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의 문학/시

푸른 손들의 꽃밭 (2007)

실천문학 2013. 8. 12. 00:13

 

 

 

 

 

 

 

 

 

                

 

 

 

 

 

 

 

 

 

 

 

시인은 자꾸, 거기로 간다. 바다로 가고 기차역으로 가고 들판으로 간다. 바람 속 들판에게로, 또 바람 없는 들판에게로. 특히 “사람의 체취가 사라진 들판”에게로. 시인에게 들판은 이렇게 각별한데, 바람과 묵언과 묵시, 찬란한 햇살의 들판은 기차역이 있고 바다에까지 닿게 하는 시의 탄생지이다. “들판의 바람 아래서” 시인은 비로소 “이 작은 별의 분노와 울음을 타고” 원생(原生)으로 건너가 시의 삶을 만난다. 바람에 들판이 전생(全生)을 걸고 흔들렸듯이 시인은 “그 흔들림의 가장 안쪽을 들여다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거기가 바로 시인의 주소. 류외향의 시를 “흔들림의 시학”이라고 불러보고 싶다. _이진명

일상의 시간 속에서 신화의 시간을 살아낼 줄 아는 이가 시인이라면 류외향이야말로 거기에 가장 합당한 시인이다. 제 속도를 이기지 못해 길바닥에 시커멓게 남아 있는 ‘스키드 마크’와 같은 삶 속에서 시인은 근원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망명과 조난에 가까운 이 길 위에서 서로 전혀 다른 시간대를 사는 몸은 “불안과 황홀의 경계를 아슬하게 넘나들”며 아플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아픈 몸을 매개로 시인은 역사와 신화가 만나는 우주적 스케일의 광활한 상상력을 펼쳐 보인다. 미군 헬기가 밤낮으로 떠다니는 들판과 갈매기가 날지 않는 불모의 바다를, “몸속에서 푸른 물빛이 풀어져 나}”는 생명의 감각과 동시에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흙을 부여잡고 엎디어 있는 풀들의 등줄기가 시퍼렇다”고 말하는, 이 모처럼 만의 욱신거리며 생동하는 풍경들에 거듭 “불안과 황홀”을 느낀다. _손택수(시인)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과 탐색의 기록

『푸른 손들의 꽃밭』은 “그대”를 향한 탐색의 기록이다. 시인이 “수천 년을 걸어 그에게로 가”서 “전생과 후생의 언어들”(「풍림모텔」)을 만난다. 만남은 시간의 용솟음 속에서 이루어지고, 이 만남의 언어를 통해 무엇인가가 계속 탄생한다. 시는 만남만으로 그치지 않으며, 만남만이 탄생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이 “그대”를 향한 탐색의 기록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대”의 의미를 캐물을 수밖에 없다. “그대”는 누구인가? 혹은, “그대”는 무엇인가? 시인은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캐묻는 것일까?

거기 역이 있다 한다/지상의 끝에 있을 것 같은 역이/거이 있다 한다//열꽃이 미친 듯이 꽃망울을 터뜨리는 더운 잠에 빠져/내려야 할 곳을 지나쳤거나 지나친 줄도 모르거나/철로의 행선지를 도무지 알 수 없거나/열차를 탄 채 제가 승객이라는 사실을 망각할 때/온몸을 뚫고 들어오는 도고 도고역/그이 혼에 이끌리듯 내려선다 한다/내려서자마자 주춤 발을 물린다 한다/전생의 새벽이 회색 바람에 묶여 와글와글 몰려오고/열차 떠난 자리엔 철로만 남아/수억만 년을 요지부동 엎드려 있었다는/완강한 자세로 철로만 남아/내릴 수는 있어도 탈 수는 없는 도고 도고역/회색 바람을 타고/서릿발 툭툭 털어내며 한 남자 걸어와/잿빛 양복을 펄럴이며 꿈결처럼 걸어와/눈자위 붉게 빛내며/천년만년 같이 살자 말을 건넨다 한다/그 말 하 심상해서/한 남자 소맷자락을 잡고 따라가/눌러 살고 싶어진다고 한다/멀리 드문드문 더운 김을 뿜어내는 산야와/뒤돌아보면 긴 꼬리를 땅속으로 뻗으며/요지부동 엎드려 있는 시간의 무덤들/약속도 없이 저 혼자 덜컹철컹/문을 열었다 닫는다 한다//거기 역이 있다 한다/생의 기척에 무감해 천근만근 무거운/잠 속에서 장기 투숙 하고 있을 때/그 역에 내릴 수 있다 한다 (「도고 도고역」 전문)

서시 「도고 도고역」은 그러한 질문의 모든 것을 총체화하는 작품으로 읽을 만하다. “거기 역이 있다 한다/지상의 끝에 있을 것 같은 역이/거기 있다 한다”는 진술에서 시작하여 “생의 기척에 무감해 천근만근 무거운/잠 속에서 장기 투숙 하고 있을 때/그 역에 내릴 수 있다 한다”는 진술로 시가 끝날 때, 출발과 도착의 모든 상징이 똬리를 틀고 빛을 발한다. 시집은 이 과정과 결과의 파노라마이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지상 저 끝으로 나아가면서 도달하게 되는 “도고역”은 그 은유와 환유의 유래이자 목적지이다. 시의 언어들은 모두 “도고역”의 의미를 드러내려는 기능으로서 존재한다. 그 의미를 향한 반복적 운동이 시의 무모한 운명을 확인하고, 그로써 시는 삶 전체로 확장된다. 이것이 무모한 것은, 선명하지 않은 “회색 바람”(2연)의 와중에 “도고역”이 있기 때문이며, 이것이 운명인 것은 그 회색 바람의 시간이 “무덤”(3연)으로 환언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의미는 선명하지 않고 삶은 저 혼자 캄캄한 운동이다.




“모든 삶은 들판에서 시작되고 들판에서 끝난다”

서시 「도고 도고역」을 거치는 류외향의 시적 전언은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과 탐색이며, 따라서 그만큼 존재들의 생애에 대한 형이상학적 언어 탐구와 닿아 있다. 그의 언어들은 그 탐구를 향한 꿈과 사랑에 의해 나타나고 사라지는 목소리이자 형체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 목소리와 형체는 “꿈”과 “들판”과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시집은 이 세 개의 언어를 중심으로 배치된 사유의 현상학이다. 먼저 “꿈”은 시집의 어디에나 있다. “이미지―꿈”이라는 사실의 마음의 심상이라는 의미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꿈”이라는 언어가 실제로 무수히 반복된다. “잠”과 “꿈”으로 지칭되는 행위들과 사건들(「어느 해, 첫 꿈」, 「겨울, 섬과 잠들다」)이 그것이다. 이러한 “몽유의 흔적”, 즉 무의식은 시의 이해를 의도치 않은 보편적 소통 공간으로 이끌어가는 근거이지만, 시의 언어들은 자신의 개별성을 강조하면서 구성된다. 모든 시들은 다른 시들과 다른 것이고, 달라지려고 하는 노력의 산물이다. 따라서 시에 포착된 대상들도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시는 그 다름에 대한 욕망을 특이하게 실현하는 언어구성체이다. 류외향의 “들판 시편”들이 그렇다. 최근의 그가 집중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이 시편들 속에서 무수하게 많은 들판을 “들판”이라는 언어 하나로 표현하는 것은 모종의 역설을 동반한다. 그의 시에서 들판은 모든 존재들의 수렴과 확산의 공간을 구성하는 기능을 한다. 요컨대 각각의 다른 들판들은 하나의 들판으로 수렴되면서 개별적 존재들로 확산된다.

들판의 묵시록을 보았다/썩은 물웅덩이에 뿌리를 담그고 몸을 누이다 못해/머리까지 거꾸로 처박은 채/여름 지나고 가을 지나고/겨울의 초입에서 들판은 통째로 갈아엎혔다//너무 오래 서 있었다/이제 더는 버틸 수가 없다/미안하다 내 몸이여/식어버린 저 바람에 한 점 한 점 흩어져/우리 살아온 흔적조차 남기지 말아야 하리/우리에겐 거듭날 이승이 남아 있지 않으니/시큰거리는 무릎을 내던지고/전언 없는 하늘에 제를 올리리//지뢰밭으로 변해버린 지 오래인 하늘/더욱 많은 뇌관들이 떠다닐 것이다/아, 이 빈 들의 꺼져가는 숨인 듯/새들 먼 공중을 가뭇가뭇 날아가고/서둘러 떠나는 그 길마저 어지럽히며/미군 헬기 밤낮으로 떠다닌다//들판은 이제 생각을 멈추었다/언젠가 먼 후손들이 살비듬내 풍기는/낱알들의 퇴적암을 발견할 것이다/스스로 제 몸을 풍장시킨 이 들판의/최후의 생각 한 줌 보게 될 것이다 (「빈 들」 전문)

류외향의 들판에는 이름이 없다. 들판은 들판일 뿐이다. 시인에게 들판은 수많은 존재들이 모여 있는 공간일 뿐이지 주체의 의지대로 지배되는 공간이 아니다. 들판은 존재들의 이름 붙일 수 없는 거처이다. 이를테면, 시적 대상들은 시인의 관념에 의해 명명되기 이전의 존재 바로 그것이다. “빈 들”은 그러므로 인간적 의미화의 방향을 거슬러 거꾸로 나아가는 의미의 저장고가 된다. 시인의 들판은 날것 그대로의 삶과 죽음을 희구하는 시적 대상이 된다. 이 특이한 들판으로서의 시적 대상은 따라서 특이한 언어를 환기하고 특이한 자유를 환기하는 것이다. 보편적 의미의 탐구에만 머문다면, 시는 삶의 추상적 형이상학으로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류외향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의 이번 시집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라고 할 수 있는 점이 바로 이것이다. 류외향의 시적 성과는 그 영역들 각각을 별도의 의미로 분리시키지 않고 그 영역들이 서로 몸을 섞고 분출하며 소멸하고 재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일 것이다.


 

류외향 시인은 1973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났다.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였고, 1996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와 1999년 계간 『시안』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집으로 『꿈꾸는 자는 유죄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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