.

 

젊은 작가 3人 ‘도시삶’ 다룬 첫 시집 출간 ―― -, 경향신문(2006. 04. 05.)
내 시는 한 발 땅을 딛는다 ―― 위지혜 기자, 컬쳐뉴스(2006. 0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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