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밑으로 열리는 병실 창문에서 부동자세로 서 있는 어떤 病者를 바라보고 있다. 밤나무 가지에
까치가 날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필승” 또 “필승”을 외치는 남자가 있다. 연거푸 거수경례를 붙이는 심각한 남자가 있다. 아침마다 “필승”을
외치는 남자가 있다.//까치가 날아간 가지 하나가 밤나무 전체를 흔들고 있다.//그는 치악산 금대계곡을 오 년째 뒤진다. 토종벌을 치고 푸성귀를
뜯는다. 나무지게를 지고 산에서 내려온다. 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온다. 그는 어느새 치악산 금대계곡 해발 칠백 미터의 흙집에서 혼자 사는 인디언이
되었다.//이른 봄, 금대계곡 얼음을 보며 중얼거린다. “바람이 녹이는 얼음은 바람이 된다/물이 녹이는 얼음은 물이 된다//물소리만 바위 계곡에
남는다.” 마타리꽃에 코를 대고, 자기 냄새를 맡으며 속으로 제 이름을 불러본다. 내가 부르는 나,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내가 부르는 내
이름이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어디에도 등을 보이지 않으려고 반듯하게 누워 자는 그가 뚫린 창호지 문, 세로 문틈 새로 보인다.
_이윤학(시인)
몽유거처(夢遊去處), 고요의
둥지
정용주의 시에 나타나는 ‘방랑벽’은 보편적 삶의 틀을 벗어나고자 하는 의식 지향으로 읽힌다. “나의
걸음은/나의 별을 쫓아가는 것”(「행인일지」), “나는 낯선 지명의 명패 아래 떨고 있는/시외버스의 엔진 소리를 사랑했다”(「터미널 맨」),
“나는 탈영을 생각했고 고깃배를 타고 북대서양 어디쯤 갑판에 누워 별을 보고 싶었다”(「기쁜 우리 젊은 날」), “내 집은 지금보다 먼
어디에/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먼 집」)와 같은 구절에서 드러나듯, 한 곳에 정주하는 삶의 방식을 거부하고 자신의 지향을 ‘떠돎’ 속에
방목하는 시인의 낭만적 기질을 엿볼 수 있다. 그리하여 정용주의 시에 자주 반복되는 ‘집’에 대한 몽상에는 떠도는 자의 고통의 흔적이 배어 있어
왠지 모를 처연함과 쓸쓸함이 묻어난다.
새집 하나 만들어/복숭아나무 가지에 달았다//새는 오지 않았다//그러지 말았어야
했는가/젊은 날/내 집으로 날아왔던/새들을 생각한다면/집을 짓지 말았어야 했는가//눈밭을 헤매는 새의 그림자가 어둡다 (「새집」
전문)
시인은 “넥타이를 풀어헤친 사내/술이 끌고 가는 사내”(「집으로」), “얼마나 먼 곳까지 헤매다 왔는지/문턱에 툭
떨어져/벌벌 기어/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꿀벌”(「집 앞」)의 이미지에 자신의 지난 시절을 투영한다. 일상인의 비애를 “허약한 정신에 이끌려
하루하루 살아가기, 또는 견디기”(「변신」)라고 고백하는 시인은 그러나, “한 움큼의 거처”(「집」)로도 삶을 자족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새들의 집은 얼마나 아늑한가/새집을 볼 때마다 찬탄하는 것인데/유독 산비둘기 집을 볼 때 싱겁기 짝이 없다/늙은 소나무
삭정이가 떨어지다/대충 쌓인 것 같기도 하고/파전의 대파 줄기처럼 숭숭하기도 한데/까치집으로 따지면 바닥 공사만 하다/부도라도 난 것 같은 이
집을 보면 픽/웃음이 나기도 하고 혹 알이라도/떨어지지 않을까 불안하기도 한데/걱정 말라는 듯 새끼 기르고 산다/가느다란 가지에 얹힌 한 움큼의
거처가/산 넘고 하늘 날아다니는 자유로움의/모태가 될 수 있다니/자유는 얼마나 단순하게 태어나는가 (「집」
전문)
얼음 밭에 씨를
뿌리다
자연을 벗삼아 고요 속에서 들여다보는 자기 응시의 시간은 평화롭지만 외롭고 쓸쓸한 것이다.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문지방에서 무릎이 시린 사이, 사십 년을 살”(「순간」)아온 시인은 “제 몸을 얼려 견딘” 후에 “언 몸을 터뜨리고/싹을 틔”(「얼음밭에
씨를 뿌린다」)우는 산당귀의 본성에서 생명의 강인함을 읽어내는 한편, “멈추어 꽃대에 향기 맡지 않고/마타리/되불러보면//내가 내 이름/부르는
소리”(「마타리」)에 젖어들며 ‘나는 어디에 이르고 있는가’를 되묻는 존재의 처연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정용주의 시에 드러나는 외로움의 정서는
슬프지만 어둡지 않다. 그의 외로움은 맑고 조용한 이미지에 의해 조형된다.
눈꽃 왔다 눈꽃 가고/눈꽃 같은 사람 왔다/눈꽃 같은
사람 가고//생각하다/잊어버리고//산목련나무 아래 쏟아버린 세숫대야의 얼음/숨구멍 열어 바람을 마신다//산목련꽃 왔다/산목련꽃 간다
(「산목련나무」 전문)
시인은 “눈꽃”, “눈꽃 같은 사람”’, “산목련꽃” 등의 오고 감을 통해 마음속에 갈마드는 허전한 마음을
드러낸다. 그렇다고 해서 망연히 외로움의 정서에만 빠져드는 것은 아니다. 계절과 사람과 꽃의 오고 감을 담담하게 음미하면서, “사람 흔적 보이지
않고/라디오 소리만 나는 돌집//지나갈 때면 라디오 켜 있나//잠시 서”(「돌집」)서 귀 기울여보는 적막함을 기꺼이 즐기기도
한다.
영혼의 고향, ‘인디언의
여자’
기쁨과 슬픔이 번갈아드는 마음을 다스리는 시인은 이제 세상의 잡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그 빈 자리에 자신을
비추는 쓸쓸한 거울을 놓는다. 연가풍(戀歌風)의 연작시 「인디언의 女子」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애절하고 신비한 에로스적 교감의 세계를
이끌어낸다.
숲에 나무들 흔들리는 소리 몰아 바람이 갑니다//풀들이 쓰러집니다//남아 있는 것들의 목숨이 가벼워집니다//바위의
얼굴을 만지며 계곡을 쓸고 가는//바람 속에 당신이 있습니다//겨울나무 같은 내 육신을//당신이 흔들고 지나갑니다//더 먼 곳으로 가라고 더 먼
모래의 고향으로//당신 영혼을 몰고 가라고//나를 흔들고 지나갑니다//뿌리 둔 것들은 당신을 따를 수 없습니다//산정 높이 솟은 까마귀 날개를
타고//검은 구름 속으로 당신은//겨울나무 같은 나를 흔들고 지나갑니다 (「인디언의 女子 4」 전문)
행간의 간극을 최대화하고 있는
이 시는 느리게 흘러가는 음악의 상태를 감지하도록 독자를 유도한다. 숲과 계곡을 쓸고 가는 ‘바람’은 ‘겨울나무’와 같이 앙상한 화자(시인)의
육신을 흔들고 가는 정령적(精靈的) 존재이다. ‘인디언의 女子’는 부드러운 비물질적 형상으로 숲과 계곡을 가득 채우며 흘러간다. 그녀는 “검은
허공의 방”(「인디언의 女子 2」)이나 “산 안개 휘감긴 먼 능선의 산정”(「인디언의 女子 3」) 등 대기 속에 가득한 존재이다. 시인은 이
대기적 정령에 대해 “뿌리 둔 것들은 당신을 따를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인디언의 女子’는 “더 먼 곳으로 가라고 더 먼 모래의
고향으로//당신 영혼을 몰고 가라고” ‘겨울나무’의 몸을 흔들며 지나간다. 이 흔들림을 몸으로 받고 있는 ‘인디언’의 영혼은 “오래도록 꿈꾸었던
안개의 강으로//최초의 내가 가고 있습니다”(「인디언의 女子 3」)라고 고백한다. 시인은 이제 최초의 존재로 다시 태어나 멀고 먼 영혼의 고향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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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주 시인은 1962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으며, 2005년 계간 『내일을 여는 작가』 가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2003년부터 치악산 금대계곡 해발 칠백 미터에 있는 화전민의 흙집에서 5년째 혼자 살고 있다. 산문집으로 『나는 숲속의 게으름뱅이』(김영사, 2007)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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