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쟁이 어린이 동시집> 시리즈를 통해 김용택, 도종환, 안도현, 임길택 등의 동시집을 내놓으며 한국 아동 문학에 ‘동시’의 새 장을 열었던 실천문학사에서 한국 대표적 시인 신경림의 첫 동시집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를 출간하였다. 현재 초등 교과서에 다수의 작품들이 수록된 이 시리즈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이번 동시집은 대시인의 첫 동시집에 걸맞게 유희과 계몽, 아이디어와 재치에만 기대어 도시 색채를 입은 여타 동시집과는 결을 달리한다.
이 땅 역사의 산증인으로서, 민족 운명 공동체를 직접 체휼한 노시인만의 ‘가난한 마음’의 정서가 짙게 배어 있다. ‘현존하는 미래’로 불리는 아이들의 세계를 ‘어른 안의 아이’된 모습으로 그들의 세계(동심)를 그림으로써, 우리 안에 자취를 감춘 ‘동시’의 원형을 복원하고 있는 듯하다.
1. 일흔일곱 소년이 쓴 샘물 같은 동시
민중 시인으로 한국문학을 이끌어 온 시인은 어느덧 희수(喜壽)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첫 동시집을 출간한 데에는 동심의 근원을 찾아서 떠난 한 소년의 발자취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는 신경림 시인의 시심이 아직도 젊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신경림 시인은 왜 뒤늦게 동시를 쓰게 되었던 걸까? 시인에게 있어 동시란 어떤 것을 의미할까? 이에 대한 시인의 생각을 읽어 보자.
내가 정말로 동시를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을 절실히 한 것은 손자가 생기면서다. 서로 이웃해 살면서 손자와 만날 기회가 잦았고 이미 나도 많은 일에서 손을 떼어 손자와 보낼 시간이 충분했다. 나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손자의 생각과 행동을 읽으면서 이것을 형상화하면 정말로 훌륭한 문학이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어쩌면 성인의 삶을 그리는 것 이상의 본격적인 인간탐구의 문학이 될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그래서 동시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 작정했듯 한 권의 동시집이 될 만큼의 동시를 써 보니 동시를 쓰는 일은 역시 즐겁다.
_산문 「나와 동시」 부분
이처럼 시인에게 있어 동시란 손자와 친구가 되어 어린아이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느껴 보는 천진함이라고 할 수 있다. 천진함이 하늘이 내린 인간의 투명하고 순수한 본성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한다면 이번 동시집은 인간탐구의 가장 근원적이고 순수한 문학적 여정의 결과이다. 따라서 이번 동시집의 가장 큰 특징은 대시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들의 천진함(동심)을 그대로 담았으며, 이것은 인간 본성의 근원적 탐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격변의 현대사를 통과해 온 노시인이 아이들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과 아이들의 마음을 어떻게 작품으로 형상화하였는지 작품을 통해 살펴보자.
2. 비밀이 가득한 동심의 세계
부모들은 자신이 통과해 온 어린 시절의 마음을 기억할 수 없다. 그렇기에 아이들의 마음을 읽을 수가 없다. 그러나 노인들은 아이들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어린 시절의 마음을 기억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의 순수함을 엿볼 수 있는 통찰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동심에 대한 신경림 시인의 시적 발로는 손자를 통해 이루어졌다. 어른들은 모르는 아이들의 속마음을 보게 된 것이다. 어려운 비유나 상징이 아닌 단순한 상황 묘사만으로도 훌륭하게 동심을 표현해 내고 있다.
붉고 노란 꽃밭이 된
아파트 빈터
아빠와 엄마는 아름답다고
정말 아름답다고
나는 끝내 말 않을 거야
그 꽃들을 내가 심었다는 걸
싸우고서 말도 안 하던 동무가
아무도 모르게 생일 선물로 준
꽃씨 한 봉지
-「비밀」 부분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비밀을 하나씩 잃어가기 때문에 찾아오는 것은 아닐까. 동심이라는 것은 결국 자신만의 비밀을 간직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잃어버린 비밀을 대신해서 숫자와 명예, 돈, 권력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시를 통해 신경림 시인은 동심이라는 것은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동시에서는 이런 동심으로 어린아이들의 고민을 대신해서 보여주고 있다.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다
“열 시까지 갈게”
엄마는 야근
아빠는 회식
학원에 갔다 와서
라면 하나 먹고
(중략)
텔레비전을 틀었다가
핸드폰을 열었다가
깜박 텔레비전 앞에
잠이 들었다
이윽고 귓전에
엄마 목소리
“얘는 날마다
텔레비전만 보나 봐”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부분
이 시는 맞벌이 부모를 둔 어린아이가 부모님을 기다리며 외롭게 잠들었다가 엄마에게 텔레비전만 본다는 꾸중을 듣는 장면이다. 외로운 저녁을 보내는 아이의 심경도 잘 드러났지만 그런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의 목소리는 더욱 아이를 슬프게 한다. 동심은 어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 들지 않는 까닭에 비밀처럼 보이는 것은 아닐까.
3. 아이들의 눈은 정직하다
아이들의 눈으로 바라 본 어른들의 세계는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까?
때론 어떤 비유나 상징보다 사실성이 주는 인식의 충격은 더 크게 작용한다. 어떤 정치적 이데올로기보다 더 큰 울림으로 현실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천진한 아이들의 시선이다. 아이들의 시선은 정치적 이해관계를 벗어나 본질을 그대로 투영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아이들의 눈은 어른들보다 정직하다. 신경림 시인은 이런 아이들의 눈으로 우리 어른들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고 싶다
휴전선 너머까지 달리고 싶다
압록강을 건너 달리고 싶다
평양에 가선 평양 아이들을 만나고
몽골에 가선 몽골 아이들을 만나서
동무가 되어 달리고 싶다
-「자전거를 타고」 부분
이 동시는 어른들의 세상과 관계없이 그저 자전거를 타고 평양이나 몽골에 가서 친구들을 만나고 싶은 아이의 천진한 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왜 아이들이 어른들의 정치적 이념으로 인해 서로 만날 수 없는 현실이 된 것일까. 이것은 아이들의 눈으로 보면 너무나 이상한 일이다.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의 세계는 또 있다.
강물은 얼마나 아플까
불도저와 다이너마이트로 온몸을 온통
깨고 부수고 파헤쳐 놓았으니
강물은 얼마나 서러울까
모래무지 가물치 버들치가 놀 곳을 잃어
떠나서는 영 돌아오지 않으니
- 「가엾은 강물」 중에서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자연이 파괴되는 현실은 어린아이들의 눈으로 보아도 파괴적이고 죽음의 공간으로 비춰지고 있다. 바로 정부의 4대강 사업으로 인해 자연이 몸살을 앓고 있는 모습은 이해관계가 없는 아이들의 정직한 눈에는 그저 부수고 파헤치는 모습일 뿐이다. 우리의 강산은 어른들의 소유물이 아니라 미래의 우리 아이들에게 있다. 이제 그들에게 물려줄 자연은 어른들의 욕심으로 인해 파괴되고 있으며, 서럽고 외로운 모습으로 남았다.
이번 신경림 동시집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의 전체 구성을 보면 1부에서는 어린아이들의 주변 환경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로 이루어졌다. 특히 이주노동자들의 애환과 다문화가정 친구들을 바라보는 순수한 어린아이들의 따뜻한 시선이 담겨있다. 2부에서는 아기 다람쥐, 곰, 아기 노루, 고양이, 잉어 등의 동물들과 친구가 되어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3부에서는 순수하고 평화로운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다. 아기의 옹알대는 소리와 싸락눈 오는 소리, 애벌레 숨 쉬는 소리, 아기 곰이 쿨쿨 잠든 모습들은 아름답고 정겹기만 하다. 4부에서는 동화적 민중 서사시가 3편이 마련되었다. 각각이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할아버지가 손주에게 들려주는 옛날 얘기처럼 재미있게 구성되었다.
지은이 _신경림
신경림 선생님은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충주고교와 동국대 영문과를 다녔으며, 대학 재학 중 문예지 『문학예술』에 「갈대」, 「낮달」 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습니다. 시집에 『농무(農舞)』, 『새재』, 『가난한 사랑노래』,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낙타』 등이 있으며, 산문집에 『시인을 찾아서』, 『민요기행』 등이 있습니다. 만해문학상, 단재문학상, 대산문학상, 호암상(예술부문), 4·19문화상 등을 수상했고,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민족예술인총연합 의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현재 동국대 국문과 석좌교수와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있습니다.
그린이 _이은희
이은희 선생님은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원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일러스트레이션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림을 그린 책으로 『선생님 나도 업어주세요』, 『우리고전인물』, 『누가 더 놀랐을까』 등이 있습니다. 현재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며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 중입니다.
◆ 차 례
책을 펴내면서
1부 달라서 좋은 내 짝궁
서울 하늘
공사장 아저씨와
오빠 손은 마귀 손
달라서 좋은 내 짝꿍
슬그머니 돌아서서
친구들끼리 둘러앉아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토요일
어른들은 싫은가 봐
가엾은 강물
어른들은 싸우고
온 세상이 새파랗고 눈부시겠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다 알고 계셔서
말하면서
2부 자전거를 타고
자전거를 타고
아기 다람쥐의 모험
달려라 꼬마
산길을 조용조용
아기 노루
비밀
짝꿍
겨울밤
닮아서
아파트 마당의 고양이
학교 앞에는 큰 은행나무
잉어 왕자
할머니의 손
3부 추운 별
저 별에도, 또 저 별에도
추운 별
소리
우리 아기 깰라
쿨쿨
쑤욱쑤욱
눈이 온다
너는 콩쥐 나는 팥쥐
옛날 옛날 아주 옛날
해 넘어가기 전
노랗고 빨갛고
빨주노초파남보
매미와 개미
4부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동네
꼬부랑 할머니가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동네
저기 저기 저 눈깔
산문 나와 동시
손자와 친구가 된 일흔여섯 노시인의 동심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신경림 지음ㆍ이은희 그림
실천문학 발행ㆍ104쪽ㆍ1만원
이훈성기자 hs0213@hk.co.kr입력시간 : 2012.05.25 20:49:59
신경림(76) 시인이 등단 57년 만에 처음 펴내는 동시집이다. 시인은 4년 전 낸 열 번째 시집 <낙타>에 동시 7편을 싣고, 재작년 동시 전문지 '동시마중'에 신작 7편을 발표하는 등 최근 들어 동시 창작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수록작 43편은 최근 6~7년 사이에 쓴 것으로, 절반 이상이 처음 발표하는 작품들이다.
시인은 시집에 "손자가 생기면서 동시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었다"며 "나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손자의 생각과 행동을 읽으면서 이것을 형상화하면 정말로 훌륭한 문학이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적었다. 그 창작 동기가 동시에 대한 계몽주의, 현실참여주의와 거리를 두고 "다만, 아이들의 세계에 들어가 아이들의 눈으로 세상을 살고 보았다"는 시인의 시작(詩作) 방식과 상통한다.
'붉은 노란 꽃밭이 된/ 아파트 빈터/ 아빠와 엄마는 아름답다고/ 정말 아름답다고// 나는 끝내 말 않을 거야/ 그 꽃들을 내가 심었다는 걸// 싸우고서 말도 안하던 동무가/ 아무도 모르게 생일 선물로 준/ 꽃씨 한 봉지// 나는 끝내 말 않을 거야/ 그걸 내가 심었다는 걸// 우리 비밀 곱게 핀/ 아파트 빈터'('비밀')
쟁쟁 운을 살려 아이들을 낭독의 즐거움으로 이끄는 시들도 여러 편이다. '다람쥐가 놀랄라/ 산토끼가 놀랄라/ 발걸음도 조용조용/ 말소리도 조용조용// 멧비둘기 놀랄라/ 산 꿩이 놀랄라/ 노래도 조용조용/ 휘파람도 조용조용'('산길을 조용조용'에서)
시집 속 아이들의 눈이 문제적 현실을 향할 때 어른들도 함께 읽을 만한 동시들이 탄생한다. 아파트 공사장에서 일하는 얼굴이 검은 아저씨에게 아이(시적 화자)는 우유를 건네며 묻는다. '아저씨 딸, 나만큼 예뻐요?/ 아저씨 딸, 나보다 키가 커요?'('공사장 아저씨와'에서) 이 천진한 질문이 외국인 노동자를 에워싼 차이의 논리를 무력화하고 평범한 한 남자와 대면하게 한다.
영어 교육 광풍도 동심 앞에 머쓱해진다. '미국 어린이는/ 미국 말로 얘기를 하고// 중국 어린이는/ 중국 말로 놀이를 하고// 아기 비둘기는/ 비둘기 말로 노래를 하고// 우리는 우리말로 공부를 하는데// 어른들은/ 그것이 싫은가 봐'('어른들은 싫은가 봐'에서) 표제작은 번갈아 가며 늦은 귀가를 알리는 맞벌이 부모를 기다리다가 결국 텔레비전을 켜놓고 잠든 아이의 독백이다. '이윽고 귓전에/ 엄마 목소리// "얘는 날마다/ 텔레비전만 보나 봐"//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시집 4부에 실린 장시(長詩) 3편은 시로 쓴 전래동화처럼 읽힌다. '두부 일곱 모 쑤어 이고' 손주들을 만나러 산길을 나선 할머니('꼬부랑 할머니가'), 끼니를 구하려 얘기 듣길 좋아하는 부자를 무작정 찾아나선 먹보('저기 저기 저 눈깔') 등이 그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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