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첫눈 김진경 길바닥에까지 전을 벌여놓은 마포 돼지껍데기집 빨갛게 달아오른 연탄 화덕을 끼고 앉아 눈을 맞는다 어허 눈이 오네 머리칼 위에 희끗희끗 눈을 얹은 윤가가 큰 눈을 뜬다 대장간에 말굽 갈아 끼러 왔다가 눈을 만난 짐말들처럼 술청 안의 사내들이 술렁댄다 푸르륵 푸르륵 김을 뿜어대.. 손택수 시인의 지상에 시 한 편 2008.12.01
사라진 밍크이불 사라진 밍크이불 이진심 그 시절, 어지간한 집엔 장롱마다 그 놈이 살고 있었다 반듯하게 펴려 해도 꼭 어딘가 한 군데는 주름져 있던 털이 여러 군데로 쓸려져 보는 방향에 따라 모습이 달랐던, 가을철에 장롱에서 기어 내려와 겨울 지나 봄까지 방바닥에서 온갖 게으름을 피우며 개어지는 법 없이 아.. 손택수 시인의 지상에 시 한 편 2008.11.26
물푸레나무 물푸레나무 김태정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어스름 어쩌면 물푸레나무는 저 푸른 어스름을 닮았을지 몰라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부끄럽게도 아직 한 번도 본 적 없는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은 어디서 오는 건지 물속에서 물이 오른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물푸.. 손택수 시인의 지상에 시 한 편 2008.11.25
잘 익은 사과 잘 익은 사과 김혜순 백 마리의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가는 아기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 손택수 시인의 지상에 시 한 편 2008.11.24
붕어빵 붕어빵 이학성 우린 말하고 싶었어 이 숨막히는 사실을 처음에는 달아오른 화덕 위에서 뜨거움 참아내느라 몇 번인가 기절하고 몸을 뒤집었는지 우리는 각자 고만고만한 방으로 들어갔지 바깥에서 억세게, 출구를 닫자 텅 빈 방에 스며드는 공포 속에서 지금껏 모든 일은 여기서 끝나누나! 틀의 엄청.. 손택수 시인의 지상에 시 한 편 2008.11.19
개밥바라기 개밥바라기 박형준 노인은 먹은 것이 없다고 혼잣말을 하다 고개만 돌린 채 창문을 바라본다. 개밥바라기, 오래전에 빠져버린 어금니처럼 반짝인다. 노인은 시골집에 혼자 버려두고 온 개를 생각한다. 툇마루 밑의 흙을 파내다 배고픔 뉘일 구덩이에 몸을 웅크린 채 앞다리를 모으고 있을 개. 저녁밥 .. 손택수 시인의 지상에 시 한 편 2008.11.18
쟁반탑 쟁반탑 복효근 탑이 춤추듯 걸어가네 5층탑이네 좁은 시장 골목을 배달 나가는 김씨 아줌마 머리에 얹혀 쟁반이 탑을 이루었네 아슬아슬 무너질 듯 양은 쟁반 옥개석 아래 사리합 같은 스텐 그릇엔 하얀 밥알이 사리로 담겨서 저 아니 석가탑이겠는가 다보탑이겠는가 한 층씩 헐어서 밥을 먹으면 밥먹.. 손택수 시인의 지상에 시 한 편 2008.11.17
수련 수련(睡蓮) 심창만 선정(禪定)은 조는 것 풀 끝에서 뿌리로 졸음을 밟고 내려가는 것 내려가 맨발로 진흙을 밟는 것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차지게 뭉개내는 것 물비린내 나도록 발자국을 지우는 것 지운 얼굴 위로 물을 채우는 것 물방개처럼 허우적대지 않고 구름의 실뿌리를 놓아주는 것 오후 두시.. 손택수 시인의 지상에 시 한 편 2008.11.12
마른 들깻단 마른 들깻단 정진규 다 털고 난 마른 들깻단이 왜 이리 좋으냐 슬프게 좋으냐 눈물 나게 좋으냐 참깻단보다 한참 더 좋다 들깻단이여, 쭉정이답구나 늦가을답구나 늙은 아버지답구나 빈 밭에 가볍게 누운 그에게서 새벽 기침 소리가 들린다 서리 맞아 반짝거리는 들깻단, 슬픔도 저러히 반짝거릴 때가.. 손택수 시인의 지상에 시 한 편 2008.11.11
호랑나비돛배 호랑나비돛배 고진하 홀로 산길을 오르다 보니, 가파른 목조계단 위에 호랑나비 날개 한 짝 떨어져 있다. 문득 개미 한 마리 나타나 뻘뻘 기어오더니 호랑나비 날개를 턱, 입에 문다 그리고 나서 제 몸의 몇 배나 되는 호랑나비 날개를 번쩍 쳐드는데 어쭈, 날개는 근사한 돛이다. (암, 날개는 돛이고 말.. 손택수 시인의 지상에 시 한 편 2008.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