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의 문학/시

사과를 내밀다 (2012)

실천문학 2013. 8. 12. 11:19

 

 

 

 

 

 

 

 

 

 

            

 

 

 

 

 

 

 

 

 

거룩한 속물의 산수(算數)

맹문재 시인의 시는 자기 고백의 시라 할 수 있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화자는 거의 시인 자신과 일치한다. 그는 한때 포항과 광양에서 끓는 쇳물로 밥을 지어 먹은 노동자 출신이지만 현재는 한 대학의 교수가 되어 있다. 이 두 삶에는 어느 정도의 거리가 있다. 그리고 이 거리의 긴장감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계급 간의 긴장감이자 이 시집을 관통하는 시인 자신의 긴장감이기도 하다.

배가 들어올 때마다 짐 내리는 일을 차지하기 위해
개떼처럼 몰려드는 카키색 작업복들
카키색 바닷물이 일렁였고
카키색 오후가 흘렀고
카키색 담배 연기가 흩어졌다
나에게 카키색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으로
순응이 아니라 체력으로
체면이 아니라 그을린 얼굴로 들어왔다
나는 카키색 잠바를 입기로 했다
―「카키색에 대한 편견」 부분

한 백일장 심사를 맡은 시인은 최종 두 편을 읽다가 고민한다. 아니 정확히는 카키색 앞에서 멈추었다고 고백한다. 한 편은 놀라운 표현력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한 편은 밀도가 좀 떨어졌지만 카키색 작업복을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카키색 잠바를” 걸친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카키색에 대한 ‘편견’인 것이다. 노동자의 삶은 지금 그의 현실이 아니지만, 늘 그의 삶에 간섭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승이란 사람에게 돌아가는 일이라고
그의 단식일이 생각보다 힘이 셌다
이인삼각의 결단이
결코 권태의 산물이 될 수 없었다
나에게 필요한 창도 방패도 아니라고
당돌하게 착각했던 날들을
절벽 아래로 떨어뜨렸다
노조 가입 신청서를 처음 썼을 때처럼
갈림길을 지나가기로 했다
―「갈림길을 지나가다」 부분

시인은 밥을 먹다가 숟가락에서 갈림길을 만난다. 자신의 생일과 한 노동자의 단식일이 겹친 것이다. 목숨을 걸어놓고 죽음을 불사하는 것, 희망을 걸어놓고 삶을 불태우게 하는 것이 밥이라는 사실을 노동자의 단식일이 일깨워준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밥을 위해 한 사람의 밥을 끊는 단식이,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차려진 생일상을 내리친다.
어느 순간 그는 노동자로서의 삶으로부터 갈림길을 지나왔다. 그는 다른 시에서 “천 일 넘게 한데서 떨고 있는 기륭전자에 가지 못했다”고 “무척 가고 싶었지만 논문 마감일에 쫓기느라 포기하고 말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다. 그곳은 지리적으로 외진 곳이기도 했지만 “생업을 잃을 위험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인은 “가야 할 곳에 가지 못해 나의 발은 하루 종일 바빴다”(「피곤한 발을 언제쯤 풀어줄 수 있을까?」)고 고백한다. 그런데 오늘 문득 생일상을 앞에 두고 그는 “노조 가입 신청서를 처음 썼을 때처럼 갈림길을 지나가기로” 결심한다. 이유인 즉, ‘계승’과 ‘연대’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사람의 목숨을 걸고 사람에게 돌아가고자 하는 길이 저 갈림길 끝에 있기 때문이다.


천명(天命)을 모르다

2
몇 발짝 옮겼는데
고무딸기보다 검은 개 한 마리가
도둑을 잡았다는 듯 막아섰다
딸기 하나 따 먹고 도둑놈 취급을 받기에는 억울했지만
송아지만 한 개를 이길 수는 없었다

3
어느덧 날이 저물어오고 있었다
나는 개에게 붙잡힌 채 고무딸기를 내뱉고 있었다
― 「오십 세」 부분

같은 제목의 다른 시 「오십 세」의 일부분이다. 시인은 올해로 오십 세가 되었다. 듬직한 아버지에 의젓한 아들이 되어야 할 시인에게 그동안 내 것이라 생각했던 것들을 다 내놓으라고 덤비는 순간, 시인은 그 ‘검은 개’ 앞에서 당혹스럽다.
시인은 열한 살짜리 딸을 수술실에 들여보내고 식구들로도 부족해 “하늘의 옷을 입고 있는 하나님도 돌다리 앞에서 등을 보이고 있는 부처님도 떠밀었다”(「하나님의 등을 떠밀다」). 시인은 시골로 가시려는 어머니를 붙잡아두고는 “하루 종일 양계장의 닭처럼” 집 안에 가둬놓고는 가장 노릇을 한다고 철없이 설쳐댔다. “어머니가 새우잠을 자는 밤 어디선가 청개구리 울음이 들렸다”(「어머니를 울리다」). 그리고 시인은 “여든 살 아이가 되어 큰아들에게 이르”시는 아버지 앞에서 무능력해진다. 시인의 아버지는 “마을 이장이 농자금 추천을 자기 편 사람들만 한다고 이르신다/중풍 때문인지 손발이 뻣뻣하다고 이르신다 (중략) 엊그제 이른 일을 또 이르신다/여든 살 아이가 되어 큰아들에게 이르신다”(「아버지가 이르신다」).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주택가 골목을 지나다가 고무딸기 한 개를 따 먹었을 뿐인데 목줄을 달고 막아선 개 앞에서 졸지에 도둑놈이 되고 말았다. 세월은 가진 것을 다 내놓으란다.


시인은 젊다

시집의 맨 뒤에 실린 시인의 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누군가) 흉기라도 꺼내 들고 덤비면 어쩌나 겁이 났지만, 나는 아직 젊다고 생각했다. 세 번째 시집 이후 칠 년 만에 내는 시집 원고를 출판사에 넘기는 이 새벽의 기분도 그러하다.”
시인은 아직 젊다. 시인이라는 이름과 욕망이 있는 한 그의 젊음에는 끝이 없다. 그리고 시인의 욕망이 끝없는 한 고통도 계속될 것이다. 고통은 삶과 함께 손잡고 온다. 시인이 고통 속에서 욕망하며 끊임없이 시를 쓰고 시적 대상과 완전히 몰입할 동안 시인의 긴 방황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 추천의 글
맹문재 시인의 시를 읽으며 글이 주는 감동의 원천이 진정성에 있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그의 시는 치장이 옅고 기교도 적어 수수하고 무덤덤해 보이기까지 하는데, 그 무표정한 것 같은 민얼굴이 그대로 겉과 속이 완전히 같은 진실한 사람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솔직하고 정직한 시심으로 읽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그의 시를 나는 ‘투명함의 시학’이라고 규정하고 싶다.
맹문재 시인은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 있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그들의 생각을 외치고자 하지 않는다. 시인은 다만 그들의 목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껴안고, 어루만지고, 위무하고자 할 뿐이다. 시인은 종종 일상에 매몰되어 그들과 함께 있지 못하는 난처한 상황을, 또 그들과 함께하며 겪을지도 모를 신분적 불이익을 내심 걱정하는 마음도 내비친다. 이렇게 솔직하게 마이너리티의 삶에 다가가는 시를 읽은 적이 있는가? 맹문재 시인은 역설적이게도 ‘순수한 참여시’를 쓰고 있는 것이며 그래서 그의 시는 아주 선한 얼굴을 하고 있다.
시의 포멀리즘이 점점 기승을 부리고 위트와 기교에 의존하는 시들이 많아지며, 외부로 통하는 문을 닫은 채 혼자서 중얼거리는 시들이 득세하는 풍조 속에서 마이너리티의 애환을 담담하게 그러나 뚝심 있게 전하는 맹문재 시인의 목소리는 오랜만에 시의 무게를 묵직하게 느끼게 한다.
_ 고형진 (문학평론가)

 

1963년 충북 단양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91년 『문학정신』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먼 길을 움직인다』, 『물고기에게 배우다』, 『책이 무거운 이유』가 있다. 전태일문학상, 윤상원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안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제1부 잘생겼지요?|책을 읽는다고 말하지 않겠다|시인|하나님의 등을 떠밀다|어머니를 울리다|시집|아버지가 이르신다|벚꽃에 들어앉다|시간을 읽으면|비단개구리를 업다|모기 앞에서|사과를 내밀다
제2부 등불|의자|카키색에 대한 편견|분서|못 꿈|피곤한 발을 언제쯤 풀어줄 수 있을까?|어떻게 혼낼 수 있을까?|나는 핸드크림을 바르지 않는다|교가를 부르다|갈림길을 지나가다|거리에 불붙이다|약속|개에게 무릎 꿇다
제3부 멕이는 전략|살생|숟가락에 나비를 얹다|눈썹이라니까요|사십 세|동행|국수|서시 앞에서|오십 세|슬픈 웃음|소음으로 향하다|12. 12.|소|거미 앞에서|김규동 시인
제4부 탱자나무|나는 언제까지 혁명의 책들을 골라 올까?|마침내 신호등이 바뀌었다|우연도 이데올로기|보리수나무 아래에서|용서에 대하여|이끼를 담보로 잡히다|이분법에 대하여|이발소에 가는 이유|주식을 해봐|그에게 전화를 걸어주고 싶었다|나무에게 절하다|시인과 이자|오십 세
해설 오연경|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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