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의 문학/시

바다가 처음 번역된 문장 (2012)

실천문학 2013. 8. 12. 11:17

 

 

 

 

 

 

 

 

 

 

               

 

 

 

 

 

 

 

 

 

 

길을 나선 자의 노래

시인의 이번 시집에는 곳곳에 ‘길’이 등장한다. 길은 예전부터 시인을 매우 강렬하게 사로잡았던 시적 매개였다. 십 년 전에도 시인은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을 보면 공연히 가슴부터 뛴다. 그 길에는 이 세상 모든 것이 들어 있을 것만 같다. 그것을 환상으로 부풀려 바라본다 해도 길이란 우리를 얼마나 사로잡는가”(「내 정신의 주소—압해도」)라고 고백한 바 있다. 그만큼 시인에게 ‘길’은 작품 세계의 구성에 있어 큰 비중을 차지해왔다. 길은 가보지 않은 세상으로 시인을 데려다줄 뿐만 아니라 생각하지 못했던 세계로 시인을 옮겨다준다. 시인에게 길은 단지 통로나 연결고리, 매개체에 국한되지 않고, 곁을 오래 지킨 사람처럼 의인화되어 있다. 시 「당인리」는 바로 그 인격체적인 길의 행태와 이야기를 표현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샛강 쪽으로 쓰러진 샛길 하나 겨우 일어선다.
젖은 갈대 줄기에 실다리를 감은
방아깨비와 실잠자리들
아직도 낮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연기도 나지 않는 발전소 굴뚝들 위로 불씨 같은 해가
일직선으로 각도를 맞춘다.
눈이 시린 나는 그 해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다.

문득 당산철교 위를 달리는 소란한 전동차 몇 량
그 아래 강물 속 비명을 감춘 당인리는
휘어진 등 지우고 없다.
― 시 「당인리」 부분


수많은 길들이 그려진 한 장의 지도, 삶

시집에 실린 작품의 제목들을 면면히 살펴보면 구체적인 장소가 제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앞에서 읽은 시 「당인리」 외에도 「정동진역」, 「승부역」, 「산천동 가는 길」, 「요셉의원」. 「복음약국」, 「곰소항 2」 등이 그렇다.
그런데 시집에 실린 시들이 ‘길’이라면 이 시집은 일종의 ‘지도(地圖)’가 된다. 이 지도는 우리 삶의 다양한 정경들을 그리고 있다.

순두부는 잘 익은 바다 냄새를 초당에 진동시킨다.
구름의 흰 배때기만 한 자루에서 꺼낸 두부는
빨리빨리 네모로 잘려지고
사람들은 연애의 첫맛을 음미하려는 듯 스르르 눈을 감는다.
― 시 「초당 두부」 부분


역사는 처음부터 없었다고
다 낡은 환상만 내다놓은 나무 의자들
공허가 주인공처럼 앉아 있다.
그 발치엔 먼 데서 온 파도의 시린 발자국들
햇살 아래 쏟아낸 낱말들이
실연처럼 쌓이고
우우우 모래바람 우는 소리,
먼저 도착한 누군가 휩쓸고 갔나 보다.
― 시 「정동진역」 부분

시인의 시 쓰기는 여행과 닮았다. 여행을 떠나기 전의 설렘은 시인이 시적 대상을 만나거나 상상하는 것과 같은 즐거움이다. 시인은 자신의 바라는 대상을 만나기 위에 길을 나선다. 하지만 마침내 먼 길을 돌아 그 대상과 만나게 되었을 때 시인은 과연 기뻤을까? 슬펐을까? 시인은 그것을 말이 아닌 바다 냄새가 진동하는 두부의 향기로, 울음 우는 모래 바람 소리로 들려준다.
삶을 바라보기 위해 나선 길이 꼭 먼 길일 필요는 없다. 그 길은 집 바로 옆으로 나 있는 소로(小路)일 수도 있고, 험난한 고행의 길일 수도 있다.


생이란 매달려 피어 있는 것

시인은 어느 날 귀가하던 중에 전동차 안의 노인들을 바라보게 된다. 그들의 손에는 각기 제 몫의 약봉지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우산과 약봉지를 꽉 끌어안은 몇몇은/졸면서도 안도의 미소를 짓는 여유를 보인다./툭, 떨어지면 안 될 소중한 제 날개들처럼/그들의 품 안에서 끊임없이 펄럭이는 비닐봉지들’. 시인 역시 그날 ‘병원 처방의 약봉지를 받아’들고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죽을 때까지 이 약 먹어야 해요
간과 신장에는 독이 될 수 있어요’
유독 죽을 때까지, 란 의사의 말이
전철 안 흔들리는 손잡이에 의존한
내 손을 붙잡고 놓을 줄 모른다.
― 시 「약봉지 받아든 날」 부분

사람들은 고통을 피해서 삶을 살아가려고 한다. 하지만 고통이 삶의 피할 수 없는 일부임을 인정해야 하는 시간이 온다. 고통을 받아들일 때 그의 삶은 그 고통의 크기만큼 확장된다. 시인은 마른 나무 가지 끝에 매달린 제라늄을 보며 ‘생이란 매달려 피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매달림’과 ‘고통’은 어쩌면 ‘삶’이라는 단어의 이음동의어일지도 모른다. 꽃이 가지에 매달려 있지 않는다면, 사람이 살아가지 않는다면 고통은 없을 것이다.


풍경의 프레임을 넘어선 세계

지금은 고인이 된 한 시인은 노향림 시인이야말로 “쓸쓸하고 황량함을 찾아내는 일급 선수”라고 평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향림 시인은 그동안 빼어난 회화성으로 삶의 고통과 존재를 탐구하는 시를 써왔으며, 많은 평론가와 시인, 독자들도 그런 시인의 힘과 감각에 경의를 표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시집을 읽으면서 역설적으로 시인의 그런 회화성의 프레임을 넘어서야 진정한 시인의 심장에 닿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번 시집은 풍경이 풍경을 넘어서는 ‘먼 너머의 세계’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산굼부리에 갔네. 능묘같이 높기만 한 몇몇 오름을 거쳐 한 오름에서 내려다보네. 화산 폭발로 생겨난 분화구 그 붉은 아가리에선 아직도 산짐승 울음소리가 들리네. 누천년 동안 자란 숲이 그 소리를 덮었어도 저 검게 입 벌린 움푹 팬 원시림이 생생히 다시 퍼 올려주고 있네.
온갖 희귀 종류의 나무들 이름은 몰라도 좋네. 이리저리 몸 비틀며 키 올리는 나무들에게선 우우 반벙어리 울음소리가 들려왔네. 다가서보면 천 길 낭떠러지로 아찔해 멈칫 물러서고 마네. 그 밑은 시커먼 용암이 숨어 있어 제주 사람들은 검푸른 바다 빛 맹금류나 맹수들이 산다고 믿는다네.
무덥고 비 많이 오시는 여름날 날개 꺾고 숨어 들어간 새들은 나오지 않고 짝짓기를 하거나 나는 연습을 한다네. 나는 시 한 편 보듬어 기르기를 석 달 열흘 걸리기도 해, 맹금류처럼 서슬 퍼런 눈으로 생각의 깊숙한 구멍에서 나는 연습을 해야 하네.
미처 떠나지 못한 새들이 짝짓기를 하는 동안 파도는 몇 바퀴째 소용돌이치며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며 달려드네. 짠 바닷바람에 알몸이 하얗게 절여지는 바위에 걸터앉으면 음습한 갈매기들이 떠올라 한없이 멀리 쐐기문자들로 박히네.
사방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숙한 구멍에선 절창의 시 몇 줄이 내 귓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바다로 가네. 곧 어둠에 젖어버린 습지처럼 웅크린 나는 좀처럼 일어설 수가 없네. 산굼부리를 앞에 두고 갈 수가 없네.
― 시 「산굼부리 2」 전문

이 시에서 시각으로 포착되는 것은 오름, 분화구, 숲, 나무, 파도뿐이다. 하지만 시를 압도하는 것은 보이지도 않고, 그릴 수도 없는 “울음소리”다. 시인은 제주도의 산굼부리를 찾아 분화구 아래 존재하는 원시적 생명력을 상상한다. 용암이어도 좋고, 고대적 맹금류의 사나움이어도 좋다. 시인은 분화구 밑 검은 구멍 아래 거센 울음소리를 듣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울음소리는 분화구 내부와 시인의 내부에서 동시에 올라온다. 누천년의 원초적 힘에 대한 직감이 시인 내면에 공명해 같은 울음소리로 떨고 있는 것이다. 노향림 시인의 작품은 풍경의 프레임을 발판으로 그것을 넘어서려는 지향성을 보이고 있다. 시인이 세계와 소통하는 순간에 기진하는 극적인 경험을 이 시집을 읽는 독자 또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 욕망의 존재

시집의 맨 뒤에 실린 시인의 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세계와 나를 연결시켜주는 유일한 것이 시 쓰기다. 시적 대상은 처음엔 낯설게 거리를 두었다가, 이내 간격을 좁혀 내 속으로 들어온다. 나는 그것에 완전히 몰입할 때까지 시를 쓴다.”
시인의 욕망에는 끝이 없다. 시인의 욕망이 끝없는 한 고통도 계속될 것이다. 고통은 삶과 함께 손잡고 오는 것이기에 마냥 싫지만은 않다. 시인이 고통 속에서 욕망하며 끊임없이 시를 쓰고 시적 대상과 완전히 몰입할 동안 시인의 긴 여행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1942년 전남 해남에서 출생하여, 중앙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1970년 『월간문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눈이 오지 않는 나라』,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 등이 있다. 1987년 대한민국문학상, 1999년 한국시인협회상, 2002년 이수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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